랑희(인권운동공간 활)
7월 23일 텔레그램 알림이 울렸다. 몇 장의 사진이 올라왔다. 온통 풀이 우거진 경사를 오르는 사람들이 보인다. 다음 사진을 보고 경사가 상당히 가파른 언덕인 걸 알았다. 노동조합 조끼를 입은 누군가 팔을 뻗어 올라오는 사람을 잡아주려 한다. 오르막의 끝 펜스 뒤에 몸을 바짝 붙인 사람들이 뻗은 손들이 가파른 경사를 오르는 사람들을 기다린다. 그 손들 앞에 경찰들이 서 있다. 아마 이 손들은 동료를 놓치지 않으려 하면서 그들을 가로막는 경찰들을 떼어놓기 위해 안간힘을 쓸 것이다. 흡사 탈출 혹은 기습 같은 이 상황은 대체 무엇인가?
이들은 23일째 건강보험공단 앞에서 파업을 벌이고 있는 건강보험고객센터 노동자들이다. 노동조합은 원주시 거리두기 2단계에 맞춰 8개 거점에서 99명씩 집회신고를 마쳤는데, 집회 하루 전에 거리두기 3단계로 격상하면서 집회만 4단계를 적용했다. 집회는 금지되었고 경찰은 1,600여 명을 투입해 건보공단 인근에 검문소를 설치해 차량 진입을 막고, 차벽을 세우고 철제 펜스를 설치해 원천봉쇄를 했다. 집회를 할 수 없더라도 동료들을 만나야겠다는, 함께 있어야겠다는 절박한 마음이 언덕을 오르게 했을 것이다. 우리를 가로막는 차벽을 해체할 수 없다면 새로운 길을 내어 가겠다는 마음을 먹게 했을 것이다. 이런 마음을 멀리서 사진을 보며 상상하는 나의 마음은 슬픔과 응원과 분노 사이를 헤맨다.
같은 사진들이 언론에 보도되었다. 헤매던 나의 마음이 분노에 고정되었다. “민노총 언덕 기어오르며 집회…그날 원주 확진자는 최다였다(2021.7.23. 중앙일보)”, “민노총 집회하겠다는 의지…기어서 산까지 넘었다(2021.7.23. JTBC)”, “강원도 몰려간 민노총, 대규모 집회 막히자 줄줄이 언덕 넘었다(2021.7.23. 아시아경제)”, 심지어 ‘좀비’에 비유한 기사도 있었다. 같은 사진을 이렇게 다르게 전달할 수도 있구나. ‘왜 이렇게까지 집회를 비난하는 거야!’라며 분개했다가도 ‘언제는 집회에 우호적이었나…’하며 씁쓸하게 가라앉았다. 집회의 권리는 기본권이라고 하지만 권력이 좋아할 리 없기에 공격받고 매도당하는 것은 숙명일지도 모르겠다. 권력에 저항할 권리를 국가에 요청하는 것이니 그 권리는 투쟁을 이미 품고 있는 것일 수밖에 없다. 현실에 ‘기본권’으로 실재하지 않던 그 권리는 코로나라는 위기가 닥쳐오자 쉽게 팽개쳐졌다.
“코로나도 못 말리는 ‘집회·시위 욕구’(2021.7.11. 매일경제)” 기사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코로나 상황에서 집회·시위는 더 증가했고 그만큼 소음 민원도 증가했다는, 사회적 맥락을 삭제하고 수치로만 보여주는 기사 내용에 절대 동의하지 않지만 ‘욕구’라는 단어에 생각이 머물렀다. 제목과 달리 기사에는 ‘욕구’에 대한 설명이 없다. 욕구는 그저 코로나 위기에도 집회를 하는 이기적인 행동을 표현하기 위해 동원됐을 뿐이다. 그러나 나에게 기사와는 다른, 집회에 대해 어떤 ‘욕구’가 있는 것 같다. 지금 집회를 꼭 해야 하는지, 온라인 행동 같은 비대면으로 하면 되지 않느냐라는 의견을 낼 때, 나는 ‘그래도 우리는 지금 만나서 집회를 해야 한다’는 나의 마음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었다. 집회를 하지 못하니 집회에 대한 생각이 더 깊어진다. 코로나 이후 계속 사람들에게 집회는 어떤 의미였는지 곰곰이 생각하며 집회의 기억, 집회의 감각을 떠올려보게 된다.
배제된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공간
일상과 일터에서, 사/공적으로 작용했던 권력의 폭력과 차별 행위, 혐오 또는 동정의 시선이 집회 장소에서도 똑같이 등장한다. 집회의 공간을 만들기 위해 싸우는 투쟁은 그들이 고발하려 한 권력에 대한 투쟁과 다름이 없다. 건강보험공단을 둘러싼 공간은 이제 그냥 거리이거나 공단 소유의 땅이라고 할 수 없다. 공공성을 최우선으로 하는 공공기관이라는 일터는 어때야 하는지 질문을 던지고, 차별과 착취의 노동을 증언하는 공간이 되었다. 비정규노동자를 바라보는 각자의 시선을 투영하는 곳이자 집회가 권리로 존재하지 못하는 현실을 드러내는 곳이다. 노동자들은 진입을 거부하고 목소리를 지우려는 공간에 균열을 내기 시작했다.
집회는 그렇게 공간을 바꾼다. 차가 다니던 도로에 퀴어한 사람들이 경쾌하게 행진하고, 관광객의 기념 촬영 장소에 촛불이 일렁이고, 전쟁기지에 평화의 기도가 이어진다. 장소는 입장할 수 없는 존재를 만들면서 장소 소유자의 힘을 보여준다. 그때 입장을 거부당한 자들이 집회를 통해 공간을 재구성하고 의미를 다시 부여한다. 그래서 집회의 공간이 사라진다는 것은 모두의 공간이 될 수 있는 공적 장소가 사라지고 소유/권력의 공간이 늘어난다는 의미다.
당신 덕분에 내가 걷는 길
3차 파업 34일 차, 이은영 수석지부장이 단식을 시작한 지 12일째 건강보험고객센터 노동자들은 행진을 시작했다. 할 수 있는 것이 없는데 할 수 없는 상황이 너무 답답해서, 억울해서 아무것도 안 할 수가 없었다. 부정의한 세상은 저절로 정의로운 세상이 되지 않는다. 집회가 금지된 거리두기 4단계에서 유일하게 가능한 행동은 1인시위뿐이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 청와대를 향해 걷기로 했다.
행진 첫날의 영상을 보았다. 행진이라 하면 많은 사람이 모여 구호도 외치고 음악도 틀고 시끌벅적한 기운과 함께 걸어가는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그런데 이 행진은 1인시위라는 이유로 경찰이 한 사람 한 사람 간격을 두고 걷게 한다. 구호도 방송차도 없다. 직접고용을 요구하는 문구가 적인 녹색 티셔츠를 입고 생수 한 통을 들고 걷는 것이 전부다. 홀로 걷는 그 길이 외로우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있었다면 미처 보지 못했을 모습이 눈이 들어왔다. 앞 사람이 먼저 발을 떼고 걷기 시작하면 그 뒤를 잇는 발걸음을 준비하는 사람의 얼굴/모습이었다. ‘너의 뒤를 이어 내가 간다, 우리는 그렇게 끊임없이 이어간다.’라고 말하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거리를 두고 걸어가는 모습이 마치 보이지 않는, 그러나 걷고 있는 사람들은 분명히 느낄 수 있는 하나의 줄로 연결된 것처럼 보였다.

집회가 금지되고 1인시위만 가능하기 때문에 1인시위 간격을 지키며 인도로 행진을 하는 건강보험고객센터 노동자들의 뒷모습. 사진: 신유아(문화연대 활동가)
행진 6일째 강남에서 여의도로 향하는 길에 나의 걸음도 보탰다. 출발지에서 걷기를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경찰은 해산방송을 한다. 경찰이 사람들 사이의 간격을 두고 출발하게 하고 앞 사람과의 거리가 줄어들면 곳곳에 배치된 경찰이 다시 간격을 벌린다. 1인시위는 70m를 유지해야 한단다. 횡단보도 신호에 걸리거나 하면 종종 간격은 100m가 넘게 벌어지는 것 같다. 나의 시선은 열심히 앞 사람을 좇는다. 동시에 뒤를 돌아보며 뒷사람이 나와 너무 멀리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을 한다. 함께 행진했던 활동가들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다고 한다. 무리를 지어 행진할 때는 전혀 느낄 수 없었던 이 마음이 아마 며칠 전 영상으로 보았던 사람들의 마음과 같은 것이리라. 앞선 이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가 걷는 길을 놓치지 않으려는 마음과 뒤따르는 이를 살피는 마음으로 서로를 잇는다. 홀로 걷지만, 같이 걷는 행렬이 도시와 지역을 가로질러 청와대로 향한다.
걷고 있는데 리베카 솔닛의 [걷기의 인문학]이 떠올랐다. 집에 돌아와 책을 펼치니 오늘의 행진을 말해주는 문구가 보였다. “걸어가는 사람이 바늘이고 걸어가는 길이 실이라면, 걷는 일은 찢어진 곳을 꿰매는 바느질입니다. 보행은 찢어짐에 맞서는 저항입니다.”
집회를 왜 하는지 묻는다면
원주에서 문화제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동료 활동가가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에 팔뚝질과 민중가요를 불렀네.” 미안함과 힘을 보태야겠다는 마음으로 찾아간 공간에서 우리가 무언가를 얻었는데 그걸 정확히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저 기분 좋은 에너지라고밖에.
언제나 집회가 힘차고 감동적이진 않다. 늘 승리의 결과를 만들지도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자주 실패하고 지지부진하며 지루하기도 하다. 집회 내내 누군가와 스몰토크로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그럼에도 계속 집회를 열고 찾아가고 다른 이들의 목소리에 내 목소리를 포갠다. 때론 누군가의 연설 한마디가, 어떤 이와의 만남이 큰 의미가 되는 순간이 있기도 하다. 나는 왜 이곳에 있는지, 누구와 함께 우리가 되는지, 현재로부터 미래의 시공간을 어떻게 바꾸려고 하는지 그 공간에 있는 사람들과 끊임없이 주고받는다.
나의 욕구는 마주침에 대한 갈망이었나보다. 온라인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집회라는 공간에서 마주치는 구체적인 삶과 사람. 집회의 공간에 현존하는 육체가 담고 있는 삶과 노동의 증언들이 만들어내는 에너지가 다시 나를 집회를 이끌고 누군가의 곁에 서고 싶은 마음을 만들었나 보다. 코로나 시기에도 집회를 해야 하냐고 묻는다면 여전히 잘 설명할 자신이 없다. 그러니 집회를 해보자고 할 수밖에. 집회를 하면 내가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언가를 당신도 알 수 있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