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우(서늘해), 북토크 참가자

 

 

우연히 『병역거부의 질문들』과 『남성성의 각본들』 북토크를 한다고 듣고 홀린듯 신청했다. 세미나에서 『남성성의 각본들』을 읽고 있어서 반가웠다. 책을 다 읽지 못해서 이야기를 따라가지 못할까 봐 걱정하면서도 저자의 이야기를 직접 듣고 싶다는 마음이 강했다.

북토크의 구성과 조합이 흥미로웠다. 다른 책 두 권을 다루는 북토크는 처음이었다. ‘남자답지 않은 남자들’이라는 주제로 연구자와 활동가가 만났다. 책 제목도 ‘각본들’과 ‘질문들’이었다. 연구자와 활동가가 각자의 위치에서 생길 수밖에 없는 차이를 드러내는 대담이 아니라, 시간성을 가진 구성이었다. 허윤 선생님이 문학을 연구하며 이론적으로 구성한 ‘남성성의 각본들’은 이용석 선생님이 이야기하는 ‘지금 여기’의 평화운동가들에게서 드러난다. 국가와 군사주의가 삭제해온 ‘각본들’은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지배적 남성성에 대한 질문으로 계속 실천되고 있는 것이다. 연구자의 관찰과 활동가의 실천이 만나는 순간이었다.

이용석님과 허윤님, 그리고 사회자 오혜진 선생님이 주고받는 대화에는 여러 문제의식과 고민들, 질문들이 듬뿍 담겨 있었고 나는 메모하느라 손이 바빴다. 그만큼 생각이 풍부해지는 자리였다.

 

나는 올해 육군 복무를 마치고 전역했다. 살면서 한 번은 군인이 되어야 한다는 건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군대에서 그럭저럭 적응했지만 그런다고 내가 ‘남성’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남성적 실천을 할 수 있지만 남성성을 체화하고 싶진 않았다. 군대에 적응했지만, 적응한 나에게는 적응하기 어려웠다. 이도 저도 아닌 상태에서 나는 군필자가 되었다. 정말 이상한 일인데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갑자기 군대에 들어가 총을 쥐고, 쏘고, 명령과 계율에 복종하고, 서로 우열을 확인했다. 때때로 강하고 힘센 것보다 ‘군인답지 않은’ 섬세함과 돌봄이 필요한 순간들도 있었다. 명령을 위반하고 규율에 저항하려는 움직임들도 분명 있었다. 군대는, 병역은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가 되어 있었다. 이상함만 남았다. 왜 살면서 한 번은 군인이 되는 걸까?

한국에서 남성성과 병역은 한 몸이다. 허윤님은 한국전쟁기에 전사자, 그 다음으로 상이군인이 제1국민으로 호명되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제1국민’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매우 홀대 받았다. 가장 남자답지만 가장 훼손되었기 때문이다. ‘진정한 남성’은 알맹이가 없는 허상이었다. 달성하려고 해도 달성할 수 없는 허구였다. 허윤님은 이것을 ‘지배적 허구’라고 불렀다. 지배하고 있지만 허구이기 때문에 여러 교란 행위들, ‘각본들’이 생겼다. 이 교란들은 병역법과 갈등했다. 주민등록제도가 구축되지 않았던 때에 불심검문의 수단은 병역증이었다. 군사주의적인 통치는 어떤 각본은 삭제하고 어떤 것은 삭제하지 않는 식으로 남성성을 독점하고 제도화했다. 허윤님은 과거를 되돌아보며, 권력에 의해 삭제된 복수의 남성성과 다양한 젠더 실천들을 소환한다. ‘남성다움’은 처음부터 불안정했던 것이다. 지금 군대에서 마주하는 되는 남성성, 만들어지고 있는 남성성도 계속 변화하고 있다. 북토크에서도 변화하는 남성성을 포착하기 위한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다는 말이 나왔다.

 

왼쪽부터 차례로 이용석, 오혜진, 허윤

왼쪽부터 차례로 이용석(<병역거부의 질문들> 저자), 북토크 사회자 오혜진(<지극히 문학적인 취향> 저자), 허윤(<남성성의 각본들> 저자) 사진제공: 오월의봄 출판사

 

하지만 그럼에도 군인이 된다는 것, 총을 든다는 것은 의심을 받지 않는다.

훈련소를 마치고 자대에 배치된 지 얼마 안되었을 때의 일이다. 여느 때처럼, 쉽지 않다고 한숨을 푹푹 내쉬기를 반복하다가 화장실 거울에 붙은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지나쳐왔던 문장을 발견했을 때 내 주변의 시간이 멈추면서 무언가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에 휩싸였다. 문장은 말풍선처럼 거울에 비친 내 모습 위에 박혀 있었다. 나는 가만히 거울만 봤다.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

수많은 남성과 군인들에게 금과옥조 같은 말이었다. 가장 단순하고 가장 강력했다. 전쟁을 준비해야 하는 평화는 어떤 모습일까? 이용석님은 병역거부 운동이 만든 질문들에 대해 말했다. 병역거부 운동에는 어떤 한계들이 있었을까? 대체복무제가 생긴 이후 병역거부는 무엇인가? 대체복무제는 실제로 전쟁을 막을 수 있을까? 병역거부 운동의 관점에서 여성과 성소수자의 군인 되기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병역거부는 비장애인 남성(군대에 갈 수 있는 남성)만이 할 수 있는 걸까? 이 질문들은 미래로 향하고 있었다. 국가와 군사주의가 남성성/들을 삭제해왔다면, 병역거부를 통한 평화운동은 남성뿐만 아니라 ‘퀴어한 존재’들도 운동의 주체로 나설 수 있는 가능성들을 모색한다. 병역거부가 던지는 질문은 곧 우리에게 다가올 평화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나는 이용석님이 청주법원 병역거부 재판을 언급한 부분이 가장 인상깊었다. 남성만 군대를 가는데 여성에게는 국방의 의무가 없는 것인가. 당시 판사는 판결문의 각주에 이렇게 부연했다고 한다. ‘국방의 의무는 훨씬 더 큰 개념이다. 우리가 사회에서 각자의 역할을 하는 것만으로도 국방에 어느 정도 기여를 하는 것이다. 국방이 평화를 지키는 일이라면, 평화 운동도 국방의 의무를 다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나는 지금까지 국방의 의무는 곧 군대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등식에선 남자만 군대를 가는 것의 억울함, ‘여자도 군대 가라는 말’만 부각된다. 그런데 군대에 가야만, 총을 들어야만, 군인이 되어야만 국방의 의무를 다하는 것인가? 나라를 지키는 것은 적에게 총을 겨누는 일뿐인가? ‘국방의 의무’가 무엇인지 질문해야 하는 게 아닐까?

이것에 대한 답변은 북토크 마지막에 저자, 사회자, 편집자가 각 저서에서 가장 인상 깊은 구절을 고르는 부분에서 암시된 것 같다. 편집자는 『병역거부의 질문들』에서 이런 구절을 골랐다. “정상성 이데올로기는 군사주의가 작동하는 방식과도 닮아 있다. 군사주의는 세상을 둘로 나누는 데 익숙하다. 적군 아니면 아군, 전쟁 아니면 평화, 승리 아니면 패배가 군사주의의 세계다. 이는 정상성 이데올로기가 세계를 정상과 비정상으로 나누어 인식하게 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pp.168-169) 이분법의 세계에선 전쟁과 병역은 오직 남성의 일이고 여성은 보호받기만 하는 존재가 된다. 하지만 전쟁은 모두의 일이고 병역 부담은 남성만 지는 것이 아니다. 이용석님은 ‘여성의 병역거부’를 말했다. 군대 가는 남성과 그들의 연인, 가족, 친구로만 호명되던 여성이 평화운동 주체로서 병역거부를 선언한 것이다. 어떻게 전쟁과 평화의 당사자로서 다른 주체들과 함께 하는 운동을 만들 것인가하는 질문이기도 했다.

 

여전히 많은 질문들이 남아 있다. 허윤님은 미디어를 통해 군인의 믿음직스러운 모습을 생산하여 보급하는 ‘국방 엔터테인먼트’를 언급했다. 총력전의 시대가 지나가고 이제는 잘 훈련된 멋있는 군인들이 국지적으로 전투를 벌인다. 그들의 전투력을 과시하고 경쟁하는 서바이벌 프로그램도 나왔다. 지금의 병역제도 논의는 모병제를 ‘좋은’ 대안으로 여긴다. 징병하지 않는 것이 곧 평화이며, 국방은 입대를 원하는 소수의 전문가들에게 맡기는 것으로 충분한 것처럼 보인다. 형식적으로 군대가 없는 일본에서는 왜 군대가 필요한지, 군대가 있으면 무엇이 좋은지를 선전한다. 군대의 엄숙함과 어울리지 않는 캐릭터도 내세운다. 한국도 다르지 않다. 군사주의는, 아주 느리지만, 더 부드러워지고 더 자연스러워지고 있다. 더 강한 군사력만이 우리의 평화를 보장해줄 수 있다고 다양한 방식으로 말을 건다. 지금 남성성의 각본들은 어떻게 변화하고 있을까? 세련된 군사주의에 맞서 평화운동은 어떤 실천들을 해나갈 수 있을까? 어떤 언어로 군대와 군사주의, 병역과 남성성을 사유해야 할까? 나는 내가 군대에서 보았던 것들, 경험했던 것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말해야 할까? 답이 없지만 평화에게 계속 질문한다. 너는 어떤 모습이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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