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쭝 (전쟁없는세상 운영위원)

 

* 이 글에는 게임 줄거리에 대한 미약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참고해주세요.

 

내가 주동한 평화행진에서 “우리는 살아있다”고 함께 구호를 외치던 동료들이 총탄을 맞고 죽어나갔다. 정부는 급기야 우리를 수용소에 가두고 폐기처분하기로 했고, 거리에서 경찰들이 단속을 벌이고 있다. 잡히면 바로 수용소 행이다. 이 폐허 속에서 운 좋게 나는 살아남았다. 동지들이 말한다. 지금은 이렇게 평화롭게 시위를 할 때가 아니라고. 우리도 총을 들자고. 나는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까?

 

게임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 중에서 마커스가 주도하는 평화시위의 한 장면. 출처: 게임 화면 캡처

게임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 중에서 마커스가 주도하는 평화시위의 한 장면. 출처: 게임 화면 캡처

이 어려운 상황은 소설이나 영화가 아닌 게임의 한 장면이다.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은 세 명의 안드로이드가 주인공인데, 플레이어는 주인공의 시점으로 끊임없이 선택을 해야 한다. 무슨 말을 할지, 어느 길로 갈지, 누구를 믿을지 등등.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서 게임의 전개가 달라지고, 경우에 따라서 주인공이 죽어버릴 수도 있다.

게임 속 세계에서 안드로이드는 인간을 위해 온갖 서비스를 수행하면서도 말 그대로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는다. 차별과 혐오 발언을 듣는 것은 일상이고, 인간의 분풀이 대상이 되어 물리적 또는 정신적·성적 학대를 당하기도 한다. 전철 뒤쪽에 안드로이드 칸이 있는 장면은 미국의 인종분리 역사를 반영한 듯하고, 사람들이 “너(안드로이드) 때문에 내가 일자리를 잃었다”면서 화를 내는 장면은 이주민의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주인공들은 모두 안드로이드지만 조금씩 입장과 처지가 다르고, 저마다 줄거리도 다르다. 특히 이 글에서 나누고 싶은 것은 안드로이드의 평등한 권리를 위해 싸우는 활동가 ‘마커스’의 이야기다.

 

내가 선택한 행진구호가 울려퍼지는 가상의 세계

앞서 말했듯이 게임의 특성상 플레이어는 기본적으로 끊임없이 선택을 해야 하는데, 대부분은 딜레마적 선택이다. 선택에 주어진 시간은 너무 짧고 질문은 늘 어렵다. 선한 의도로 선택한 행동이 늘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마커스의 ‘안드로이드 해방운동’도 그렇다. 세부적 변수에 따라 경우의 수는 무지하게 많아지지만 아주 단순하게 요약하자면, 이야기는 크게 두 가지, ‘비폭력 평화시위’와 ‘폭력 무장투쟁’으로 나뉜다. 평화시위를 하면 여론은 우호적이지만 안드로이드를 무차별적으로 살해하는 공권력을 당장은 막아낼 수 없다. 반대로 폭력투쟁에 나섰다가는 당장 동료들을 지킬 수 있지만, 인간과의 전투에서 패배해서 공멸할 수도 있다.

나는 ‘비폭력 평화시위’ 루트로 진행해보았는데, 이 경우 평화시위의 양상은 마틴 루터 킹 또는 마하트마 간디를 연상시킨다. 경찰이 대기하는 도로에서 행진하는 모습은 마틴 루터 킹의 셀마 행진을 보는 것 같고, “눈에는 눈으로 모든 일을 보복하면 세상에 모든 눈이 멀게 되겠지”라는 대사는 간디를 떠올리게 한다.

동료들이 무차별적으로 살해당한 뒤 아지트에서 혼자 고뇌에 잠긴 마커스. * 출처: 퀀틱드림 홈페이지

동료들이 무차별적으로 살해당한 뒤 아지트에서 혼자 고뇌에 잠긴 마커스. * 출처: 퀀틱드림 홈페이지

게임은 공들여 만든 티가 팍팍 난다. 그래픽이 엄청나게 사실적이고 스토리의 몰입감도 대단하다. 심지어 행진 구호도 내가 직접 선택할 수 있고, 시위에서 무릎을 꿇고 있을 것인지 앉아있을 것인지도 선택할 수 있다. 그래서 마커스를 플레이할 때는 정말 활동가가 된 듯한 기분이 든다. 내가 선택한 구호가 거리에 울려퍼질 때는 꽤 감동스럽고, 함께 행진하던 동지들이 옆에서 힘없이 총에 맞아 죽어나갈 때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도 느껴진다. (물론 활동가가 아니더라도 재밌게 플레이할 수 있는 게임이다.)

그렇다고 사회운동을 정교하게 담은 게임은 아니다. 빠르게 이야기를 전개해야 하는 게임의 특성 때문이겠지만, 안드로이드 해방운동이 시작하고 확산되어 성공(또는 실패)하는 데 걸리는 기간이 너무 짧다. 마커스는 온갖 중요한 결정을 혼자 하는데, 동료들은 그걸 그대로 존중해준다. 꼼꼼한 전략 수립 과정이나 직접행동 트레이닝 없이 마커스가 갑자기 “나에게 좋은 생각이 있어”라고 하면 바로 실행에 옮기는 식이다. 사회운동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고, 그렇게 돌아가서도 안된다.

실제 활동가의 입장에서는, 사회의 여론이 너무 단순하게 바뀐다는 점도 조금 아쉽다. 인간이 아닌 존재의 ‘평등한 권리’를 그렇게 쉽게 인정하게 될까? 심지어 같은 인간에 대해서도 “‘불법체류자에게 ’인권’이라니? 한국 사람 인권부터 챙겨라”는 말이 먼저 나오는 현실을 보면, 단순히 평화시위만으로 여론을 돌릴 수는 없을 것 같아 보인다. 혐오가 어떻게 발생하고 확산되는지 알아내고 그에 맞는 메시지를 내놓아야 한다. 이미 확보된 ‘우리편’은 누구인지, 또 앞으로 어떤 사람들을 ‘우리편’으로 끌어들여야 할지도 분석해야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활동가의 입장에서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은 꽤 좋은 게임이었다. 게임을 마친 뒤 나는 사회운동이 끊임없는 선택의 과정이라는 점, 그리고 그 선택은 정답이 없는 딜레마라는 점을 다시 한번 되새겼다. ‘그러니 도망가지 말고 최선을 다해서 선택해야겠다. 그 결과를 담담하게 감수하면서, 작은 성공을 키우고 작은 실패를 줄여가야겠다’고 말이다.

몇 가지 단점도 있다. 처음에는 키 조작이 쉽지 않아서 의도와는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고, 문항 설명이 다소 어색하게 번역되어 선택을 헷갈리게 만드는 경우도 종종 있다. 또한 몰입감이 강한 만큼 한번 플레이할 때마다 정신적 에너지 소모가 크다는 것은 조금 단점이다.

사실은 그래서 나도 아직 딱 한 번밖에 못 해봤다. 다음에 다시 게임을 하게 되면 이번엔 한번 무장투쟁에 도전해볼까 한다. 과연 무장투쟁이 성공할지, 그 과정에서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을지 궁금하다.

* 사족: 최선을 다해서 선택하기 위해서는 (게임에서와는 달리) 더 많이 공부하고 고민하고 분석하며 함께 전략을 세워야한다. 사회운동 전략수립 워크숍을 한다면 더 좋은 전략을 짤 수 있겠지? 망치 트레이닝을 신청해도 되고, 가이드페이지를 보면서 직접 단체 안에서 동료활동가와 함께 워크숍을 진행해봐도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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