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재욱(열린군대를위한시민연대 활동가)
전쟁없는세상 주:
전쟁없는세상은 지난 3월 30일 제 3회 ‘활동가들의 방구석1열’에서 영화 〈호스트 네이션〉을 함께 봤습니다. 이 행사에 참여해 영화를 본 신재욱님께서 영화 리뷰를 작성해주셨습니다. 이 글은 열린군대를위한시민연대 뉴스레터에도 실렸습니다.
혼란하다. 혼란해……. 〈호스트 네이션〉을 보고 처음 든 생각이다. 영화는 관람자를 위해 기지촌 성산업 문제에 대해 명확한 답을 내리지 않는다. 감독과의 대화에서 이고운 감독 이 문제를 두고 ‘복마전(伏魔殿)’이라고 표현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실제로 영화에서 대놓고 ‘악마(惡魔)’ 같은 사람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영화 내내 악행의 바퀴는 부지런히 굴러간다. 그 바퀴는 군대와 성착취, 냉전과 군사기지, 식민주의 남성성, 성산업과 인신매매, 저개발국과 빈곤 같은 주제들을 가로지른다. 바퀴를 굴리는 사람과 바퀴 위에 탄 사람과 바퀴를 멈추려는 사람과 바퀴란 건 없다고 말하는 사람과 바퀴에 깔린 사람과 바퀴를 구경하는 사람은 모두 뒤얽혀 있다.
감독이 직접 기지촌 성산업의 구조에 뛰어들어 여러 당사자들을 만나면서 길어올린 이야기는 결코 명확한 구도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될 수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영화 속에서 드러나는 신자유주의하 국제화된 기지촌 성산업의 구조, 그 속에서 움직이는 다양한 행위자들과 그들의 이해관계, 촘촘하게 얽힌 피해와 가해의 구도는 복잡하다. 이는 관람자들을 혼란에 빠트리겠지만, 동시에 그 혼란에 대한 깔끔한 정리야말로 문제를 축소시킬 수 있다는 사실 역시 깨닫게 만든다.
이 글에선 영화를 관람하면서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몇몇 장면들에서 이어나간 생각을 정리해보려 한다.
(언급할 장면의 순서는 영화에서 나오는 장면의 순서와 일치하지 않는다. 또한 영화에서 인용한 인물의 말, 문장 역시 영화 속 문장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장면 1 양쪽으로 선 높은 기둥 위에 걸린 아치형 간판 아래로 미군 클럽 업주 파파 정이 탄 차가 들어간다. 간판에는 ‘International Culture Ville'(국제문화마을)이라고 쓰여 있다. 파파 정의 인터뷰 장면이 이어진 후 등장한 마을 풍경 안에는 온통 미군 출입 클럽뿐이다.
원래 국제문화마을의 이름은 아메리카 타운으로, 군산 주둔 미군의 ‘유흥’을 위해 조성된 곳이다. 지금은 ‘아메리카’를 대신해 ‘국제 문화’라는 단어가 붙었다. 영화에 주요하게 등장하는 국가는 필리핀과 한국, 미국이다. 미군 클럽은 이 3국을 이어주는 장소다. 미군 클럽이 ‘유흥주점’임을 고려한다면 이 마을이 표방하는 ‘국제문화’란 필리핀-한국-미국이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는 가부장적인 성 ‘문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 필리핀을 포함해 동남아 여러 국가의 성산업 고객 중 다수가 한국 남성임을 생각하면 위와 같이 ‘국제문화’를 정의하는 것이 별로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는다.
공교롭게도 세 국가는 역사적으로도 성착취와 관련해 유사한 경험을 갖고 있다. 한국과 필리핀에는 일본군 ‘위안부’가 있었고,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 ‘위안부’와 유엔군(미군) ‘위안부’가 있었다는 사실도 이제는 많이 알려져 있다. 한국전쟁 ‘위안부’는 이후 기지촌 ‘위안부’로 이어졌다.
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남성 군인을 ‘위안’하는 여성’이라는 성착취 구조의 시초라 할 수 있다. ‘위안부’ 부정론자들이 주로 ‘위안부’를 부정하기 위해 물고 늘어지는 부분은 군이 직접 ‘위안부’ 제도 운영 전반을 관장했는지(제도적 관리)와 ‘위안부’ 여성들이 강제로 끌려갔는지(인신매매)다. 내 역량으로는 이 지면에서 군이 책임 소재를 은폐하기 위해 사용한 자세한 방법들을 자세히 논하기는 어렵다. 다만 일본군은 겉으로는 민간 업자(포주)들을 내세워 ‘위안부’를 모집했고 계약서를 작성했다. 이는 여성들이 자유의사로 ‘위안부’ 되기를 선택했다는 근거로 사용되었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바로 군의 의지가 없었다면 ‘위안부’ 제도는 시작되지 않았으며, 지속적으로 확장되지도 않았을 거라는 사실이다.
누군가 여성을 모집해 성산업의 내부로 끌어들이는 성착취의 구조는 지금도 여전히 동일하다. 그렇다면 내지(일본)와 식민지(조선, 대만 등)의 여성이 ‘위안부’가 되었던 경로와 현재 전국 각지의 ‘국제문화마을’로 해외 여성들이 유입되는 경로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장면 2 나비가 날아다니는 평화로운 숲속. 한국 이주 연예인 지원자인 필리핀 여성 마리아의 인터뷰. 쇼핑몰 판매원이었던 마리아는 한국 취업 제안에 “이런 탈출을 늘 바라고 있었어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주 연예인 기획사를 운영하는 매니저 욜리가 이주 연예인 지원자들과 대화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대화 속에서 많은 필리핀 여성들이 빈곤한 상태에 처해 있다는 현실이 나온다.
장면 3 클럽 업주인 파파 정은 과거처럼 성매매를 강요하지 않아 여성들의 처우가 예전보다 훨씬 나아졌다고 말한다. 이어지는 이주 연예인 지원자 조이의 나레이션에서 클럽에서 일하는 필리핀 여성들은 질 낮은 여성이라는 뜻인 ‘주시걸(Juciy Girl)이라고 불리며 힘든 일을 감내하고 있으며, 이런 직업은 아무도 존중해주지 않고 스스로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고 나온다.
*여기서 먼저 필리핀 여성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한국으로 이주하게 되는지를 간략하게나마 설명해야 할 것 같다. 먼저 이주 연예인 기획사의 스카우터(영화에서는 이들 역시 이주 연예인으로 한국에 다녀온 여성들이다)가 필리핀 여성을 모집한다. 기획사의 매니저는 모집된 여성의 숙식을 제공하며, 이주 연예인이 될 수 있도록 준비시킨다. 브로커는 이주 연예인 지원자들이 한국 정부에서 발급하는 E-6 비자를 받을 수 있도록 돕고, 각종 교통편을 이용해 여성들을 한국의 클럽으로 여성들을 역할을 담당한다. 클럽 업주는 그렇게 모집된 여성들을 고용해 클럽 운영을 해나간다. 필리핀 여성들은 주로 손님과 함께 술을 마시는 접대 업무를 담당하고, 클럽마다 다르지만 업주에 의해 성매매를 강요당하기도 한다.
필리핀 여성들은 대학을 나와도 콜센터, 나이트클럽, 가정부, 캐셔 등 저임금 노동 이외에는 별다른 직업을 얻지 못한다. 또한 그 여성들 뒤에는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다. 마리아의 경우 딸과 연로한 부모가 있지만, 남편은 아예 등장하지도 않는다. 조이 역시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필리핀의 연예인 기획사(사실상 클럽의 여성 ‘공급’책인) 매니저 욜리가 던지는 ‘한국은 빈곤한 여성이 새출발하기 좋은 곳이다’, ‘기회가 있을 때 기회를 잡는 것이 낫다’, ‘부자가 되려면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같은 말들은 필리핀 여성들에게 소위 ‘먹히는’ 말로 다가왔을 것이다.
한국인 남성 브로커 정, 연예 기획사 매니저인 필리핀 여성 욜리, 한국의 클럽 업주인 파파 정이 함께한 네트워크는 바로 그 “탈출을 바라는” 필리핀 여성의 마음을 이용해 마치 강제성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인신매매’의 구조를 완성한다. 인신매매라는 명명이 의아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보통 인신매매라고 하면 창문이 모조리 썬팅되어 있는 승합차가 갑자기 행인을 차에 태워 끌고 가는 식의 장면이 떠오른다. 하지만 이는 인신매매의 매우 협소한 부분에 불과하다. 필리핀 여성들은 스카우터의 제안을 받고 ‘자발적으로’ 기획사에 들어가 기획사에서 제공하는 여러 서비스를 이용해 한국으로 떠난다. 물론 계약서 역시 작성한다.
그러나 여성들에게는 사전에 한국에 어떤 경로를 거쳐 가는지, 누가 고용주가 되는지 등의 정보가 제대로 주어지지 않는다. 계약서 상 노동조건이나 업무의 내용 역시 제대로 고지받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또한 기획사에서의 준비 과정과 한국행 항공편 등을 포함한 모든 서비스는 그대로 빚이 된다. 빚을 떠안고 만리타향에 홀로 도착한 여성들은 결국 의탁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클럽 업주에게 종속될 수밖에 없다.
UN 인신매매방지의정서1)는 이와 같은 모집 방식을 인신매매로 규정한다. 의정서에 따르면 “노동력, 성 등의 착취를 목적으로 상대방을 기망(속임)하거나, 상대방의 취약한 지위를 이용해 사람을 모집하고, 인수하는 것”2)은 인신매매에 해당된다. 인신매매 당사자가 모집에 응했어도 노동 조건을 제대로 고지받지 않았다면 역시 인신매매다. 한국 정부는 2015년에 UN인신매매방지의정서를 비준했지만, 여전히 클럽에서 일하는 여성들은 인신매매 피해자로 대우받지 않는다. 클럽 업주도, 한국 정부도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이 일을 선택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클럽 업주인 파파 정은 한국 정부에서 합법적으로 허가한 비자를 통해 여성들이 들어왔고, 여성들과 계약한 월급을 주는데 이게 어떻게 인신매매냐고 반문한다.
그렇기에 성매매 강요나 과도한 감시와 통제 등 클럽에서의 피해를 공론화한 여성에게는 ‘왜 적극적으로 거부하지 않았나’, ‘다 알고 한 것 아니냐’, ‘순수한 피해자가 아니다’ 따위의 말이 쏟아진다. 한국 사회에서 성폭력 피해를 공론화한 수많은 여성들이 들었던 것처럼 말이다. 결국 이중 삼중의 종속과 그로 인한 피해의 책임은 모두 그곳에 ‘제 발로’ 걸어들어간 여성 개개인에게 귀속된다. 소위 ‘자발과 강제’의 구도에서 100% 강제가 아닌 모든 선택은 조금이라도 ‘자발적’인 측면이 있는 것으로 간주돼버리는 것이다(그렇기에 자발과 강제의 구도는 언제나 가해자의 구도다).
일본군 ‘위안부’ 연구회 회장을 맡기도 했던 법학자 양현아는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다루는 글에서 협의의 강제성과 광의의 강제성을 구분한다. 꼭 직접적 폭력(협의의 강제성)이 사용되지 않았더라도 어떤 행위를 따르거나 견딜 것을 강요하는 법적·사회적 제재의 존재(광의의 강제성) 역시 강제라는 것이다. 일본군 ‘위안부’ 부정론자들은 계약서의 존재를 근거로 여성들이 ‘자유의사’에 따라 계약을 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위안부’로 끌려간 여성들이 처한 여러 사회적인 상황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 심지어 ‘위안부’ 여성들이 작성했다고 하는 그 계약서에는 계약 당사자인 여성이 아닌 호주(戶主)가 서명하도록 되어 있었다.
성산업에 종사하는 여성에 대한 차별적 인식과 업주와의 종속적 계약관계, 그리고 피해를 구제받을 제대로 된 제도적 절차가 마련되어 있지 않은 상황 속에서 한국에 도착한 여성들은 말 그대로 “스스로 자신을 보호”해야만 하는 처지에 놓인다.
장면 4 “엄격한 허가제였던 예술 흥행 비자(E6 비자)가 1999년부터 한국 영상물등급위원회의 추천제로 발급요건이 완화되었다. 이후, 2001년 최대 8천여 명이 이 비자로 한국에 입국하였으며, 현재까지 한 해 평균 3천 명 이상이 E6 비자로 국내에 들어왔다.”
장면 5 오산 미 공군기지에 주둔하고 있는 미7공군 사령관이 클럽 업주들에게 보내는 서한이 나온다. 서한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들이 적혀 있다. “근로자를 접대 목적으로 고용 시 미군 병사들 업소 출입을 금지시킬 것이다.”, “고용인의 접대에 대한 지불은 여성에 대한 처신과 성차별하는 태도를 장려하는 것이다”, “우리의 협력 관계는 지금까지 특별했다.”, “장병들의 건강과 안전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는 특정 조건 제거에 협력을 부탁한다.” 이후 파파 정의 인터뷰가 이어지는 가운데 화면에는 미군과 한국 경찰의 업소 합동 점검 장면이 나온다.
영화 내용의 대부분은 필리핀 여성 마리아와 조이, 그리고 브로커 정과 기획사 매니저 욜리, 클럽 업주 파파 정의 서사로 채워져 있다. 기지촌 성산업 문제 해결의 책임 주체라고 볼 수 있는 한국 정부나 역사 속에서 실질적인 성산업의 구매자였던 주한미군은 영화 내내 뒷배경에만 머문다. 처음에는 여기에 의구심이 들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마치 관조하는 것처럼 뒤로 물러나 이 문제를 대하고 있는 한국정부와 미군의 태도를 영화 속에서도 구현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짐작했다.
기지촌 성산업의 역사에서 한국 정부는 사실상 ‘포주 국가’로 부르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 한국 정부는 기지촌 성산업을 기획하고 운영하고 관리하는 주체였다. 주한미군이 대거 철수한 이후 기지촌이 쇠락하고 성산업 종사 여성들에 대한 미군의 범죄가 드러나면서 한국 여성은 기지촌에서 빠져나갔다.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해 업주들의 모임인 한국특수관광협회는 한국 정부에 해외 여성이 쉽게 비자를 받을 수 있도록 요구했다. 이를 위해 한국 정부가 만든 것이 바로 E-6 비자였고, 영상등급물심의위원회의 추천제로 비자 발급 기준을 완화한 것 역시 한국 정부였다. 한국 여성에 대한 성착취가 더 가난한 나라의 여성들로 대물림된 것이다. 사실상 판을 다 깔아준 것이나 다름 없는 한국 정부는 클럽에서 성매매 강요나 폭력 등의 피해를 입은 외국인 여성을 오히려 성매매 혐의로 가해자 취급하기 일쑤였다.3) 문제가 발생할 때만 땜질하는 식으로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에 대해서는 방관해온 것이다.
주한미군 역시 방관자의 입장을 취해왔다. 앞서 말했듯 영화에서 미군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미군기지 전경이나 국제문화마을에 방문한 미군 병사를 찍은 몇몇 짧은 장면들이 있고, 주요하게는 미군 클럽과 관련한 주한미군과 주한미대사관의 조치를 담은 서신이 등장한다. 먼저 주한미군은 ‘E-6 비자를 가진 여성들을 접대 목적으로 고용한 클럽에 대해 병사들의 출입을 금지한다는 조치를 취한다’는 내용의 서신을 클럽 업주들에게, 주한미대사관 참모관실은 ‘클럽에서 일하는 여성들이 인신매매 피해자라고 결론지었다며 인신매매 형태에 대한 능동적인 조치를 촉구한다’는 내용의 서신을 한국 정부에 보낸다. 표면상으로만 볼 때 이 서신은 마치 미국이 여성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겠다는 내용으로 읽힌다.
파파 정은 위와 같은 미국의 입장에 대해 만약 인신매매가 사실이라면, 클럽 업주뿐 아니라 성을 매수한 미군 역시 가해자이므로 모두 처벌의 대상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성을 매수한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매춘이 성립되냐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클럽 업주인 파파 정의 말은 기지촌 성산업의 최대 고객이자 가해자였던 미국이 어떻게 책임 주체에서 교묘하게 발을 뺐는지를 잘 보여준다. 위안부 문제를 연구해온 강성현은 일본군·유엔군·한국군 ‘위안부’를 다루는 글에서 미군이 “아시아·태평양전쟁, 일본, 오키나와와 한국 점령에 이어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위안부’ 제도의 관리 방식에 동화”되었다고 평가하면서 미군 역시 한국 정부와 마찬가지로 ‘포주’의 위치에 있지 않았는지를 되묻는다.4)
기지촌 성산업은 미군이 떠난 뒤에도 이어진다. 일본과 필리핀의 경우 미군기지 주변에 형성되었던 기지촌 성산업은 미군이 떠난 뒤에도 그대로 남아 유지되고 있으며, 한국 역시 미군의 출입금지 조치를 당한 클럽들은 한국인 전용 업소로 변환해 계속 운영을 이어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도 미군은 끝까지 방관자로 남는다.
장면 6 의정부 미군 출입 클럽에서 성매매 강요와 학대를 당한 필리핀 여성 조이는 시민단체의 지원과 경찰의 수사를 통해 가까스로 클럽에서 ‘탈출’했다. 이후 조이를 비롯해 함께 구조된 여성들은 업주를 고소한다. 조이는 검찰의 조사를 받으러 가면서 “우리는 정의를 원한다. 가해자들이 대가를 받기를 바라며,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들지 않고 다시는 이런 사업을 못하게 하고 싶다.”고 말한다.검찰은 증거불충분으로 업주를 불기소했다.
장면 7 영화의 마지막 부분. 마리아가 일상을 보내는 장면과 함께 마리아가 인터뷰한 내용이 겹쳐진다. 마리아는 “손님을 즐겁게 할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게 해달라고, 보너스 점수를 많이 받게 해달라고, 위험으로부터 보호해달라고 기도해”라고 말한다. 직후 감독이 한국에 온 것을 후회하냐고 하는 질문에 마리아는 “한 번도 후회한 적 없어”라고 답한다.
영화를 보면서 주된 당사자로 등장하는 필리핀 이주 여성 조이와 마리아가 얼핏 대비되는 것 같다고 느꼈다. 조이는 일하던 클럽에서 심각한 피해를 당하고 업주를 처벌하기 위한 재판에 참여하고 있으며, 마리아는 업주인 파파 정을 좋은 사람이라 말하고 자신에게는 행운이 따랐다면서 한국에 온 것을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 스스로가 어떤 피해의 전형을 단정짓고 피해의 정도를 비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되었다. 조이는 구조 이후 같은 피해를 입은 여성들과 이주여성 쉼터에서 지낸다. 조이는 한국정부에서 발급한 G-1 임시취업비자로 평택의 공장에서 일하며 이후의 삶에 대한 각오를 다진다. 마리아는 한국으로 이주하는 과정에서, 또 클럽에서 겪는 부당함을 인식하면서도 그 상황을 받아들이며 그래도 긍정적으로 삶을 꾸려나가려 한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마리아는 감독의 한국에 온 것을 후회하냐는 질문에 “한 번도 후회한 적 없다”라고 답한다. 이후 한국에 도착한 수많은 미군들이 비행기에서 내리는 장면과 국제문화마을의 낮 풍경, 마을 뒤편 과거에 기지촌 여성들이 거주했던 집들의 전경, 밤이 되어 클럽들이 불을 밝힌 국제문화마을 거리 위 한국인들이 걸어가는 풍경이 이어진다. 기지촌 성산업 문제를 다룬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당사자가 “후회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장면과 성 구매자인 미군, 성산업의 역사적 현장, 그리고 역시 성 구매자인 한국인 등 거대한 폭력의 동조자들이 나오는 장면은 과연 어떻게 조응하는 것일까. 얼마 전에 읽은 책에서 이런 문장을 읽었다. “우리는 ‘누가 가해자인가’보다는, ‘무엇이 폭력인가’를 질문했어야 했다.”5) 책에서 문장이 배치된 맥락과는 조금 다를 수 있지만, 그 장면들의 배치를 통해 감독이 ‘누가 피해자인가’ 혹은 ‘어떤 것이 피해인가’보다, ‘무엇이 폭력인가’를 질문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무엇이 폭력인가’를 질문하는 과정에서 따라나오는 것은 폭력을 가능하게 했던 구조다. 더욱이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폭력이라면 폭력의 구조 속에서 스스로가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그 폭력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대한 성찰이 꼭 필요하다. 이와 같은 성찰에서야말로 그저 폭력이 나와 상관이 없는 것이라며 방관하거나 거대한 폭력에 체념하는 것을 넘어 구조를 조금이라도 변화할 가능성이 생겨나는지도 모르겠다.
–
* 2022년 3월 23일, 「인신매매 · 착취방지와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하지만 이 법안에 처벌 규정은 없다. 여러 시민단체가 처벌 규정이 없는 법안은 반쪽짜리에 불과하다고 비판했고, 국가인권위원회 역시 법안이 인신매매 처벌에 대해 답을 주지 못한다는 내용의 검토의견서를 냈다. 법안에 관한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으면 아래 오마이뉴스 연속기고 링크를 참고하면 된다.
- 이수진 의원의 ‘인신매매특별법’, 실망스럽습니다
- 대통령까지 나섰던 ‘염전 노예사건’의 허무한 결말
- 욕설, 폭행, 착취에도… 그들은 배 안을 벗어날 수 없었다
- 인신매매에 감금까지 당했는데… 그녀는 피의자가 됐다
- 인신매매특별법, 기업도 자유롭지 않다
- 피해자를 가해자 품으로… ‘인신매매’에 연루된 정부 기관
각주
1 UN인신매매방지의정서, 전문은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s://www.law.go.kr/LSW/trtyMInfoP.do?trtySeq=11380
2 김민정 기자, “[기지촌의 사회학②] ‘기지촌 필리핀 여성’과 ‘인신매매’의 상관관계”, SBS, 2019.5.21.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5274482
3 “2013년부터 현재까지 성매매 인신매매로 처벌 확정된 사건은 겨우 2건에 불과하다. 인신매매는 대한민국에서 아주 제한적으로만 적용된다. ‘피해자가 계속된 협박이나 폭행의 위협 등으로 법질서에 보호를 호소하기를 단념할 정도의 상태’를 ‘엄격하게 입증’해야만 인신매매로 처벌할 수 있다.”
최정규, “[인-잇] 인신매매 처벌 없는 대한민국, 비상식 100년”, SBS, 2021.3.26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6255547&plink=COPYPASTE&cooper=SBSNEWSEND
4 강성현, “일본군 위안부 유엔군 위안부 한국군 위안부”, 한겨레21, 2019.3.27.
https://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6812.html
5 문단 내 성폭력 고발자에 연대해 온 〈참고문헌 없음〉 준비팀이 쓴 글에 있던 문장이었다. 〈참고문헌 없음〉은 문단 내 성폭력 피해자들을 지원하는 여성 문인들의 프로젝트였다. 위 문장은 출간 과정에서 출판을 담당한 출판사 구성원에 대한 데이트 폭력 폭로가 나오고 준비팀도 가해자로 지목되는 등 프로젝트가 무산될 위기에 처하는 등의 여러 어려운 과정 끝에 나온 문장이다.
〈참고문헌 없음〉 준비팀, 「문단 내 성폭력, 연대를 다시 생각한다」,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 도란스, 2018, 109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