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악희(전쟁없는세상 병역거부팀, 징병제폐지를위한시민연대)

 

 

클라우제비츠는 전쟁론에서 전쟁은 언제나 정치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줄곧 밝히고 있다. 20세기 정치적 격변의 중심에 있던 모택동 조차 전쟁은 유혈의 정치라고 이야기 했었다. 한국에서는 전쟁을 순국 선열의 희생이나 공산 도배의 침략이라는 논리에 의해 다소 낭만적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는데, 현실의 전쟁은 지독할 정도로 계산적인 정치적 행동이다(계산을 잘 하고 못하고는 또 다른 문제다). 

한국은 국내적으로는 상당히 정치가 안정화 되었다. 한국의 정치는 이제 생명을 잃거나 고문을 걱정 할 필요까지는 없고, 옳고 그름 없이 적이라는 이유로 상대방을 무조건 파멸 시킬 권리가 없지만, 전쟁은 이 모든 룰을 폭력적으로 뒤엎어버린다. 전쟁은 국제 정치의 가장 격렬한 현장이고, 상대방의 영역에 자신의 체제를 심기 위한 폭력이다. 전쟁은 모든 논의를 피아와 흑백으로 나눠 버린다.

 

반골 펑크로커 빌리 브랙이 키이우의 펑크밴드 곡을 소개하며 일어난 소동

최근 이를 잘 보여주는 작은 사건이 있었다. 사건의 발단은 키이우의 한 펑크밴드에서 시작된다. 키이우의 펑크 밴드인 베튼(Beton)은 지난달 “Kyiv Calling”이라는 곡을 발표했다.1)  이는 전설적인 펑크 밴드 클래쉬(The Clash)의 명곡 “London Calling”을 리메이크 한 것으로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국제 사회의 지원을 촉구하는 내용으로 개사되었다. 좌파 반골 펑크로커로 유명한 빌리 브랙(Billy Bragg)2) 이 소식을 SNS에 전하며, 우크라이나 지지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환기시켰다.

만약 여기서 이야기가 끝났다면 장르로 하나되는 뮤지션들의 국제 연대라는 아름다운 소식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한다. 빌리 브랙이 공유한 베튼의 사진에서 두 멤버는 라몬즈(Ramones)3)의 티셔츠를 패러디한 “반데라스”의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반데라스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밴드이며, 이 티셔츠는 우크라이나의 극우 독립운동가 스페판 반데라를 상징했다. 문제는, 스테판 반데라가 2차대전 당시 골수 민족주의자인 동시에 나치 홀로코스트 전쟁범죄자라는 것이다.

 

문제가 된 "반데라스" 티셔츠 사진

문제가 된 “반데라스” 티셔츠 사진

 

식민지 시기 한국의 정치 지형도가 생각보다 복잡했듯, 우크라이나도 2차대전 당시 복잡한 역사의 흐름 안에 있었다. 우크라이나는 소련이 탄생 할 시기 즈음부터 민족주의적 독립운동이 대두했던 곳이다. 독립 국가 탄생의 열망을 이루지 못한 우크라이나인 민족주의자들은 소련 치하에서 많은 차별과 기근에 고통받았다. 나치 독일이 우크라이나로 밀고 들어왔을 때, 이들은 나치를 해방군으로 생각했고 소련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반데라의 민족주의 세력은 1941년 한 해만 20만 명 이상의 유대인을 학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나치는 이들의 독립 요구를 무시하고 우크라이나 국가판무관부를 세웠다. 이 때 반데라도 위험인물로 낙인찍혀 부헨발트 수용소로 강제 수감된다. 반데라는 1944년 수용소에서 풀려났고, 곧 이어 반독일 유격전을 벌이며 반유대주의를 탈피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가 남긴 역사의 오점은 우크라이나에서 길이길이 논쟁 거리가 되고 있다. 

빌리 브랙의 SNS는 난리가 났다. 전 세계적으로 펑크 밴드들은 그 누구보다 나치즘/파시즘 논쟁에 민감하다. 왜냐하면 실제로 1980년대 초반 세계 각지의 펑크씬은 초기의 그 허무주의적 전통 때문에 네오 나치가 침투한 역사가 있으며, “인종주의에 반대하는 록(Rock Against Racism)”4)과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록(Rock Against Communism)”5)으로 나뉘어 오래 대립한 바 있다. 미국 일부 지역에서는 총격전 수준의 폭력 투쟁으로 번진 사례도 있었다.

 

Rock against Racism과 Rock Against Communism의 로고

Rock against Racism과 Rock Against Communism의 로고

 

순식간에 빌리 브랙은 세계적인 좌파 펑크록커에서 나치 지원자로 비난 받을 처지에 놓였다. 게다가 클래쉬의 원곡은 핵 전쟁을 반대하며 “난 걱정이 없어. 런던은 가라앉고 있고 나는 강 옆에 살고 있기 때문이지”라며 냉소적인 투로 핵전쟁의 위기를 이야기하는 곡이었기 때문에6), 일부 클래쉬의 팬들은 “총알과 무기를 달라며 개사한 가사가 원곡의 의도와 어울린다고 생각하느냐”며 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거의 꼬박 하루 동안 빌리 브랙은 팬들의 성화에 시달려야 했다. 

다행히도 문제가 불거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베튼의 멤버들은 SNS를 통해 공식 입장을 밝혔다. 그들은 “우크라이나인들과 달리 전 세계의 사람들의 반데라에 대한 인식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종과 종교에 관계 없이 그의 공과 과에 대한 공개적이고 민주적인 토론의 기회를 확보해야 한다”고 밝혔다. 아울러 그들은 모두가 피해자이자 가해자로서의 역사를 인정하고 수용할 수 있도록 보장 받아야 한다고 이야기 하면서 “이러한 역사에 대한 토론은 푸틴 하의 러시아에서는 불가능하다”고 덧붙였다.

빌리 브랙은 페이스북을 통해 베튼의 기타리스트 안드리 졸로브와 이러한 대화를 나누었다고 밝혔다. 동시에 안드리 졸로브는 키이우에서 난민을 치료하는 의사로 활동하고 있기도 하다며, 이들은 자신이 반파시스트임을 밝혔고, 해당 티셔츠에 대한 사과를 함으로서 논쟁은 어느 정도 일축되었다.  

 

전쟁이 지우는 것, 전쟁이 강조하는 것

이러한 이야기의 흐름은 전쟁이 무엇을 지우고 무엇을 강조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전쟁의 하드웨어는 전쟁 산업 자본이 제공하지만, 전쟁의 소프트웨어는 배타성과 폭력이라 할 수 있다. 충분히 공론장에서 시간을 두고 전개되어야 할 논의가 전쟁을 통하면 단번에 묵살된다.

먼 예를 들 필요도 없이, 한국 또한 한국전쟁이 많은 논의를 지워버렸다. 해방 전 까지 한국의 독립운동 세력들은 수많은 분파로 분열되어 있었으며, 저마다 이합집산을 거부하며 지난한 투쟁을 계속 해왔다. 한국에서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근현대사와는 달리, 생각보다 많은 민족주의 분파들이 있었고 동시기에 생각보다 많은 사회주의 분파들이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한반도를 남북으로 한번씩 훑고 지난 뒤, 한국 독립운동에는 단 두 개의 정파만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

한국 전쟁 이후, 남에서는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을 기리지 않고 북에서는 민족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을 기리지 않는다. 때로는 진영 논리로 인해 ‘우리 편’이라는 이유로 많은 문제점을 용인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자면 비록 독립운동가이지만 문제의 소지가 있는 인물도 있다. 철기 이범석 장군의 경우, 의심할 필요 없는 독립운동가이지만 나치즘에 영향을 받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7) 또한 제주 4.3 사건 당시 국방장관이자 국무총리로서 책임자이기도 하다. 

북한도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의 많은 이야기가 지워졌다. 적지 않은 수의 친일 경력자들이 모종의 과정을 거쳐 체제에 순응하는 인물로 거듭난 경우도 있고, 반대로 일본 제국주의에 평생 저항해 온 인물이지만 북한 정부에 반발하는 “종파 분자”라는 낙인이 찍혀 아직도 재평가 받지 못하는 인물들이 산재해 있다.

역사에 대해 가정은 무의미하지만, 만약 한국 전쟁이 없었다면, 우리는 더 많은 시간을 두고 더 다층적인 분석을 통해 독립운동의 공과 과를 평가하고, 친일 인물들의 명암을 가려 낼 수 있었을 것이다. 아울러 어제의 배신자가 오늘의 영웅이 되는 해괴한 일을 목도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쟁은 이 모든 것을 완전히 뒤집어 버렸고 모든 논의는 “북이냐, 남이냐”는 도식 아래 묻혀 버렸다. 역사적 인물에 대한 공개적이고 민주적인 토론이 필요하며, 그 모든 역사를 오롯이 수용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베튼의 의견은 이러한 지점에서 중요하다.

전쟁은 농간이다. 전쟁을 원하는 사람들은 충분한 시간을 두고 숙의를 거치지 않고 쉽고 빠르게 결론에 도달하고 싶어하는, 그리고 그 결론이 오롯이 자신을 위한 것이 되기를 원하는 이들이다. 많은 사람들은  우크라이나와 스테판 반데라를 둘러싼 이야기를 통해 아직도 현재 진행형인 한국의 상황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전쟁을 통해 누가 영웅이 되고 누가 이득을 얻는가를 주시해야 한다. 그 영웅들은 적어도, 전선에서 쓰러져 간 수많은 젊은이들의 목숨을 보답해 주지는 못할 것이다. 

또한 진행 중인 전쟁에서 특정인물을 악마화하거나 영웅화하는 것보다 중요한 건 전쟁 발생의 구조를 살피며 비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록히드마틴 같은 전쟁수혜기업의 주식이 상승하는 건 영웅과 악마의 싸움 결과가 아니라 전쟁이 추구하는 자본주의 이익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전쟁에서 돈을 버는 사람들은 따로 있다.

 

 

각주

  1. 우크라이나는 독특한 지역색과 문화를 가진 곳이었고, 이에 따라 소련 시절에도 러시아와는 다른 문화적 경향을 보였다. 우크라이나 록 음악의 역사는 최소 6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이며(흐루쇼프 해빙기 동안 서구의 문화가 많이 수입되었다), 1980년대에는 소련 내에서 가장 왕성한 언더그라운드 록 음악 씬이 있었다.
  2. 1970년대부터 활동한 영국의 전설적인 포크/펑크 뮤지션. 펑크 밴드에서 시작해서 포크로 이행한 그의 커리어는 1980년대 내내 저항 가요(Protest Songs)로 유명했다. 인터내셔널가의 기존 영어 버전을 “너무 문어체인데다가 이제는 쓰지 않는 고어체가 많아 부르기 어렵다”며 현대에 맞게 개사한 버전으로 녹음해 발매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https://youtu.be/9LbziknNpCE 
  3. 1970년대부터 90년대까지 활동한 미국의 전설적인 펑크 밴드
  4. 1976년 일군의 영국의 예술가들과 록 뮤지션들이 발족한 사회 운동 집합체. 당시 영국에 만연했던 인종주의와 국민전선의 지원을 받은 극우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문화 운동이었다.
  5. 1978년 영국 극우정당인 국민전선의 지원을 받은 백인 우월주의/인종주의 록 운동. “인종주의에 반대하는 록”에 대항하는 운동이었다. 당시 막 떠오르던 스트리트 펑크/Oi! 장르와 연루되는 경우가 많아서 나치 스킨헤드들의 집결지 역할을 하기도 했다.
  6.  참고로 클래쉬는 1980년 전후로 핵군축 캠페인을 지지하는 곡들을 여럿 발표한 바 있다. 
  7. 후지이 다케시, <파시즘과 제3세계주의 사이에서>, 제 2부 3장 2절 중 일부 참조. 

*대표이미지는 본문에서 언급한  rock against racism에서 주최했던 Carnival against Nazis 공연에 출연한 The Clash 와 Steel Pulse의 멤버들이 인종화합에 관한 피켓팅을 하는 사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