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어린(멸종반란 활동가)

 

 

‘기후정의’는 녹색성장과 탄소중립을 빌미삼아, 농민이 땅에서 쫓겨나고 노동자가 일터에서 쫓겨나는 현실에 맞서는 싸움입니다. ‘기후정의’는 그동안 착취당하고 억압받아온 모든 이들의 권리의 다른 이름입니다.

다가오는 9월, 기후정의를 기치로 거대한 행진을 시작합시다. 세상을 이렇게 망쳐놓은 이들에게 또다시 세상을 맡길 수 없습니다. 기후정의행진으로 모인 우리가 대안이 됩시다. 기후위기 시대, 모두가 함께 평등하고 존엄한 삶을 살아가기 위한 싸움을 다시 시작합시다.

– 9월 기후정의행진 조직위원회 제안문 중

 

9월 24일, 기후정의라는 이름을 걸고 행진이 준비되고 있다. 조직위원회에는 340개 넘는 단체들이 함께 하며, 2000명이 넘는 개인들이 추진위원으로 힘을 모으고 있다. 지역에서는 버스나 기차를 빌려 함께 서울로 오겠다는 움직임이 일고, 기후정의와 직접행동에 대한 강연들이 우후죽순 열리고 있다. 민주노총에서는 1만 명이 넘는 조합원들이 함께 하겠다고 한다. 곳곳의 지하철역과 대학 캠퍼스에는 기후정의행진의 공식 포스터가 하나 둘 씩 붙여지고 있다.

공식포스터

 

내가 함께 하고 있는 광주의 청소년 기후 행동 동아리 일점오도씨에서도 924를 준비하기 위한 예열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기후위기비상행동과 기후정의동맹의 활동가를 초청해서 강연을 기획하였으며, 거리에 포스터를 붙이기도 하였으며, 동물권, 청소년, 장애 등 여러 영역의 활동가들과 함께 만들어갈 기후정의 오픈마이크만을 남기고 있다. 그 중에서 특히 기후정의동맹의 김선철 활동가와 함께 한 강연이 인상적이었다. 김선철 활동가는 ‘기후위기를 돌파하는 사회운동’이라는 주제로 멸종반란, 선라이즈무브먼트 등 해외의 시민불복종 직접행동의 사례들을 소개했다. 그는 우리에게 ‘우리는 위기를 위기로 대하고 있을까?’ 라는 질문을 던졌고, ‘위기를 위기로 대한다는 것은 어떤걸까?’ 라는 질문이 내게 남았다.

 

위기에 대해 생각하기

사실 지금이 위기의 시대라는 말은 적지 않게 들어왔던 것 같다. 이제 어느 정도 익숙해진 기후위기부터 생태위기, 민주주의의 위기, 경제 위기, 문명의 위기까지, 난잡하고 남발되고 있다는 느낌까지 받을 정도로 위기라는 말은 곳곳에서 떠다닌다. 하지만 위기에 처했다는 감각은 저 멀리.

위기라는 말이 범람하는 한편, 그것이 누구의 어떠한 위기인지에 대한 이야기는 아직 한참 부족해보인다. 그렇지 않을 때 위기라는 말은 누군가를 희생시키는 훌륭한 도구로 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순간에도 그런 일은 일어나고 있다. ‘기업의 위기’ 대응을 위해 노동자의 처우는 끊임없이 악화되며, ‘기후위기’의 대응을 위해 농민들은 태양광 패널에 농지를 내주어야 했으며, ‘지역 불균형 위기/경제 위기’의 극복을 위해 곳곳에는 새로운 공항들이 들어서고 있다. 국가 권력과 자본 권력은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내고자 하지만, 이는 그들의 위기를 노동자의 위기로, 농민의 위기로, 상괭이, 삵, 구렁이 등의 비인간 동물과 생태계의 위기로 전가하는 것이다. 현재의 기후위기는 위기를 끝없이 계속해서 바깥으로 밀어내는 사회의 논리에서 비롯된 것이지 않을까. 기후위기는 아직 그렇게 소비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위기를 밀어내는 방식을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 오히려 위기는 부정의한 사회 체제를 지목하는 단서로써 기능해야 하며, 기후위기는 변주되어온 위기의 마지노선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위기를 밀어내는 방식을 거부한다는 것은 위기 그 자체에 대해 고민하기보다 위기를 겪는 존재들에게 집중하겠다는 노력이다. 위기를 항해하며 마주할 슬픈 기쁨을 감각하며, 우리에게 주어질 생명의 죽음과 태어남을 감당하려는 책임이다. 여성의 위기, 흑인의 위기, 장애인의 위기, 비인간 동물의 위기, 무한 스펙트럼 속 소수자의 위기를 무시하며 도래한 기후위기는 우리에게 공생의 조건과 평화로운 관계의 상상을 시급히 요구한다. ‘살처분’이라는 방식으로 학살당하는 축산 동물, 젠더불평등에 의한 폭력에 노출되는 여성, 우크라이나 뿐 아니라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의 참상과 난민, 기후위기는 늘어날 가뭄과 폭우로 겪게 될 고통만큼이나 이러한 기존 위기들을 강화시킨다. 기후위기를 위기로 인식한다는 것은 앞으로 닥칠 폭력을 상상하는 일이며, 이를 위해서는 현존하는 폭력을 더욱 광범위하고 다양하게 드러내야만 한다.

 

폭력을 재정의하기

우리는 그런 위기들을 넘나들며 감각할 수 있을까? 여러 위기들은 우리 안에서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 얼마 전, 이런 질문을 내게 던져주었던 영화를 보았다. 제목은 <사마에게>. <사마에게>는 민주화 운동을 억압하는 독재 정권에 의해 내전이 일어나고 있는 시리아의 한 도시, 알레포에서 5년에 걸쳐 찍은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와드 알 카팁 감독은 의사인 애인과 함께 알레포의 한 병원에 남아 공습과 폭격에 죽어가는 생명들을 치료하려 애를 쓰는 한편, 학살의 땅에서 태어나야만 했던, ‘사마’로 대표되는 생명들에게 용서를 구한다.

 

(2019) 스틸컷

<사마에게>(2019) 스틸컷

 

학살을 증언하는 그의 영상은 어느새 나를 페허가 된 알레포로 데려다 놓았다. 폭격으로 까맣게 타버린 버스를 아름답게 색칠하며 웃는 아이들 곁에, 쓰러진 형을 데리고 병원으로 데려오는 어린이의 눈물 옆에 나의 닿지 않는 손이 있다. 페허가 된 도시에서 태어난 그들의 눈동자에 비친 세상은 무덤덤할 뿐이다. 아이들과 그들에게 “이런 세상에 눈 뜨게 해서 미안해”라고 말하는 어른들의 속죄와 1200만 명이 넘는 난민의 행렬, 기록에 담긴 피해자와 저항자들의 모습은 내게 기후위기를 겪는 세상에서 벌어지리라고 예상되는 일들과 다르지 않아보였다. 영상 속 그리고 영화를 본 우리는 저 처참한 폭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와드 알 카팁 감독은 이렇게 간구한다.

3년 전, 우리도 그곳에 있었다. 우리는 죽음으로부터 탈출했지만, 아직 3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공격받고 있다. 나는 사람들이 <사마에게>를 보고 ‘이 일은 역사다’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일은 여전히 일어나고 있으며, 사람들은 이제 행동을 해야 될 때가 왔다. 그런 점에서 나는 영화에 대해 많은 희망을 가지고 있다. 만약 사람들이 영화를 볼 수 있다면, 정부가 영화를 볼 수 있다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한 진실을 이해하고 행동으로 옮길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인간으로서, 나는 그 희망을 붙잡을 수 밖에 없다.

그의 희망에 우리는 어떻게 화답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우리는 수전 손택의 우려처럼 전쟁을 대상화하거나 연민에 그치는 태도를 벗어날 수 있을까? 시리아 민중들의 위기는 어떤 위기이며, 우리의 위기와 어떻게 닿아 있을까? 시리아에서 수많은 생명들을 앗아간 확산탄 등 전쟁 무기를 만들고 수출한 한화와 풍산 등의 국내 기업들, 그리고 ADEX(국제 항공우주 및 방위산업 전시회)와 DX(방위산업전)를 연례행사처럼 개최하는 군사 권력들. 생명보다 이윤을 우선시하는 식민주의, 제국주의와 그에 기생하는 자본 권력들. 전쟁은 저기 알레포에서부터가 아니라 여기 이곳에서 시작된다.

기후위기를 이해하는 일도 그러해야 한다. 기후위기의 원인은 계속해서 위기를 주변부로 전가하며 그들의 생명을 연료삼아 배를 불려온 군사주의에 있다. 정치학자 채효정은 기후위기는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며, 기후위기 이야기는 반드시 자본주의와 식민주의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날카로운 지적처럼 우리는 이 위기가 어디서 왔으며, 무엇이 위기를 심화시키고 있는지에 대한 맥락을 소거한 해법들은 철저히 거부되어야 한다. 앞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분절된 폭력의 감각을 수선하고 더욱 확장된 이해를 딛는 문법들을 만들어내야 한다. 기후위기는 저기 알레포에서의 폭력과 여기 이곳에서의 폭력이 분리될 때 시작된다.

환경인문학자 롭 닉슨은 <느린 폭력과 빈자의 환경주의>에서 시공을 넘어 널리 확산하며 일반적으로 전혀 폭력으로 간주되지 않는 오랜 시간에 걸쳐 벌어지는 폭력을 ‘느린 폭력’이라 부르며, 좀처럼 잘 드러나지 않는 느린 폭력을 가시화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속도를 새롭게 정의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시리아에서의 전쟁이 비교적 명료하고 강렬한 폭력을 드러내는 반면, 기후위기가 작동하는 과정에서의 폭력들은 꽁꽁 숨어 드러나지 않는다. 의도적으로 숨겨진 느린 폭력들을 가시화하는 것은 체제를 유지함으로써 이윤을 얻는 지배 권력의 전략을 무너뜨리는 일이다.

속도를 새롭게 정의하는 것은 또한 우리 삶의 일어나고 있는 문제나 위기를 사회 질서와 체제의 문제로 발돋움시키는 일이며, 이는 곧 진정으로 ‘개인적인 것을 정치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과업이다. 전쟁과 기후생태위기가 같은 체제의 연속선상에 있다는 것을 환기해야만 하고, 기후생태위기는 자본이 생명과 벌이는 전쟁으로 인지되어야 한다. 그때에 알레포의 사람들은 무기력하고 수동적인 피해자들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폭력을 증언하며 새로운 체제를 위해 싸우는 든든한 동맹 세력으로 우리 곁에 설 수 있다.

 

저항으로서의 돌봄, 돌봄으로서의 저항

폭력은 문 밖에 있지 않다. 폭력은 그것과 맞서 싸우려는 사람들로 하여금 폭력의 문법에 노출되게 만든다. 내가 속한 멸종반란은 현재 ‘공동체 멈춤’을 선포한 상태다. 젠더위계에 의한 ‘위기’ 상황이라는 판단 하에 ‘안전한 공동체를 위한’ 작업에 집중하기로 했고, 이를 위해 가덕도 신공항 재판 투쟁을 제외한 모든 대외활동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신고된 사건이 단지 가해자와 피해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걸 가능케 했던 누적된 젠더위계와 공동체 문화의 문제라는 것. 이 과정에서 우리는 성차별 뿐 아닌, 종차별, 지역 차별, 나이 차별 등 다양한 위계가 우리 안에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우리는 신뢰를 재건하기 위한 노력들을 하고 있다. ‘공생의 조건’이라는 토론회 자료집을 함께 읽으며 공동체 내 성폭력과 젠더 위계에 대한 공통 감각을 만들어보고자 했고, 성폭력이라고 이름붙이지 않은 폭력에 대해서도 공동체적 해결을 위해 힘을 다하는 중이다. 나는 그 과정을 거치며 누구나 해악적인 시스템 속에서 가해의 위치에도 피해의 위치에도 앉을 수 있음을 느꼈고, 중요한 것은 비대칭적인 위계를 인식하는 가운데 말할 수 없었던 피해와 고통을 적극적으로 들으려 하는 공동체의 노력임을 깨달았다.

멸종반란이 위기에 부닥치고서 내린 결정은 멈춤과 성찰, 그리고 돌봄이다. 돌봄이 충분히 이루어지면 우리는 다시 세계와 강렬히 불화하며 평화를 일구어 갈 것이다. 멸종반란이 작은 공동체라 가능한 일인걸까? 그렇지 않다. 우리 사회는 작은 공동체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각의 공동체가 차별, 혐오, 폭력, 위계에 저항하며 평등하고 수평적인 문화를 지향하려 한다면 우리는 광범위한 평화를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평화는 갈등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갈등을 평화롭게 풀어가는 과정이다. 우리의 노력과 지향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출처: <평화는 처음이라>)라는 말처럼.

공동체를 멈춘다는 결정에 대해서 지지만큼이나 우려도 없지 않았다. 9월 기후정의행진을 앞두고 투쟁의 동력이 와해될까 두렵다는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곧 우리 안의 차별과 위계와 싸우는 것 또한 기후정의 투쟁이라는 합의에 이르렀고, 우리는 한층 더욱 단단해질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최근 여성문화이론연구소에서 진행했던 ‘페미니즘X기후정의’ 포럼에서 여성학자 고정갑희는 페미니즘 운동이 지금껏 거대 담론을 이야기하지 않았거나 못했던 이유는 일상의 미시 권력 투쟁에 대한 대응조차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라 말한다. 기후정의를 외친다는 것은, 위기를 약자에게 전가하는 방식을 거부한다는 것은, 우린 더 이상 일상을 양보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자, 돌봄을 원칙으로 사회를 재편성하겠다는 혁명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저항으로서의 돌봄, 돌봄으로서의 저항’이다.

 

2022년 8월 28일 지리산 산내 성다양성 축제

2022년 8월 28일 지리산 산내 성다양성 축제

 

이제 우리가 광장에서 만난다면, 당신이 평소에 꺼내기 어려웠던 아픔을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당신의 아픔에 대해 우리가 듣고서 서로가 연대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이해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 그 아픔이 모이고 번져 우리 스스로를 향한 자조가 아닌, 체제를 향한 분노로 달구어지길 바란다. 기후정의를 말한다는 것은, 위기를 위기로 대한다는 것은, 우리가 모여서 해악적인 시스템에서 잠시 떨어져 나와 멈춤을 결단하고, 다시금 연결되어 상처입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단단히 돌보는 과정이다. 멸종반란은 이렇게 노래한다. 우리에게는 서로를 북돋을 수 있는 신뢰의 힘이 있다고, 그 힘으로 이제 ‘돈보다 생명’을 외치자고, 우리 생명을 위해 사랑과 분노로 즐겁게 반란하자고.

 

우리에게 힘을
힘을 가진 우리
돈보다 생명
생명위한 반란
생명 분노 사랑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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