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혜린(해병대 예비역 대위, 전 군인권센터 상담지원팀장)
삼천만의 자랑인 대한해병대 / 얼룩무늬 번쩍이며 정글을 간다 / 월남의 하늘 아래 메아리치는 / 귀신 잡는 그 기백 총칼에 담고 / 붉은 무리 무찔러 자유 지키며 / 삼군에 앞장서서 청룡은 간다.
해병대 군가 중 하나인 <청룡은 간다>의 가사이다. 해병대 소속 파월부대였던 청룡부대는 현재 해병2사단이 되었다. 해병2사단에서는 공식 사단가(歌)보다도 이 노래를 더 자주, 공식 군가처럼 부른다. 우리 옆 중대 별칭은 짜빈동1) 중대였다. 비단 2사단뿐 아니라, 해병대라는 부대 전체가 월남에서의 빛나는 승전 기억으로 도배되어 있다.
각군 사관학교에는 타국에서 온 수탁생도들이 있다. 내가 신입생 기초군사훈련을 맡았을 시기에는 베트남에서도 수탁생도가 왔다. 수탁생도는 우리나라와 군사교류를 맺고 선진군의 문화와 기술을 습득하며, 군사외교적으로도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보내지는 그 국가의 ‘대표선수’다. 베트남은 소말리아보다도 훨씬 해적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해양교통로의 요충지인 말라카해협 일대에 이해관계가 있고, 한편 반대편에선 중국의 팽창 전략에도 대응해야 하는 고충이 있다. 해군력이 중요한 나라인 것이다. 나와 함께 학교생활을 했던 베트남 수탁생도들은 하나같이 묵묵하고, 성실하고, 요령과는 거리가 먼 성격이었다. 나는 이제 막 한국에 와 함께 훈련을 하고 학교생활을 해 나갈 수탁생도들에게, <청룡은 간다>라는 군가를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막막했다. 나의 막막함과는 별개로 베트남 수탁생도들은 하나같이 묵묵하고 성실했고 요령과는 멀었기 때문에, 익숙하지도 않은 발음의 가사를 꾸역꾸역 외워 다른 생도들과 함께 열심히 불렀다. 나는 선배로서 그 가사에 대해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이냐고 물어보지도 못한 채 학교를 졸업했고, 해병대가 베트남에서 치룬 전투들의 전술 및 성과에 대해 공부했으며, 그 군가의 주인공인 부대에서 복무했다. 나도 성실한 군인이었으니 어쩔 도리가 없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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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나라에서는 관련한 강의를 해본 적이 없으니 알 길은 없지만, 유난히 한국 남자들은 ‘잠재적 가해자’라는 표현에 목숨을 거는 경향이 있다. 성폭력이나 성인지감수성 강의안에 잠재적 가해자라는 표현은 단 한 글자도 나오지 않아도 그러하다. 워낙에 말이 나오다 보니 강사들도 최대한 ‘중립’적이고 ‘객관’적으로 보일 수 있도록 인용은 공식적인 통계자료와 논문에서 발췌해 쓴다. 그래도 잠재적 가해자라는 볼멘 소리가 나온다. “본인이 가해할 것도 아니면 그 표현이 왜 불편하세요? 가해자는 일부 남성들 뿐이라고 하셨잖아요?”라고 되물어도 뾰족한 답변 없이 일단 기분이 나쁘다는 말이 우선된다.
잠재적 가해자가 되기 싫은 것의 내면에는 반대편의 피해자가 가지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어떤 순결성, 완전무결성과도 닿아있다. 나쁜 사람이 되기 싫다는 것과 피해자 내지 희생자로서 이해받고 보호받고 싶어하는 욕구가 결합 되어 있는 셈이다. 한편, 이렇게 불쌍하고 선량한 내가 감히 가해자라는 지목을 받는 것에 대한 불쾌감도 있다. 한국에서, 유독 남성들이 이 표현에 예민하게 구는 것에 대해, 나는 어느 정도는 ‘희생자의식 민족주의’와도 결을 같이 한다고 본다. 임지현 교수는 책 『희생자의식 민족주의 : 고통을 경쟁하는 지구적 기억 전쟁』에서 희생자의식 민족주의에 대해 “후속 세대들이 앞 세대가 겪은 희생자의 경험과 지위를 세습하고, 세습된 희생자의식을 통해 현재 자신들의 민족주의에 도덕적 정당성과 정치적 알리바이를 부여하는 기억 서사이다.”라고 정의한다. 나는 그럴 리가 없다, 우리는 그럴 리가 없다, 자신의 처지에 대한 정당성과 이유를 부여하기 위해 끊임없이 다른 ‘나쁜 집단’을 지목하고, 희생자 · 피해자였던 기억을 소환해 약자로서의 위치를 점하고자 한다. 진짜 가해를 했어도 ‘더 나쁜 가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 이 매커니즘이 작동된다. ‘희생자 되기’와 ‘잠재적 가해자가 되지 않기’는 일종의 순결에 대한 인정투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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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과거 베트남전에서 일어났던 민간인 학살 사건인 ‘퐁니 사건’의 생존자 응우옌티탄 씨가 서울중앙지법에서 있었던 국가배상 소송의 증인신문을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 응우옌티탄 씨는 2018년 있었던 시민평화법정에서도 증언한 바 있다. 사건 당시 8살이었던 응우옌티탄 씨는 청룡부대의 총격으로 자신을 포함해 수많은 민간인 피해자가 상해를 입었고, 가족 5명을 포함한 마을 주민 70여 명이 숨졌다고 증언했다. 응우옌티탄씨는 한국에 입국해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아직도 한국 정부가 이 문제를 적극 해결하지 않으려는 것에 안타깝게 생각한다.”, “전쟁 중에 잘못을 할 수 있지만, 전쟁 이후 과거의 잘못을 다시 바라보고 반성하는 태도를 가졌으면 한다.”고 말을 남겼다. 최근 KBS는 퐁니 마을과 응우옌티탄씨의 모습을, 프로그램 「시사멘터리 추적」 ‘얼굴들, 학살과 기억편’을 통해 심층 취재하여 방송했다.
방송 후 지금까지, 여의도 KBS 앞에는 연일 월남참전군인의 시위가 끊이질 않고 있다. 참전군인회 뿐 아니라 국가보훈처까지 나서서 KBS에 대한 사과를 요청했다. 박민식 보훈처장은 더 나아가, 본인 개인 페이스북에도 “대한민국 국민 32만 5천 명을 학살자로 모는 현실”, “참전용사들도 전쟁 영웅이기에 앞서 전쟁 피해자들입니다!”라는 게시글을 남겼다. 참전군인들의 이러한 항의엔 나름 이유가 있다. 2018년 시민평화법정에서도 증언되었고, 해당 방송에서도 언급되는 것처럼, 당시 퐁니 마을은 베트콩(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보급 등을 담당하는 군사 기지 역할을 했었고, 마을 전체가 게릴라전에 임했기 때문에 마을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모두 ‘베트콩 게릴라’였단 것이다. 그러니까 이 마을에 대피하지 않고 남아있는 사람은 모두 작전 대상이고, 작전 중 발생한 정당한 사망이라는 논리다.
한편 최초 이 문제를 언론에 다뤘었던 한겨레21의 보도, 김현아 『전쟁의 기억, 기억의 전쟁』 등에 드러난 피해자 및 당시 전투에 참여했던 관련자 증언은 사뭇 다르다. 퐁니 퐁넛 마을 외에도 실제 베트남 전쟁에서 일어났던 민간인 피해와 관련해서 한국의 참전군인들과 인정된 사실들도 분명 있다. 하미마을에는 2000년 한국 월남참전전우복지회의 기금을 받아 만들어진 민간인 학살 피해자 위령비가 있다. 그러나 이 위령비 뒷면에 쓰여진, 학살의 내용에 대하여 작성된 비문은 참전군인회의 결사반대에 따라 연꽃 그림으로 덧씌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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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를 설명할 때 자주 사용되는 서사는 “숱한 침략을 받았어도 한 번도 다른 나라를 침략한 적 없는 민족”이라는 문장이다. 이 민족이 정확하게 어디까지를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서사는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를 거쳐, 한국전쟁을 통해 더욱 강화되었다. 특히 한국전쟁은 아직 전쟁을 경험한 세대가 생존해있고, 전쟁의 여파가 분단과 휴전이라는 이름으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인에게 기억과 경험이라는 이름으로 희생자에 위치를 점할 수 있는 하나의 집합적 구실을 제공한다. 한국전쟁이 북한의 남침으로 개전 되었다는 것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지만, 전쟁 전 상황에서의 정치적 갈등과 38선을 두고 일어났던 수차례에 걸친 군사적 분쟁상황, 북한뿐 아니라 남한 지도자의 군사적 호전주의 등 도발 요소들에 대해서는 잘 언급되지 않는다. 전선이 고착되는 과정에서 후퇴와 전진을 반복하며 있었던, 마녀사냥에 가까웠던 민간인 피해에 관한 부분은 항상 ‘반공’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오기 십상이었다. 희생자로서의 포지셔닝은 종전과 평화협정, 비핵화 문제 등 현재 남북관계에서의 진전을 틀어막는 주요한 요소이다.
2018년 시민평화법정과 관련하여 연구를 진행하였던 이한빛은 당시 참전군인의 증언에서 “쐈다”라는 사실 자체가, 학살 당시를 보다 선명하게 만든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가해’에 대한 성찰을 더욱 심화시킬 수 있는 필요조건인가에 대한 의문을 제시한다. 가해에 연루되어 있음을 자임하는 자리에서 ‘참전군인’이라는 군복을 입은 한국인에게 한정하는 것은 오히려 문제를 지나치게 협소한 영역으로 가두어 버리기 때문이다. “가해자가 된다는 것은 가해가 있었음을 확인하는 것과 그 가해가 발생함으로써 만들어진 피해가 불가역적인 것이었음을 인정하는 것과, 그 상처가 함께 살아온 삶에 대한 이해와 그러한 가해가 더 발생하지 않게 하려는 노력을 모두 포함한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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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당시 쐈던 것은 민간인이 아니라 베트콩이었고, 우리의 작전은 정당했다.’라는 사실에 대한 인정투쟁, 이 사실을 확인받음으로써 어쩔 수 없는 국가와 체제 속에서 군복을 입은 채로 역할을 수행해야 했던 희생자로 남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더 나은 가능성과 상상을 하지 못하도록 멈춰세우고 제자리걸음을 하게 할 것이다. 과거의 기억과 경험에 매여 있는 것이 우리를 다시 희생자의 포지션으로 불러왔듯, ‘어쩔 수 없었던 것’에 대한 구차한 설명은 단지 눈앞에 놓인 문제를 억지로 봉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월남참전군인들이 KBS 앞에서의 시위를 멈추더라도, 보훈처장이 우리는 학살자가 아니라며 핏대를 세우는 것이 아닌 “우리 군이 잘못했다.”며 사과를 남긴다 하더라도, 이것이 결국 베트남전의 얼룩무늬 군복 속에서만 논해지는 것이라면 결국 또다시 우리에게 구실을 제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쯤 정글을 헤치지 않고, 멸공하지 않으면서 과거의 가해와 담대하게 마주할 수 있는지를 가늠해본다. 베트남 수탁생도에게 한국에게 베트남전과 그 이후 우리에게 남겨졌던 과제에 대해 언제쯤 제대로 설명해줄 수 있을지를 상상해본다. 짜빈동 중대의 전사(戰史)에 남을 대승뿐 아니라 그림자처럼 있는 과오, 나아가 냉전의 틈바구니에서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었을지를 다양하게 논할 수 있는 군대가 될 수 있을지 꿈꿔본다. 희생자가 되지 않고, 잠재적 가해자도 아니고, 온전한 가해자로 남는다 하더라도 그 책임을 마주하고 더 나은 미래로 갈 수 있을지. 여전히 반공과 멸공 속에서 합당한 구실을 찾아 헤매는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이다.
각주
- 짜빈동은 베트남 쾅나이 성 추라이에 위치한 마을 이름이다. 1967년 2월 14일 ~ 2월 15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과 베트남 민주공화국, 대한민국 해병대 간 전투가 짜빈동에서 일어났고, 당시 대한민국 해병대의 승리를 기념하여 전투 참전부대인 해병1연대 11중대에게 이와 같은 별칭이 붙어졌다.
- 이한빛, 「가해자 됨을 묻기 위하여 –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진상 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을 중심으로-」 사이間SAI, vol 26. pp097-132,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