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동혁(병역거부자, 우리동네 나무그늘 협동조합 이사장)
1.
나는 좀 실용주의자다. 그러니까 직장이든, 단체든 소속된 곳에서 무슨 일을 결정할 때 빠르게 일이 되게 만드는데 에너지를 쏟는 타입이다. 너무 사이즈가 큰 질문이나, 너무 구체적인 질문이 나오면 그냥 분위기 봐가며 대세를 따르거나, 대세를 형성하는데 일조해 빠르게 결론을 내리려는 타입이다. 답답한 걸 싫어하고, 결론 없이 이야기를 나눠보자는 식의 의미부여를 못 견뎌한다.
그러다보니 초창기 전쟁없는세상에서 활동할 때는 좀 피곤하게 느껴졌다. 일이 진척되는 속도가 느리다는 느낌이 들 때도 많았고, 가끔은 너무 섬세하다 못해 예민하다고 느껴질 때도 있었다. 좀 웃긴 얘기다. 세상에서 극소수자 소리를 듣는 병역거부자가 동료들이 예민하다고 느끼는 상황 말이다. 게다가 그때 나는 길어지는 재판 때문에 정서가 불안정해 그닥 안정감 있게 활동을 해내지 못했다. 그런데 이건 20년 전 얘기다.
지금 전쟁없는세상은 서로 눈빛만 봐도 상대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지 빠르게 읽어내는 팀워크를 갖고 있다. 갑자기 이슈가 터져서 일정에 없던 기자회견이 잡히면 삽시간에 알아서 순서 짜고 발언자와 사회자 섭외하고 기자회견문 작성하고 보도자료 뿌리는 곳, 그러니까 일상적인 실무력이 상당한 조직이 되었다. 20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냐고? 구석구석 잘 아는 건 아니지만 그 원동력이 《2022 병역거부운동 여성활동가 인터뷰집》에 잘 나와 있다고 생각한다.
실용주의는 더러 반지성주의로 빠진다. 아 그냥 큰 문제없으면 좀 넘어가지. 이렇게 빠른 일처리를 위해 해소되지 않는 부분을 대충 넘기다 보면 쌓이고 쌓이다 문제가 터진다. 부족한 언어가 한계에 봉착한다. 적당히 밀어둔 문제가 누군가를 소외시킨다. 반복되는 일상이 매너리즘을 만든다. 위계를 만들고 효율이 지배한다.
전쟁없는세상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무엇 하나 대충 넘기지 않으려 애썼고, 누구 하나 소외시키려 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 결과 전쟁없는세상은 수많은 부침을 겪었으나 20년 넘게 버텨 왔고, 병역거부 캠페인을 지속해 (여전히 한계가 많지만) 대체복무 입법을 이뤄냈으며, 반군사주의 슬로건을 내걸고 다양한 캠페인을 조직해 독자적 영역을 구축했다. 그리고 직접행동을 마다하지 않는 많은 이들에게 끊임없이 영감을 주고 있다.
《2022 병역거부운동 여성활동가 인터뷰집》을 읽어보면, 반군사주의 운동 단체 전쟁없는세상의 성장에 필요조건으로 작용했던 페미니즘과 여성활동가의 분투에 대해 이해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페미니즘에 근거해 던졌던 질문은 단일한 사건이나 행동지침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평화주의 활동을 구성하는 리더쉽의 작동 방식, 수평적 민주주의의 구성 원리, 운동의 목적과 수단 전반에 걸쳐 있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 인터뷰집은 역사, 과거-현재-미래를 잇는 역사다.
2.
한 시절을 함께했던 비남성 동료, 친구들의 인터뷰를 읽었다. 그때로 돌아가 그 시간과 공간이 만들어낸 공기를 느낀다. 더러 눈가가 시큰해지기도 하고 웃음이 나기도 하고 갸웃하기도 한다. 읽는 내내 친구들이 그때로 돌아가 내 앞에서 말을 하는 것 같다. 어떤 말은 이제야 그 의미가 온전히 와닿아,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도 든다.
전쟁없는세상은 단체 내 성별분업에 대해 다양한 방식으로 문제제기를 했고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 내려고 노력했다. 여성 활동가들이 소외되거나 평가절하되는 주류사회 흐름에도 맞섰다. 발언을 배치할 때도, 글을 쓸 때도, 회의를 진행할 때도 항상 신경 썼다. 남성 병역거부자를 후원하는 여성이라는 프레임을 벗기기 위해서도 노력했다. 출소한 남성들이 수감된 남성을 일대일로 매칭해 챙겨주기도 했다.
나도 병역거부자 승규씨 수감생활을 도왔던 기억이 있다. 승규 씨는 지문날인을 거부해 고생을 많이 했다. 물품을 구입할 수가 없는 상태라 수감생활에 어려움이 많았다. 승규 씨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찾느라 편지를 자주 주고 받았고, 교도관과도 자주 소통했다. 그저 수감자 한 명, 조력자 한 명이 아니라 병역거부 운동을 이끌어가는 다양한 사람과 역할이 존재함을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단체 운영방식이 크게 바뀌었다는 2012년 이후로는 그저 후원회원으로 머물러 있을 뿐이라 많은 변화를 직접 느끼지는 못하지만, 전쟁없는세상이 미시/거시적 차원과 일상/사회적 맥락을 가르지 않고 그런 노력을 하고 있으리란 건 믿어 의심치 않는다.
여성주의는 이미 고착화된 여성(성)을 부수기를 요구하지만, 한편으로는 또 그것을 긍정하기를 요구한다. 부정과 동시에 긍정을 요구하는 이 언어가 충돌하는 지점이 나는 여전히 어렵다. 인터뷰에 등장하는 활동가들 역시 다양한 스타일로 여성활동가의 정체성을 고민한다. 예전에는 이들에게서 어떤 합의된 언어를 찾는 게 쉽지 않았는데 인터뷰를 보니 이제는 좀 분명해진 느낌이다.
여성주의라고 표현하건, 여성 리더십이라고 표현하건 그 정신의 핵심은 전쟁없는세상이 질문하기를 멈추지 않았다는데 있는 게 아닐까? 실용주의자가 놓쳤던 다양한 질문을 회피하지 않았고, 적당히 넘길 수 있는 문제를 지치지 않고 토론선상에 올린 덕분에 전쟁없는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민주적이고 평등한 조직문화를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이런 자화자찬이 조금 낯부끄러울 수도 있다. 전쟁없는세상 활동가들은 워낙 다들 과장을 못하는 체질에다 고통을 견디는 힘이 커서 힘든 상황도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아서 말이다. 그리고 여전한 질문들이 남아 있다. 인터뷰 안에서도 해소되지 않는 질문이 자주 보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질문들 역시 끊임없이 토론을 통해 다듬어질 것이라는 점이다. 어떤 능력자가 나타나 해결해주는 방식이 아니라, 함께 질문하고 토론하며 없는 답을 찾아가는 게 우리에게 필요한 방식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지금 전쟁없는세상 앞에 놓인 한계 역시도 언젠가는 또 다른 한계에 자리를 내 줄 것이다. 그렇게 영생을 누리자 전쟁없는세상.
추신. 다양한 그룹의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해 노는 걸 좋아하는데 전쟁없는세상 친구들이 왔다 갔을 때가 집이 제일 깨끗하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척척척. 알아서 치우고 정리하고 누구 하나 불편하지 않게 하려고 척척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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