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예비군 병역거부자)

 

안부를 묻기가 무색한 나날입니다.

작년 말, 제가 사는 제주에서는 <러시아 병역거부자 난민을 인천공항에 강제 구금하고 있는 한국정부 규탄> 기자회견이 있었습니다. 당시 연대 발언을 제안받았지만, 예정된 일정이 있어서 참석할 수 없었습니다. 연대하지 못함에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바로 어제 ‘한국에 사는 병역거부자로서 러시아 병역거부자 난민에게 편지를 쓰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게 되었어요. 저는 곧바로 하겠다고 답했습니다.

사실 지금의 상황에서 제가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건넬 수 있는 말이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저는 그런 무력감 속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무력감으로부터 생겨난 ‘뭐라도 하고 싶다’는 마음의 꿈틀거림으로 이 편지를 쓰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힘이 될지 모르겠지만, 만나보지 못한 여러분들을 상상하며, 한 글자씩 마음을 전해봅니다.

편지를 쓰고 있는 지금 저는 인천공항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있는 바로 그곳입니다. 출국을 앞두고 제가 있는 이곳이 여러분에게는 벗어날 수 없는 감옥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습니다. 누군가 설렘을 안고 향하는 공간이 누군가에게는 억압의 공간이라는 것. 누군가의 이동을 위해 존재하는 공간이 누군가에게는 구금의 공간이라는 것. 그 공간에서, 그 공간을 통해, 이토록 구체적인 차별을 마주합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 이 여행객들의 모습이 매일 매일, 여러분들의 눈에 담기겠구나, 생각하니 마음이 아픕니다. 이 차별의 구조에서 나는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를 생각하니 부끄러운 마음을 외면하기 어렵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예비군 훈련을 거부한 병역거부자입니다. 5년간 군사훈련에 참여하기를 거부하며 수십 차례의 경찰조사와 재판을 받았습니다. 유죄가 확정되어 사회봉사(강제노동)를 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병역을 거부한 것은 저 스스로가 온전한 평화주의자이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내가 ‘나’로서 삶을 살아가고 싶다는 마음이었습니다. 저와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안전을 염원했습니다. 나의 생존을 위해 타인을 짓밟아야만 하는 삶을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전쟁이라는 것이 무서웠습니다. 그 두려움과 자유에 대한 갈망으로 군사적 갈등을 유지하거나 전쟁을 가능하도록 수행하는 집단의 일원이 되기를 거부했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선택을 했던 것은 아닙니다. 예비군 훈련을 거부하기 전 3년간, 저는 스스로의 마음을 외면해왔습니다. 병역을 거부하면 치르게 될 법적인 불이익들이 두려웠습니다. 그 시간 속에서 느낀 부끄러움을 모른 척하며 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시 상황이 아닌 때에도 병역을 거부하지 못한다면, 실제 전시 상황에서는 총을 들고 누군가를 죽이며, 전쟁을 수행하는 부속품이 되겠구나.’ 스스로의 신념을 실천하며 살지 못했을 때 느끼는 부끄러움과 허탈함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저는 병역으로부터 도망가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실제 전시 상황을 마주하고 병역을 거부하여 난민이 된 여러분들이 있습니다. 어떤 종류의 동질감을 느낀다고 하기에 우리는 너무 다른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처한 상황과 감내해야 하는 것도 너무나 다르고요. 다만 저는 여러분을 통해 저의 미래일지도 모를 모습을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바로 지금 여기에서, 국가와 민족을 넘어 전쟁과 병역으로부터 도망가고자 하는 개개인의 공간을 마련하고 확장하는 것이 저와 연결된 이슈임을 느낍니다. 전쟁이 결국 일상적인 차별과 착취의 결과물이라면, 우리는 이미 전쟁 속에 살고 있고 동시에 매일 매일 그 전쟁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 ‘우리’를 구성하는 일원으로 나의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외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전쟁 속에서도 전쟁이 아닌 공간을 찾아내고, 소중히 길러내고, 확장시키는 것. 그것이 지금 제가 느끼는 부끄러움을 외면하지 않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편지를 쓰며 애초에 있던 무력감으로부터 한 발자국 멀어지고 있음을 느낍니다. 부당하게 여러분을 구금하고 있는 한국 정부가 구금을 해제하고 여러분이 난민으로서 누려야 할 마땅한 권리를 보장하도록 요구하는 행동에 평범한 한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목소리들을 보태겠습니다.

무엇보다 여러분이 건강하길 바랍니다. 미안함과 무색함 그리고 사랑의 마음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