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수경(드라마 덕후, 〈드라마의 말들〉저자)
‘호국보훈의 달’ 6월을 하루 앞둔 지난 5월 31일 새벽. 시끄럽게 울리는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서울특별시] 서울지역에 경계경보 발령. 국민 여러분께서는 대피할 준비를 하시고, 어린이와 노약자가 우선 대피할 수 있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라는 짧은 메시지에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도대체 무엇을 경계하고, 왜 대피해야 하며, 어디로 대피하라는 것인지 제대로 담겨 있지 않은 메시지에 전쟁에 대한 공포를 체감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아이를 데리고 대피소로 달려갔다고 하고, 내 지인은 급하게 생존 배낭을 꺼냈다. 무슨 일인지 알아보려는 이들로 인해 네이버 서버는 터져버렸다. 다행히도 20여 분 뒤 ‘오발령’이었다는 안내 메시지가 왔지만, 시끄럽게 알람 소리가 울리는 바람에 또 한 번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게다가 ‘알려드림’이라는 성의 없는 끝맺음은 뭐 하자는 거임?
이 새벽의 해프닝으로 안온한 일상과 위기 상황이 얼마나 가까이에 있는지 체감했고, 실제로 전쟁이 난다면 얼마나 지옥일지 잠시나마 경험했으며, 정보가 통제된 상태에서 공유되는 일방적 메시지는 쉽게 우리 일상을 공포로 몰아넣을 수 있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누군가는 이 해프닝을 그저 일 못하는 사람들의 단순 실수로 여길 수도 있지만, 만약 ‘분단국가’라는 현실을 이용한 공포 정치의 일환이라면? 섣부르고 위험한 상상일 수 있겠으나, 전쟁이 우리 일상과 그리 멀지 않다는 면에서 가능성 있는 현실이지 않을까?
때마침 이번 글에서 소개하려는 드라마가 <아이리스>여서인지 이런 ‘음모론’에 가까운 상상이 한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이 드라마에는 슬픈 전설이 있어…
2009년에 방영된 <아이리스>는 가상의 조직인 국가안전국(NSS, South Korean National Security Service) 요원들의 활약을 다룬 ‘한국형 첩보 액션’ 드라마다.1) NSS는 무려 박정희 정권 시절인 4공화국에 창설되어 “혹시 벌어질지 모르는 2차 한국전쟁을 막기 위해 목숨 걸고 임무를 수행”해온 조직이다. 이런 NSS와는 반대로 아이리스(IRIS)는 암살과 테러를 이용해 사회 위기와 국가 간 분쟁을 유발하고, 자신들의 이익에 반하는 국가 내 정부를 전복시키는 테러 집단이다. 이들은 청와대와 NSS 등 대한민국(남한) 정부 조직뿐 아니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군부 세력, 그리고 전 세계에 암약하며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작전을 펼친다. 그러니까 남과 북 어딘가에 ‘간첩’이 활동하고 있다는 상상력의 스케일이 매우 커진 셈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갈등을 조장하여 분쟁을 유발하고 필요하다면 국가 간 전쟁까지도 일으키는 주체가 과거에는 ‘국가’로 상상되었다면, 이 드라마에서는 국가를 넘어선 존재로 상정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누가, 왜, 전쟁을 일으키려는 것인가?
대선 과정에서 아이리스 조직원에게 암살될 뻔했으나 NSS 요원인 김현준의 활약으로 목숨을 건지고 당선된 조명호 대통령은 북한이 핵을 보유하고 있는 현실을 인정하면서 남과 북의 대화를 통해 평화 체제를 구축하고자 정상회담을 추진한다. 조명호 대통령과는 목적은 다르지만, 북한의 국방위원장도 정상회담을 통해 통일의 물꼬를 트고자 특사를 파견한다. 이런 현실적 필요에 의해 두 정상은 회담을 추진하지만, 아이리스는 이 회담을 무산시켜 전쟁을 일으킬 계획을 세운다.
아이리스는 왜 이 회담을 무산시키려고 하는 것일까? 북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이자, 아이리스 조직원인 연기훈은 수많은 인민의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북남 전쟁’을 일으킬 거냐고 항명하는 호위부 호위 팀장 박철영에게 이렇게 말한다. “난 이 전쟁으로 더 젊고 더 강해진 공화국을 건설할 것이다.” 굴욕적인 통일이 아닌 (자신이 중심이 된) 강한 공화국을 건설하기 위해 수많은 인민의 목숨을 빼앗는 전쟁을 일으켜서라도 정권을 빼앗겠다는 야심을 드러낸 것이다. NSS의 국장으로 위장한 아이리스 대한민국 책임자인 백산의 생각도 이와 다르지 않다. 전쟁을 “15만의 희생으로 안보의식을 되찾고 이 나라를 지킬 수 있다면 나쁘지 않은 거래”라 여기는 것이다. 이들에게는 인민의 희생보다는 ‘강한 체제’ 혹은 ‘튼튼한 안보’라는 그릇된 신념이 앞선 것이다. 그런 이들이 서울 중심에 위치한 백화점에서 수십 명의 인질을 담보로 요구한 것은 단순하다. 정상회담과 남북경협과 남북대화를 취소하고, 남북 핫라인을 단절하라는 것. 하지만 이들의 ‘신념’도 사실 아이리스의 수단일 뿐, 목적은 아니다.
<아이리스> 후반부에 이 조직을 움직이는 기업인 ‘맥글라스’라는 이름을 가진 회사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이 회사는 군수산업과 민간군사기업을 소유한 군산복합체다. 드라마 내내 이름만 등장한 아이리스 동아시아 책임자 ‘블랙’도 거대 방위산업체 ‘제논’의 대표다. 만약 전쟁이 난다면 막대한 이윤을 취하게 될 집단이다. 즉, 이 세력의 최종 목적은 이윤 창출인 셈이다.
이에 관해 이희승은 “드라마에서 일종의 초국적 방산복합체로 규정된 ‘아이리스’라는 비밀 조직은 전지구화되고 있는 신자유주의를 내면화한 구현체라고 볼 수 있다. 후기 자본주의의 화두인 신자유주의와 초국적 방산복합체인 ‘아이리스’는 기업과 자본의 자유로운 활동의 보장이라는 명분으로 국가권력의 시장개입을 비판하고 무차별적인 이윤추구와 무한한 시장의 팽창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유비관계에 있다”라고 보았다.2) 즉, ‘강한 체제’와 ‘튼튼한 안보’는 겉으로 드러난 구실일 뿐만 아니라, 이들에게 평화는 신자유주의적 이윤 획득을 가로막는 걸림돌일 뿐이다.

현실 세계의 군수산업체들의 추악한 이면을 살펴보려면 국제적인 부패감시 단체 ‘커럽션 워치’의 앤드루 파인스타인이 쓴 책 <어둠의 세계>(원제:Shadow World)를 추천합니다.
이런 <아이리스>의 세계관은 그 뒤에 이어진 시리즈를 통해 구체화된다. <아이리스>의 스핀오프 드라마로 제작되어 2010년에 방영된 <아테나 : 전쟁의 여신>(아테나)은 <아이리스>에 등장했던 북한 원자력 연구소 소장 김명국 박사의 망명 요청 사건의 이면과 <아이리스>로부터 3년이 지난 시점을 다룬다. <아이리스>가 ‘핵 개발’을 둘러싼 남과 북의 오랜 불화와 대립 상황에서 일어날 수 있는 전쟁의 위험을 다루었다면, <아테나>에서는 ‘고유가’로 인해 개발 중인 대체 에너지인 신형 원자로를 둘러싼 대결이 중심을 이룬다. <아이리스>가 전쟁을 정당화하는 ‘신념’에 관한 이야기라면 <아테나>는 전쟁을 일으켜서라도 이익을 취하려는 세력에 관한 이야기로 해석될 수 있다. 그리고 2013년에 방영된 후속작 <아이리스–2>에서는 시즌1의 ‘조명호 정부’에서 ‘하승진 정부’로 정권이 바뀐 이후를 다룬다. 남북 정상 회담을 통해 평화 체제를 구축하려던 조명호 대통령이 물러나고 당선된 ‘검사’ 출신 하승진 대통령은 북측의 핵개발을 반대하는 인물이다. 핵개발을 중단하기 전까지 ‘대화’는 불가능함은 물론이고 지원을 중단해야 한다는 입장이 확고하다. 한 발 더 나아가 대한민국도 북측과 마찬가지로 핵보유국으로 만들어 강한 나라를 만들고자 한다. 2010년 전후에 만들어진 드라마들인데 2017년 이후 전개된 한국 사회의 변화를 예감이라도 한 것일까(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전쟁’이라는 슬픈 전설을 다시 만들지 않으려면
한국전쟁을 ‘구술’과 ‘미디어’로 간접 경험한 나에게 전쟁은 어쩌면 멀고도 비현실적인 이야기일 수 있다. 그러나 전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에서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최근 몇 년 동안 한국 사회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불안한 징후들을 주목할 수밖에 없다. 드라마를 볼 것도 없이 현재진행 중인 러시아의 전쟁만 보더라도 전쟁은 누군가의 ‘필요’에 의해 쉽게 일어날 수도 있고, 다른 나라에서 일어나는 전쟁이라도 어떤 형태로든 ‘나’와 연결될 수밖에 없으며, 전쟁은 무고한 이들의 막대한 희생을 막을 수 없고, 만약 제2차 한국전쟁이 발생하기라도 한다면 과거와는 달리 전쟁으로 인한 피해는 재건이 불가능한 형태로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
‘아이리스’로 표상된 전쟁을 일으키는 요인은 “국가들에 잠입해 체제의 상황에 맞춰 때로는 기업의 형식으로, 때로는 정치권력의 중심에서, 혹은 정치권력과 경제를 연결하는 가교로서의 로비스트3)”로 사회 곳곳에 존재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드라마가 드러낸 문제의식처럼 전쟁이란 느닷없이 맞이하는 비극적 운명이거나 과거완료형 전설이 아니라, 이윤 창출을 원하는 이들에 의해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기획물’이라는 인식이 필요하지 않을까? 전쟁이라는 기획물을 불가능하게 하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아이리스>는 이런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을 내놓지는 않는다. 오히려 드라마 속 시민들은 테러나 전쟁의 낌새를 알지 못한 채 당할 수밖에 없는 수동적 존재로 등장할 뿐이다. 다만, 전쟁은 누군가의 필요에 의해 언제든 일어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블록버스터급’ 상상력을 통해 보여줄 뿐이다.
<아이리스>는 주연 배우들의 활약과 막대한 자본을 투자하여 서울 광화문 한복판에서 벌어진 테러 장면 등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한 덕분에 ‘성공한’ 드라마로 평가되지만, 비현실적이고 개연성 없는 전개 등으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시즌1의 성공에 힘입어 제작된 후속작들은 대중의 선택을 받지 못한 채 ‘폭망’했다. 만약 어디선가 그릇된 신념과 이기적 욕망, 불의한 이윤창출을 위해 전쟁을 기획하는 이들이 있다면 개연성과 설득력을 잃은 드라마의 운명처럼 ‘폭망’하기를 바란다.

대중에게 외면 당한 드라마 <아이리스2>. 불의한 이윤창불을 위한 전쟁을 기획하는 이들의 미래가 이 드라마처럼 ‘폭망’하기를.
각주
1. ‘한국형’이라는 수식어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첫째는 세계 유일한 분단국가라는 점에서 이런 소재는 한국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둘째는 장르와 상관없이 ‘연애하는’ 게 한국 드라마의 특징인데 이 드라마에서도 첩보 활동도 하고 연애도 하는(심지어 삼각관계) 주인공들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 글에서는 후자의 경우는 다루지 않았다.
2. 이희승, ‘블록버스터 드라마의 식민주의적 욕망 : 드라마 <아이리스>를 중심으로’, <영상기술연구 제12호>(2010)
3. 앞의 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