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지혜(여성운동 활동가)

 

전시의 제목 ‘추신.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소설가 김초엽의 작품 제목에서 가져왔다. 현실을 그대로 재현하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상상하고 재구성하는 것이 SF소설이라면 병역거부운동의 역사야말로 가장 픽션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속도전의 시간 감각과는 다른 흐름으로 가는 사회 운동의 시간은 맴돌고, 회전하고, 비스듬히 가고, 제자리로 돌아오고 거꾸로 흐른다는 점에서 SF에서 묘사되는 비현실적인 시간의 성격과 닮아있다. 하지만 그것이 평화에 가장 가까운 곳으로 우리를 이끄는 유일한 방법이라면 우리는 그 시간을 소중히 걸어갈 것이라고 이 전시를 통해 짧은 추신을 남기고자 한다. _전쟁없는세상 20주년 아카이브 전시 소개 中

 

지난 6월 6일부터 6월 12일까지, 전쟁없는세상 20주년 아카이브 전시 ‘추신.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 진행되었지요. 전쟁없는세상이 전시를 통해 강렬한 추신을 남겨주신 만큼, 편지 형식의 후기를 전하려 합니다. 저는 전시와 함께 <전시 오픈 기념 공연×토크(6/7)>와 <전쟁과 군대, 그리고 비인간 동물(6/11)>에 참여하였는데요. 욕심 것 다 참여 하고 싶은 마음과 일정의 한계 사이에서 선택하기가 참 힘들었답니다. 후기를 읽고 계신 여러분들은 어떤 연계 프로그램에 참여하셨을지, 전시는 어떠셨을지 궁금합니다. 아마 여러 가지 이유로 참여가 어려우셨던 분들도 계시겠지요? 아쉬우셨을 만큼, 부디 후기를 통해 전시장의 공기가 잘 가다을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요(갑자기 책임이 막중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다들 이번 전시 소개글은 읽어보셨지요. 각자 받은 인상이 다를 텐데요. 저는 워낙에 SF소설을 좋아합니다. 아직 오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와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세계와 다양한 관계를 상상해볼 수 있는.. 그런.. 벌써 무슨 말인지 헷갈리는 엉망진창의 애매모호함이 좋고, 꾸며진 혹은 익숙한 현실에 둔해져 있다가 실제 현실을 직시했을 때 느낄 수 있는 생경하고 그로테스크한 감각을 비틀어 깨워주어서 좋아해요. 특히 김초엽 작가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눈물을 한 바가지 쏟으며 읽었던 터라, 전시 공지글을 보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시공간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SF소설의 아이디어가 관통하는 전시이니 만큼, 전시에서 무엇보다 두드러지는 키워드는 ‘시간’이었습니다. 무려 20주년 아카이브 전시인데 ‘시간’이 부각 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지 물으실 수 있겠지만요, 단순히 운동 역사 기록으로서의 나열된 시간이라기 보다 그 시간을 두텁게 채워간 구체적인 얼굴들과 목소리들이 ‘정성스레’ 그득했달까요. 전시에서 보여주고, 들려준 ‘시간’은 분명히 전쟁없는세상 홀로 일궈온 무언가는 아니었습니다. 모순되게 들릴 수 있지만, 그래서인지 병역거부운동, 전쟁없는세상의 20년이 더더욱 입체적이고 선명하게 마음에 와닿았어요.

 

손때 뭍은 자료들이 켜켜이 쌓여있던 아카이브 테이블

손때 뭍은 자료들이 켜켜이 쌓여있던 아카이브 테이블

 

저는 전시장 중앙 아카이브 테이블과 김경묵 작가의 작품인 <5.25㎡>에 아주 오래 머무른 편인데요. 전쟁없는세상과 얽혀온 수많은 관계들의 웅성거림에 푹 빠질 수 있는 공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아카이브 테이블에 놓여있던 방대한 기록들의 글씨는 저마다 울렁거리며 여기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말하는 것 같았어요. 가볍게 훑고 돌아섰다가 다시 되돌아 꼼꼼히 읽어보기를 반복했습니다. 대체복무제도 도입을 위한 끊임없는 논의와 대응, 병역거부운동의 언어 확산을 고민하는 공청회‧세미나‧회의, 무기거래 감시 운동의 기록, 평화의 렌즈로 세상을 더 폭넓게 읽어내는 책읽기 모임의 글 등등… ‘군사주의에 반대하며 다른 세상을 꿈꿔온 이들의 고유한 질문들이 전쟁없는세상과 수십 년 간 만나며 어제와 다른 오늘을 만들어냈구나. 전시가 열리는 오늘도, 치열했던 과정 가운데 한 장면으로 남아 운동을 지속하게 하는 동력이 되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편으로 사람이 너무 이상적이고 추상적이라며 비아냥거리는 말을 골라 듣고 살아온 제게, 평화‧비폭력‧전쟁 반대‧군사주의 반대를 외쳐온 이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 그 존재들을 인식하는 것은 그 자체로 해방감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대개 ‘그렇게 해서 거친 세상 어떻게 살아갈래’라는 우려 섞인 말로 시작되는 일장 연설로 교정하려 하거나 평가하는 말들은 오히려 저를 매우 깊은 곳으로 침잠하게 만들곤 했거든요. 그 ‘거친 세상’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누군가가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거친 세상’이라면 그 세상이 진작에 바뀌어야 하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아카이브 테이블에 한데 모인 목소리들은 다른 존재에 대한 섣부른 평가보다, ‘거친 세상’을 만드는 조건과 규범을 고민하고, 그 세상이 밀쳐버린 존재들과 함께 만들 변화의 힘을 믿는 에너지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5.25㎡>는 2015년 병역거부로 인해 독거 수형생활을 했던 김경묵 작가의 시간을 VR 작업을 통해 재현한 작품이었는데요. 작품과 함께 놓여있던 두꺼운 옥중서신 묶음이 저를 붙잡더라고요. 누군가의 안부를 묻고, 다정하게 건네는 말들에 미소 짓다가도, 처벌 시스템의 한 가운데 놓인 개인으로서 털어놓은 감정을 마주하면, 한 글자 한 글자 조용히 듣고 느끼는 수밖에 없었어요. 군사주의-군대문화로 촘촘히 엮어진 한국 사회에서 병역거부는 ‘금기’를 위반하는 행위로 받아들여지고, 정상성을 따르지 않는 이에게 낙인과 처벌 중심의 선택지만을 강제하는 권력의 민낯이 서신에 고스란히 담겨있었습니다. 양심적 병역거부를 이유로 수형생활을 정당화하는 인식과 규범이 작동하는 한, 권리가 박탈된 채 징벌적 대체복무를 감내해야 할 또 다른 병역거부자들은 아마 계속해서 생길텐데요. 그러니 더더욱 병역거부자 한 명이 들려주는 목소리는 단순히 그의 경험으로만 그치지 않고, 나의 경험, 우리의 경험과 분리될 수 없음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정상성에 속하지 않거나, 규율을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쉽게 처벌하고, 수용시설에 가둬버리는 폭력적인 사회 구조와 규범에 결국 모든 사회구성원의 삶 면면이 연결 되어 있을 테니까요.

 

독방을 VR로 구현한 김경묵 감독의 작품을 체험하는 관람객

독방을 VR로 구현한 김경묵 감독의 작품을 체험하는 관람객

 

여성들, 사회의 타자들, 병역거부자들, LGBT들은 오로지 연대와 서로를 향한 격려를 통해서만 우리를 포함하는 세상을 창조할 수 있다._P.243 / 『병역거부, 변화를 위한 안내서』 中

 

위의 문구는 전시장 정면에 붙은 피켓에 쓰여있던 문구입니다. 전쟁없는세상을 사랑하는 여러분들이 그렇듯이, 저도 진심으로 차별과 폭력 없는 세상을 바라는데요. 여전히 배워나가고 깨져야 할 것 천지이지만, 페미니스트이자 활동가로서 바라는 세계를 점차 구체적으로 상상하다 보니, 무엇보다 누구와 연결될 것인지-관계의 중요성을 매 순간 깨닫습니다. 연대의 폭을 한정 짓는 순간 읽어낼 수 있는 세계도 편협해지고, 상상할 수 있는 저항의 방식도 좁아질까 경계하게 되어서요. 그런 차원에서, 전쟁없는세상이 병역거부자들의 시간을 포함해 정상성 중심의 사회 구조가 소외시켜 온 수많은 타자들의 시간을 교차적으로 포착하고자 직면한 질문과 성찰의 과정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게 되더라고요.

그렇게 병역거부운동, 전쟁없는세상의 시간을 채워온 수많은 관계와 목소리, 사려 깊은 질문들을 마음속에 묵직하게 담아낸 채, 병역거부운동과 전쟁없는세상의 시간, 한국사회의 시간, 개인의 시간을 묶어낸 연표를 천천히 되짚어보았는데요. 픽션으로 구성된 개인의 시간이었지만 제 삶의 어떤 장면과 겹치는 순간, 병역거부운동이 만들어 온 현재와 느슨하게 얽혀있던 순간들을 마주하며, 놓쳐왔던 사회운동의 시간은 열심히 기억에 담고, 병역거부운동과 전쟁없는세상이, 또 전쟁없는세상과 연결될 수많은 이들이 함께 채워나갈 빈틈의 시간들을 상상하고 기대하며, 전시장을 빠져나왔습니다.

 

연표

전시장 왼쪽 벽면을 가득 채운 연표는 병역거부운동과 전쟁없는세상이 걸어온 시간과 한국사회의 시간이, 그 시절을 살아온 다양한 개인들의 시간과 포개어져 있었다.

 

아고 할 말이 더 많긴 한데, 이미 넘치게 많은 말을 담아버렸습니다. 연계 프로그램에 관해 따로 말씀드리지는 못했지만, 정말 좋았답니다. 좋았다는 말로 다 표현이 되지는 않으나… 이만 줄여볼게요. 답장을 받을 수 없는 편지라 아쉽긴 하지만, 이 또한 가능성으로 가득한 틈새의 공간으로 열어둔다고 생각해볼게요. 그리고 제가 관심 있고 애정 하는 이들에게 질문이 많은 편인데요. 편지를 쓰며 떠오른 질문 몇 개를 적어두겠습니다. 20주년을 맞이한 병역거부운동과 전쟁없는세상은 앞으로 또 어떤 고유한 시간과 관계를 만들어가게 될까요? 전쟁없는세상의 시간과 얽힌 여러분과 저는 어떤 다른 하루들을 쌓아가게 될까요? 또 그런 하루들은 어떤 사회적 시간들을 만들어가게 될까요? 그 시간들은 우리가 상상하고 만들어갈 세상과 맞닿아있는 시간이려나요? 갑작스레 쏟아진 질문들에 당황하셨을까요.. 후기를 읽고 계신 여러분들이 답변을 떠올려주신다면 제가 멀리서 텔레파시로 대화를 시도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하튼.. 전쟁없는세상이 준비한 20주년 아카이브 전시에 대한 감상이 잘 전해졌어야 할 텐데요. 전시에 오며 가며 스쳐간 분들도, 참여하지 못하셨던 분들도, 후기로나마 만나 뵐 수 있어 무척 반가웠습니다. 무엇보다 20주년 아카이브 전시 준비와 진행 과정을 섬세히 돌봐온 모든 이들에 깊이 감사를 전합니다.

 

그럼 모두, 평화!

 

추신: 종종 이러이러한 생각을 하는 이들 N명만 있으면 어떤 세상이 될까, 라는 상상을 해보곤 하는데요. 전쟁의 논리를 옹호하고 수용하는 이들만 N명이 있다면 그 공간에는 군대와 군수 산업의 확장이 당연하겠고, 해당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은폐하고 정당화되는 폭력적인 인식과 규범들이 얼마나 가득할까요. 그러니 평화와 비폭력‧전쟁 반대의 선언이 실은 대단히 일상과 밀접하면서도, 주류의 가치‧규범들에 선명히 균열을 내는 정치적인 외침이자 실천임을 다시금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전쟁없는세상, 병역거부운동 20년을 함께 일궈온 모든 분들에 무한한 사랑과 지지를 보내며, 앞으로 만들어나갈 또 다른 “맴돌고, 회전하고, 비스듬하고, 느리고, 무모하고, 되돌아가는” 전쟁없는세상의 시간들을 저 역시 소중히 여기겠다고, 덧붙이는 말을 남깁니다.

 

진짜 안녕!

 

구지혜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