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라(영화제 노동자, 녹색당원)
평화단체 ‘전쟁없는세상’ 줄여서 전없세의 20주년 기념전시에 다녀왔다. 병역거부운동과 무기감시활동 등 지난 20여년간 한국에서 만들어온 반군사주의 활동을 총정리한 아카이브 전시이다. 제목은 ‘추신,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나는 전없세 활동가들을 보면 뭐랄까 경이로움을 느낀다. 20대 남성들의 병역거부운동으로 시작했지만, 여성활동가들이 없었다면 운동이 유지되지 못했을 것이라는 성찰의 시기를 보낸 후(감옥에 간 남성 병역거부자 동료들의 ‘옥바라지’를 하고 그 가운데에서 운동의 향방을 만들어낸 건 여성 활동가들이었다) 젠더에 상관없이 군사주의에 저항하는 운동을 엮어내기 위해 무기감시라는 핵심사업을 발굴해낸 곳. 전없세다. 평화의 외연을 확장하기 위해 최대한 많은 의제와 사람들을 만나려 했다. 동물권을 옹호하며 채식을 하는 내가 전없세의 후원회원이 된 시기는 전쟁없는세상이 전쟁과 비인간동물의 상관관계를 연재하기 시작하던 때와 맞물리기도 한다. 아카이브 전시에는 여성병역거부자에 관한 자료, 여성들이 말하는 반군사주의, 군대 내에서 동성애자를 향해 가해지는 폭력 등에 관한 자료와 행사기록이 주요하게 배치되어 있다. 실패를 인정할 줄 알고, 정보를 공유할 줄 알며, 경험을 전수하려 하는 시민단체는 한국에 전없세가 유일한 것 같다. 아니 20년 된 시민단체가 또 있나 싶고. 장수의 비결은 조직문화라는 것을 전없세를 보고 배웠다. 그래서 이곳을 후원한다. 지속가능성을 유의미하게 고민하는 평화단체가 장수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여성운동, 성소수자운동 등 다양한 의제와 평화운동의 접점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흔적들이 아카이빙 자료들에도 묻어나 있었다.
어릴 때부터 위계적인 상황을 납득하지 못했다. 내가 합의한 적 없는 위계에 굴복해야 한다는 게 늘 의문이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최선을 다해서… 개겼다. 심기를 건드렸다는 이유로 맞거나, 제일 어리고 약하다는 이유로 화풀이 대상이 되거나, 놀려도 되는 대상으로 점 찍혀서 조리돌림을 당하거나… 이 고리를 끊어내고 싶어서 집을 나왔고 과거의 인연들을 청산했다. 내가 겪은 폭력이 재생산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어른 된 지금 내가 잊지 말아야 할 삶의 목적이라고 생각하며 산다. 억울하고 힘들었던 건 나의 10대 시절이면 충분하니까.
전없세를 만나서 알게 된 것은 바로 그 납득 불가능한 일방적 위계의식이 전쟁 그리고 군사주의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탈핵-생태-페미니즘-퀴어-도시빈곤-평화-난민 등 모든 불평등문제와 혐오차별의 원흉은 전쟁이다. 혹은 전쟁과 닮아있다. 원칙이란 이름으로 긴장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질문을 금지하는 것, 오랜 세월에 걸쳐 쌓여온 공간과 이야기를 단번에 잿더미로 만드는 것, 기강을 운운하며 ‘정상성’에 부합하지 않는 존재를 낙오시키는 것… 군대에서 일어나고 군대에서 배우는 것들이다.
사람들은 전쟁에 겁을 먹고 전쟁을 끔찍해하지만, 전쟁을 한다. 정확히는 전쟁에 수반되는 것들을 긍정함으로써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방관한다. 무기를 사고파는 것에 그러려니. 영장이 나왔으면 입대를 해야지. 그러려니. 오로지 살인만을 위해 만들어진 제품이 무기이고 사람을 죽이는 방법을 가르치는 곳이 군대인데, 무기생산에 반대하고 병역을 거부한다고 하면 웃음거리가 된다. 세상물정을 모르는구나 하고.
전쟁에 반대하려면 나를 둘러싼 거의 모든 것을 배반해야 한다.
나의 친오빠는 직업군인이었다. 학사장교로 공군에 입대한 우리 오빠는 잠시간 ‘말뚝을 박았다’. 군인이던 시절 오빠는 자신이 대한민국 군인임을 자랑스러워했고, 직장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냈다. 직업인으로서의 군인은 규칙적인 생활과 나쁘지 않은 월급을 받는 사회인이었다. 한 지붕 아래(물리적으로는 따로 살고 있었지만… 대충..) 군대에서 일하는 사람과 군대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었던 격이다. 오빠에게는 내가 후원하는 단체가 어디인지 말한 적이 없다. 말할 수 없었다.
내 가장 친한 친구 A의 어머니는 방위사업청에서 근무를 한다. 얼마 전에 입사 30주년을 맞이하셨다. 나는 서울 용산구 후암동에서 나고 자랐다. 미군기지가 있는 동네이기도 하다. A의 어머니가 일하는 곳이 우리 동네에 있(었)다는 걸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군수물자를 조달하는 중앙행정기관, 방위사업청이 우리 집 바로 아래에 있다는 것은 알려고 하지 않으면 몰랐을 일이다. 무기산업은 말 그대로 코앞에 있었고, 내 친구의 가정을 먹여살렸다. 방위사업청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A의 어머니를 비난하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다. 그 사람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갈 뿐이니까. 그들 앞에서 무기산업에 반대한다고 뻔뻔하게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먹고 사는 문제이니까.
전쟁없는세상에 가입하던 때에 만나던 애인의 아버지는 고위직 군인이었다. 한동안 그분이 어떤 일을 하는지를 직간접적으로 듣게 되었는데 더 나은 군대를 만들기 위해 분투하는 사람이었다. 부대 내 환경을 개선해야 남자들이 병역기피를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내가 2년을 잡고 매달렸던 군대 내 채식선택권에 공감하는 분이기도 했다. 동시에 그는 평생 군인으로 길러졌고, 지금은 군대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일하는 사람이다. 내가 녹색당원이면서 전쟁없는세상의 회원인 것이, 우리 사이를 흥미롭게 했고 복잡하게 했다.
서울 마포구 망원동 한강공원에는 서울함공원이 있다. 지금 사는 집의 코앞에 있어서 강변 산책을 할 때마다 본다. 군대에서 사용하다 노후하여 수명을 다했다는 군함을 한강으로 가져와 띄워놓고 전시를 하는 것이다. 제주 서귀포시 강정동 연안에 사는 돌고래들은 강정 해군기지 주변을 도는 거대한 군함에게 매일매일 위협을 당한다. 위협하는 배가, 군대에 쓰이는 배가 어째서 낭만을 즐기러 찾는 한강변에 전시되게 된 것일까? 어린이 청소년 시절 내내 전쟁을 기념하는 곳으로 소풍을 가던 것이 떠오른다. 전쟁기념관의 탱크와 전투기 앞에서 찍는 기념사진은 이색적인 하루에 안성맞춤이었나보다. 전쟁을 기념하고 전시하는 것을 볼 때에 어떤 마음을 갖추어야 하는지는 배우지 못한 채로 말이다.

서울시민들이 많이 찾는 한강시민공원 망원지구에 전시되어 있는 서울함
이렇게나 전쟁이, 군대가, 군사주의가 가까이에 있다. 때로는 동의를 한 적도 없는데 집앞에 불쑥불쑥 들어서기도 한다. 나의 가족, 애인, 친구가 군대에 다녀온 적이 있는데 나는 그곳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잘 알지 못한다. 잘 알지 못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반대한다. 여성인 나는 군인(이었던사람들)을 위로해야 한다. 내가 보낸 것이 아님에도, 그들이 나를 지켜준 적도 없음에도. 군대로 인해서 일상이 폭력인데 누가 누굴 지키나.
병역거부자 친구들이 있다. 이들은 병역을 기피하는 게 아니라 거부한다는 것을 명확히 해야만 한다. 자신이 평화주의자임을 증명해야 한다. 보통 지난한 과정이 아니다. ‘당신의 가족이 살인을 당할 위험에 처했습니다. 당신은 살인자 앞에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당신은 어떻게 할 것입니까?’ 이런 식으로 궁지에 모는 질문을 하고 조금이라도 폭력성이 엿보이는 답변을 하면 평화주의자로서 실격을 당하는 구조이다. 그렇지만 나의 친구들은 어떻게 해서든 그 굴레에 저항한다. 어떻게 할 수가 없는 전쟁을 생각하면 속이 꽉 막혔다가도, 평화라는 이름의 언어를 만드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음에 안도한다.

전시장 중앙 아카이빙 테이블에는 <병역거부운동 여성활동가 인터뷰집>이 한구절씩 발췌되어 있었다.
군림하지 않는 것이 평화. “우리가 지지하거나 우리가 암묵적으로 묵인했던 이런 제도나 관습들이 전쟁으로 간다는 거를 볼 수 있는 사람들”(전시 동선이 시작될 때에 놓여있는 전없세 활동가 오리 님의 인터뷰 발췌문)이 만들어가는 평화를 앞으로도 따라가고 싶다. 때때로 먼저 질문하기도 하면서. 전쟁없는세상 20주년을 축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