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단(병역거부자)
전쟁없는세상 주:
대체역 심사위원회는 2021년 7월 16일, 병역거부자 나단(존칭 생략)의 대체복무 신청을 기각했습니다. 나단은 이후 대체역심사위원회의 결정에 대해 행정소송에 나섰지만 재판부는 사회주의는 헌법이 보호하는 양심이 아니라며 대체역심사위원회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한편 병무청은 나단에게 2021년 9월 6일까지 현역병으로 입영하라고 통지했고 나단은 9월 6일 행정소송의 결과와 관계 없이 병역거부를 이어가겠다는 뜻을 밝히며 병무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행정소송이 끝나고 병역거부 형사재판이 시작되었습니다. 다음 재판 기일인 8월 22일을 앞두고 재판에 임하는 심경에 대해 나단님이 글을 써주었습니다.
처음 대체역 편입 신청에서 기각되었을 때만 해도,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지 그리고 그 일들에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전혀 가늠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종교적 사유가 아닌 대체역 신청자 중에서는 첫 기각 사례인데, 이제 곧 처음 대체역으로 복무하신 분들이 민간인이 된다고 하니 조금은 부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지나간 시간이 아쉽기도 합니다.
그 시간 동안에 저는 두 번의 기각을 또 떠안아야 했습니다. 대체역심사위원회의 결정에 불복하며 제기한 행정소송 1심에서 재판부는 ‘헌법에서 보장하는 양심’이 아니라는 이유로 기각 결정을 내렸고, 이어진 2심에서는 1심의 판단에 더하여 다른 공권력에는 반대하면서 대체역만 용인하는 편협하고 편의적 양심이라며 기각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 정도면 제 양심을 일컬어 기각된 양심이라 해도 무리가 아닐 것 같습니다. 그사이 저는 입영을 거부하여 기소된 상태로, 지금은 형사재판을 통해 한 번 더 제 ‘기각된 양심’에 대한 판단을 기다리는 중입니다.
양심의 기각
대체역 제도는 ‘국방의 의무’와 ‘종교와 양심의 자유’라는 헌법적 가치의 조화를 위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신성한 가치들을 온전히, 또 조화롭게 보장하기 위해서는 일부 거짓된 양심을 걸러내어 제도를 악용하는 이들이 없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 양심은 걸러졌고 제 대체역은 제도의 악용을 막고자 기각되었지만, 사실 이 과정 전체는 대체역이라는 제도를 통해 이 나라가 인정하는 양심만을 걸러내는 과정, 즉 양심의 몰이해에서 비롯된 양심 그 자체의 기각, 대체역의 진정한 악용이라 볼 수 있습니다.
조사부터 심사까지 대체역심사위원회는 방향성과 목적이 뚜렷한 질문들을 이어왔습니다. 폭력에 대한 편협한 관점을 바탕으로 폭력의 상대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질문들이 제 답변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습니다. 오직 절대적으로 비폭력을 주장하는 사람만이 정당히 군대를 거부할 수 있고 대체역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 대체역심사위원회의 일관된 입장이었습니다. 행정소송의 재판부 역시 다르지 않았습니다. 판결문에 양심의 내용( 대체역심사위원회는 이마저도 충분히 평가할 수 있는 대상이라 하였습니다.)을 평가할 수 없다는 문구 한 줄만 적은 채, 재판부는 제 양심의 내용이 ‘절대적 비폭력주의( 대체역심사위원회가 재판시 사용한 단어입니다.)’가 아니기 때문에 심사에서 떨어졌다는 대체역심사위원회의 주장을 받아들였고, 그 주장과 입장에 기반한 심사 역시도 타당한 것이었다고 너무나 쉽게 결정을 지었습니다. 심지어 저의 사상이라 할 수 있는 ‘사회주의’가 ‘자본주의’,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대한민국에서 국방의 의무보다 앞서 보장되는 종류의 양심은 아니라고 하며 심사를 정당화하였습니다.
이 제도의 도입을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수감되고, 낙인찍히고, 고통받았는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혹여나 거짓을 이야기하고 양심을 속여서, 어렵게 얻어낸 작은 성과를 더럽히진 않을까 고민하며 그들에게 누가 되지 않기 위해서, 저는 정말 심사에 있어 최선을 다했습니다. 신청인들 가운데 누구보다 많은 수의 주변인 진술서를 받아 제출했고, 몇 달간 이어지는 대면/비대면 조사에도 성실히 임했습니다. 목적이 뚜렷한 질문들을 받고 심사위원회가 원하는 정답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고 있었음에도, 제 양심에 벗어나는 답변은 결코 하지 않았으며, 그래서 조사와 심사에서 대답한 내용들에는 어떤 부끄러움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양심의 올곧음이나 진실함을 증명하기보다는, 양심의 적절치 못함을 증명한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제 여러 다양한 양심을 인정함과 동시에 국방의 의무 역시도 수행한다는 대체역의 도입 취지는 희미해지고, 오직 절대적 비폭력만이 대체역을 수행할 수 있고, 절대적 비폭력만이 국가가 국방의 의무에 앞서 인정하는 유일한 양심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제 경험상 대체역심사위원회는 신청인이 어떤 주장을 하든지, 그들의 진술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며 이 주장이 사실인지 아닌지 밝힐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제 다양한 양심이 공존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절대적 비폭력이라는 주장만을 일관적으로 진술하면 오히려 대체역에 쉽게 통과될 수 있습니다. 불리한 증거와 내용들을 드러내기보다는 잘 숨겨서, 절대적 비폭력이라는 말 속에만 감춰두면 손쉽게 대체역을 수행할 수 있게 됐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했던 양심이나 대체역법의 도입취지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던 대체역심사위원회 스스로가 우려하던 상황을 만들어버렸고 재판부가 못을 박은 것입니다. 제가 받은 기각 결정은 결국 양심에 대한 기각 결정에 다름 하지 않습니다.
기각 당한 양심
많지는 않겠지만 다른 여러 양심과 신념은 대체역 신청에서 인정받았습니다. 비슷한 질문을 받고 비슷한 답변을 내놓은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여호와의 증인들은 종교적 신념으로 분류되어 큰 탈 없이 인정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교리의 내용에 대한 질문 같은 것은 없었을 것이며, 교리와 자유주의 간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오직 저의 신념, ‘사회주의’라는 단어만이 부정당하고 거부당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회주의자로서 약간의 자부심을 더 해 이야기하자면, 더 당연한 의미의 ‘자유와 평등’을 이야기하는 우리가 거짓으로 자유와 공정을 외치는 자들에게는, 사회주의가 지닌 근원적 폭력성을 이야기하는 심사위원에게서 크게 느낀 것처럼, 몸서리칠 만큼 싫을 존재들임이 증명된 것 아닌가 싶습니다.
심사와 재판은 치르면서 다시금 느끼는 것은, 양심은 법에 쓰여있기만 할 뿐 형체가 모호하다는 것, 법은 합리와 객관의 탈을 쓰고 있지만, 지극히 비합리적이고 주관적이라는 것입니다. 제게 지난 일련의 과정들은 양심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추상적이며, 법이라는 것이 얼마나 비합리적인지와 같은 모순을 온몸으로 깨우치게 해주었습니다. 모든 것은 제 선택이지만, 사회주의자로서 생각해보면 결국 이런 모순에 내 안위를, 그마저도 약간의 자유를 담보로 한 삼 년이라는 적지 않은 시간을 쉽게 기대려 했던 것은 아닌지 후회도 됩니다. 제가 있는 곳이 감옥이든, 대체역을 수행하는 공간이든, 군대든, 밖의 사회에서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억압의 고통과 불평등의 굴레에 갇혀 살텐데, 자신만을 생각하며 헛된 시간을 낭비한 것은 아닌지도 후회됩니다. 억울하다 생각도 들지만, 그사이 이태원에서 사람들이 인파에 밀려 죽었고, 지하차도에 물이 차올라 죽은 이들도 있습니다. 끌려간 군대에서 합리적이지 못한 명령에 휩쓸린 이도 있고, 성폭력 속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와 그를 은폐하려는 자들 역시도 보았습니다. 서 있는 곳이 어디든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느냐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