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승혁(전쟁없는세상 후원회원)

지난 11월에 열린 국제컨퍼런스 ‘양심적 병역거부, 진단과 모색’의 모든 프로그램에 참여해주셨던 김장승혁님이 후기를 보내주셨습니다. 후기는 11월 19일에 열린 ‘아시아의 병역거부’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병역거부’의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11월 18일 ‘대체복무를 돌아보며: 문제점과 개선점’의 내용이 궁금하신 분들은 전쟁없는세상 홈페이지에 올라온 발표자료를 살펴보세요.

세계 각국의 병역거부 활동가들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태국, 네팔, 튀르키예, 독일, 핀란드, 러시아, 이스라엘과 우크라이나까지. 그야말로 전례 없는 규모의 병역거부 컨퍼런스가 한국에서 열린 거지요. 20주년을 맞이한 전쟁없는세상과 함께 국경을 넘나들며 연대하는 활동가들이 머리를 맞대고 대안과 실천을 모색하는 자리였답니다. 서로의 활동과 상황을 공유하고, 함께 할 수 있는 방법과 계획을 나눴어요.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 병역거부운동의 의미와 역할을 되돌아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구체적인 행동과 운동의 방향을 생각해 볼 수 있었지요.

지난 11월 19일 참여연대에서 열린 ‘양심적 병역거부, 진단과 모색’ 국제 컨퍼런스

지난 11월 19일 참여연대에서 열린 ‘양심적 병역거부, 진단과 모색’ 국제 컨퍼런스

아시아의 병역거부 운동들

태국 병역거부자 네티윗이 먼저 이야기를 꺼냅니다. 태국에서 병역거부를 선언한 건 네티윗이 최초라고 해요. 태국에서는 초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군모 비슷한 걸 쓰게 한대요. 학생들에게 군사 문화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과정인 거지요. 군부의 힘이 건재한 태국에서는 이런 일상적 통제와 폭력이 만연해 있다고 해요.

태국에서 징병 여부는 제비뽑기로 결정된대요. 하하, 더 이상 신성한 국방의 의무가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겠지요. 군인이 된다는 게 명예로운 일이라고 아무리 강조하고 주입해도 다들 군대에 가는 걸 끔찍하게 생각한다는 거예요. 네티윗이 제비뽑기하는 영상을 보여줬는데, 군입대를 뜻하는 검은색 제비를 뽑은 사람은 아주 쓰러지고 난리가 납니다. 아무튼 이런 상황에서 병역거부를 선택한 네티윗은 군부는 물론 자국민들한테도 위협을 받고 있다고 해요. 많은 태국 사람들이 병역을 이행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지만, 네티윗의 병역거부가 용납될 수 없는 행위로 받아들여진다는 건 군사주의가 군대뿐만 아니라 일상의 영역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걸 보여줍니다. 병역을 이행하지 않은 사람도 얼마든지 군사화될 수 있다는 거죠.

다음으로는 튀르키예에서 온 메르베가 자국의 상황과 활동을 소개합니다. 튀르키예는 유럽평의회 회원국 중 유일하게 병역거부권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고 해요. 대체복무제도도 없는 데다가 병역거부자는 ‘기피자’로 분류되어 감옥생활은 물론 교육, 정치참여, 고용과 같은 일상생활에서 심각한 차별을 당한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은행 계좌까지 몰수한다고 해요. 정부가 병역거부자로 지목한 순간부터 끊임없는 검열과 통제를 마주해야 한다는 거죠.

이렇게 병역거부자를 처벌하고 감시하는 튀르키예에서 군대는 단순히 ‘안보’나 ‘평화’를 유지하는 기구가 아니라 일상을 규율하고 제어하는 통제장치가 되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튀르키예의 병역거부자들은 고립되지 않은 채 끊임없이 저항의 공간을 꾸려 나가고 있습니다. 2019년 튀르키예 정부는 병역거부에 대한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면서 일정 금액을 납부하면 군 복무 기간을 단축해 주는 완화책을 펼치지만, 메르베가 활동하고 있는 COW(Conscientious Objection Watch)와 같은 단체에서는 이런 제도나 인정을 거부하고 병역거부운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상황을 전하러 온 오르는 일상화된 전쟁 속에서 병역거부가 지니는 의미에 대해 이야기해 줍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문제는 흔히 역사적 맥락에서 누군가의 책임을 묻는 방식으로 진행되어 왔지요. 그러나 오르는 전쟁을 막기 위해서는 개인의 책임이나 구성된 담론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문제에 주목해야 한다고 합니다. 전쟁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과 구조, 그러니까 단일한 세력이 억지력을 갖춤으로써 평화를 이룰 수 있다는 군사주의적 가치관 자체에 대한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는 거죠.

오르의 문제의식은 군사주의에 기반한 사회가 작동하는 방식을 꼬집습니다. 권력을 가진 정치인이나 행정가 같은 사람들이 독립적으로 전쟁을 유지하고 이용한다기보다는, 군사주의와 그에 기반한 가치체계에 동의하는 대중들이 자발적으로 전쟁과 살상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을 마련한다는 거죠. 이렇게 될 때 군사주의는 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개개인을 경유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고 통제하는 과정 속에서 나타난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이러한 점에서 오르는 이스라엘의 교육을 비롯한 군사주의적 가치관이 생산되는 과정을 지적합니다. 이스라엘에서는 교실에서 총을 보는 게 일상화되어 있다고 해요. 연병장을 닮은 운동장, 교사와 학생의 수직적 관계 같은 모습은 한국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지만, 이스라엘에서는 그 정도가 훨씬 더 심합니다. 학교에서의 군사교육은 물론 사회 곳곳에 전쟁을 매개로 하는 질서를 당연시하는 인식이 팽배하다고 해요. 오르가 보여준 “낙태 한 명 할 때마다 군인이 한 명 죽는 것이다”, “진짜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병역을 기피하지 않는다”는 신문광고가 문제없이 받아들여진다는 데 놀랐습니다. 개개인을 한 명의 군인으로 간주하면서, 이런 가치관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에게는 배신자라는 낙인은 물론 직접적인 차별과 배제가 이루어진다고 해요. 이런 상황에서도 꿋꿋하게 병역거부운동을 이어가고 있는 오르를 통해 운동의 이유와 필요성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네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저항하는 병역거부 운동

가택연금 중인 우크라이나의 유리는 화상으로 회의에 참여했어요. 평화주의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는 유리는 전시의 병역거부 지원과 상담이 우크라이나 정부의 입장에 반한다는 이유로 기소되었다고 해요. 러시아의 침공을 규탄하는 활동이 오히려 러시아를 옹호하는 주장으로 둔갑한 거죠. 어떠한 전쟁에도 참여하지 않겠다는 유리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끝내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바로 병역거부라고 이야기합니다.

비폭력을 통해 전쟁을 중단시켜야 한다는 유리의 관점은 평화와 안보를 구축하는 다른 방법을 제시합니다. 강력한 군사력을 통해 ‘적’을 제압함으로써 특정한 사람들만이 ‘평화’를 향유하는 폭력적인 방식에서 벗어나 모두를 위한 평화, 서로가 서로를 죽이지 않는 공동체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는 거죠. 군사 문제와 같은 위협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을 관통하는 직접적인 문제들을 확장시켜 안보를 인간 안보, 사회적 안보와 같은 범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거예요. 이상적인 생각으로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변화는 깜짝쇼처럼 하루아침에 나타나는 게 아니라 점진적인 흐름 속에서 차차 이루어지는 과정일 테니까요.

 

우크라이나의 병역거부운동을 소개하고 있는 유리 셸리아젠코

우크라이나의 병역거부운동을 소개하고 있는 유리 셸리아젠코

 

러시아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나탈리아와 타라스는 SNS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직접적인 활동이 어려운 상황에서 매체를 통해 러시아의 상황을 알릴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한 거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병역거부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관심이 급격하게 늘어났다고 해요. 군사화된 사회인 러시아에서 병역거부를 이야기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위험한 일이기 때문에 항상 조심스럽게 행동한다고 합니다. 이번 전쟁을 ‘우크라이나 전쟁’이라고 부르는 것도 위험하다고 하네요. 나탈리아는 안전한 공간과 서로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안전한 활동이 가능하다고 강조합니다.

나아가 단일 국가에 국한된 문제는 없다는 점에서 국제연대의 필요성을 언급하기도 했어요. 목숨을 걸고 활동하는 사람들이 있는 상황에서 소통과 지원, 보호막이 되어 줄 사람들이 꼭 필요하다고 해요. 전쟁을 특정 민족이나 국가의 문제로만 여길 수는 없겠지요. 가시적인 측면에서만 논의의 당사자를 설정한다면 사회 전반을 가로지르는 문제에 대한 성찰은 어렵게 될 테니까요.

질의응답 시간, 우리가 우크라이나의 병역거부자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알려달라는 질문에 유리는 우크라이나 병역거부자들의 인식 제고를 위한 캠페인 지지와 모금활동을 부탁합니다. 어쩌면 미미한 일로, 당장은 커다란 변화를 이루어내기 어려운 활동으로 여겨질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병역거부운동은 한 번의 변화로 사회를 완전히 바꿀 수 있다고 주장하는 운동과는 거리가 멀지요. 우리의 운동은 장기적인 관점을 통해 점진적이면서도 실질적인, 나아가 불가역적인 변화를 이루어내고자 하는 운동이라고 할 수 있을 테니까요.

국경을 넘어 연대하는 활동가들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흔히 ‘국제 문제’로 언급되는 ‘다른 세상 이야기’를 눈앞에서 마주하고 있으니 “아, 이건 나랑 관계없는 문제가 아니구나” 싶은 생각이 들더군요. 자, 그러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걸출한 인물이나 이념으로 무장된 ‘투사’가 아닙니다. 감옥도 가고, 항상 싸우고 있기는 하지만, 서로 놀리며 웃기도 하고 매운 음식을 먹다가 헥헥대기도 하는 서투른 사람들이지요. 당연히 ‘뿔 달린 사람’도 아니구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영원한 승리의 길을 찾는 노력이라기보다는 일상을 비롯한 ‘작은’ 일에서부터 실천해 나가며 변화를 위한 동력을 마련하는 것이겠지요. 작지만 강렬한 변화들에 기대를 걸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