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서영(경향신문 국제부 기자)
‘전복에서 살아남은 로힝야 생존자들은 선장이 소녀들을 강간하고 의도적으로 배를 침몰시켰다고 말한다’, ‘로힝야 난민 180명을 태운 배가 사라졌다’, ‘인도네시아, 전복된 로힝야 난민선에서 시신 추가 발견’, ‘로힝야 난민 증가 배경엔 인신매매가 있으리란 의혹’…
최근 외신이 전한 미얀마 로힝야의 소식이다. 로힝야의 이야기는 때로 기사 가치를 판단하기 어려울 정도로 자주, 참담하게 전해져 온다. 참상의 규모나 깊이로만 보면 매일 긴급하게 타전해도 될 만한 뉴스지만 빈도가 너무 잦기에 오히려 매일 전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로힝야의 처지가 나아졌다는 기미는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아 더욱 참담함을 더한다.
이러한 로힝야 소식은 흔히 ‘사태’로 명명된다. ‘로힝야 위기’, ‘로힝야 문제’ 같은 표현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던 중 로힝야족이 처한 현실을 ‘제노사이드’라고 명확히 규정한 책을 만났다. 국제분쟁전문 저널리스트 이유경이 저술한 <로힝야 제노사이드>다. 이 책에서 저자는 ‘지구상에서 가장 박해받는 민족’, ‘전세계에서 가장 큰 무국적 집단’ 등으로 불리는 로힝야 사람들이 겪었던 차별과 고난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미얀마의 로힝야에 대한 연구와 보고서는 많지만 한국어로 된 책을 접하긴 쉽지 않다. 더군다나 로힝야와 밀접한 현장에서 직접 길어올린 글은 한국에선 저자의 보도를 제외하면 사실상 없다시피 하다. 그렇기에 국제부에서 동남아 지역을 담당하는 기자이자 동남아 지역학 석사 과정을 이수 중인 학생으로서 이 책을 반갑게 집어들었다.
<로힝야 제노사이드>는 제목이 본문의 핵심을 전부 담고 있다. 오래도록 로힝야를 밀접히 들여다 본 저자 이유경은 로힝야 이슈를 서술함에 있어 ‘제노사이드’를 다른 표현으로 번역하기보다는 그대로 쓰기를 택한다. 그 이유가 있다.
본문을 소개하자면, 제노사이드는 ‘종족’을 뜻하는 그리스어 ‘genos’와 ‘살해’를 뜻하는 라틴어 ‘cide’의 조합이다. 제노사이드 개념을 최초로 고안한 유태계 폴란드 법학자인 라파엘 렘킨은 제노사이드를 “어떤 민족 그룹의 말살을 목표로 한 여러 행위를 체계적으로 가함으로써 그 민족 그룹의 필수적 생활 기반을 의도적으로 파괴하는 것”으로 정의했다. 이는 1940년대 나치 독일이 가한 유태인 대학살(홀로코스트)와 오스만 제국 시기 발생한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을 염두에 두고 탄생한 용어다. 이후 ‘제노사이드 방지협약’이 채택되며 제노사이드는 단순한 언명에 그치는 것이 아닌 국제법상 범죄 행위가 됐다.
저자 이유경은 그동안 로힝야 관련 기사를 쓰며 ‘대학살’, ‘대량살상’, ‘인종청소’ 그리고 ‘제노사이드’를 혼용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앞의 세 표현은 제노사이드의 최종 단계인 범죄 ‘규모’에만 무게를 싣는다는 한계를 느껴 이번 저서에선 제노사이드의 ‘과정’에 보다 주목하고자 ‘제노사이드’란 용어를 일종의 고유명사처럼 있는 그대로 쓰기로 했다.
그렇다면 제노사이드의 ‘과정’이란 무엇일까? <로힝야 제노사이드>는 제노사이드 전개 수순을 설명하기 위해 10단계론과 6단계론을 소개한다. 10단계론은 제노사이드 학자 그레고리 스탠톤이 고안한 틀로, 유엔과 국제사회가 주로 채택했다. 분류, 상징화, 차별, 비인간화, 조직화, 양극화, 폭력을 가할 준비, 박해, 절멸 그리고 부인을 통해 제노사이드가 진행되고 완성된다는 이론이다. 또 다른 설명은 다니엘 파이어스타인이 내세운 6단계론이다. 저자는 이 6단계론이 로힝야 사례에 보다 적합하다고 보고 구체적으로 서술을 더한다.
본 단락에선 저자의 설명과 해석을 인용 및 요약하겠다. 6단계론의 제 1단계는 낙인찍기와 비인간화다. 로힝야를 ‘불법 벵갈리 이주민’으로 명명하고 미얀마 고위 인사와 저명한 정치인들이 반무슬림 정서를 동원해 로힝야를 낙인찍은 것이 이 단계에 해당한다. 제 2단계는 물리적·심리적 괴롭힘과 폭력, 체포, 구금, 투표권 제한, 민권 박탈과 테러를 가하는 단계다. 이 모든 세부 사항이 로힝야 사람들에게 빠짐없이 적용됐다. 제3 단계는 고립과 격리를 통한 분리 단계다. 여러 차례의 폭력 사태와 대규모 축출을 겪으며 미얀마 안팎에서 본래의 커뮤니티와 단절된 로힝야 사례야말로 이 단계를 명백히 거쳤으며 현재도 지나고 있다. 제 4단계는 보호대상 그룹을 체계적으로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영양실조 등을 통한 신체 파괴 유발, 고문, 간헐적 살해, 모욕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제 5단계는 대량 살상이다. 2016~2017년 로힝야가 겪었던 것과 같은 대규모 살상을 통한 절멸이 드러나는 단계다. 마지막 제 6단계가 보호대상 그룹을 역사에서 지우는 것이다. 보호대상 그룹을 물리적·상징적으로 사라지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개념 정의에 비춰봤을 때 미얀마에서 군부에 의해, 민주세력에 의해, 국민들에 의해 집단적·체계적·장기적으로 행해진 탄압과 박해를 제노사이드로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 저자의 판단이다.
다만 국제법상 제노사이드에 해당하는지를 판단할 때 ‘의도’를 증명하기가 늘상 까다롭다는 점이 ‘로힝야’에 ‘제노사이드’를 갖다붙일 때면 늘상 걸리는 지점이다. 이때 미얀마 정권이 로힝야를 상대로 공식적·비공식적으로 행한 반인권적 행태, 예를 들면 산아제한, 결혼 허가, 이동의 자유 제한, 강제 이주 및 송환,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비인간화 작업 등을 떠올린다. 이렇게 보면 로힝야족은 절멸을 위한 기획 속에서 저자의 표현대로 ‘느린 죽음’을 향한 삶을 살고 있다.
항상 의아했던 것은 ‘아웅산 수지를 위시한 미얀마 민주진영조차 왜 로힝야를 포용하지 못할까’였다. 2021년 2월1일 쿠데타가 발발한 이후 나는 국내외에서 여러 미얀마 청년과 활동가, 난민을 인터뷰했다. 이들은 대부분 아웅산 수지가 이끄는 민족민주동맹(NLD)을 지지했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나와 이야기하면서 아웅산 수지를 언급하는 대목에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중 일부만이 2016~2017년 로힝야 학살은 아웅산 수지의 실책이라고 먼저 인정했던 것이 기억난다. 이를 보며 아웅산 수지 개인의 성격이나 성향을 둘러싼 세평은 차치하고라도, 미얀마의 민주 성향 정치인들조차 덫에 빠져든 이유를 알고 싶었다.
미얀마 정치와 사회에서 군부가 차지하는 존재감을 빼놓고는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 <로힝야 제노사이드>에는 종교, 역사, 젠더, 민족 등으로 얽힌 로힝야 이슈를 미얀마 군부가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갈라치기했던 세월이 담겨 있다. 그 악랄한 기획 속에서, 군이 국가 요직을 보장받고 상하원 의석 4분의 1을 자동으로 가져가는 미얀마의 정치구조 속에서 민주진영의 운신의 폭이 좁았으리란 점은 참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 역시 ‘반로힝야’, ‘반무슬림’ 정서에 손쉽게 휘둘리고 때로는 방관하며 편승했다는 비판은 피해갈 수 없다.
2021년 2월1일 민아웅 흘라잉 총사령관이 쿠데타를 일으킨 이후 로힝야 사람들의 삶이 더욱 진창에 빠졌으리란 점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최근 외신 보도를 보면, 미얀마 군부가 징병법을 발동하며 로힝야 남성들을 우선 징집하고 있다는 의혹이 나오고 있다. 지난 수십년 동안 국적과 신분증조차 내주지 않았던 미얀마 군부가, 그 어떤 직업보다도 엄격히 걸러서 선발해야 하는 ‘군인’을 논리상 ‘외국인’이며 서류상 ‘없는 존재’인 로힝야 사람들로 채우는 우스꽝스러운 모순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야말로 정권의 필요에 따라 로힝야를 마구잡이로 대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요즘은 ‘쿠데타 사태 종식 이후’의 미얀마를 종종 상상한다. 쿠데타 이래 ‘반군부’란 기치 하에 관찰되는 약자들 간의 연대가 과연 언제까지 이어질지 궁금하기 때문이다. 현재 미얀마는 반군부 진영이 군부에 무력 저항하고 있는 내전 상태다. 미얀마 내 각종 소수민족 무장단체(EAOs)가 전례없이 손을 맞잡은, 이전의 쿠데타에서는 기대하기 어려웠던 모습이 ‘덕분에’ 펼쳐지고 있다.
마침 지난 5월7일 미얀마 서부의 상황을 다룬 AP통신 보도 중 한 대목이 눈에 띄었다. “아라칸군(AA)과 관련된 라카인 민족주의자들도 로힝야족을 박해하는 자들 중 하나였지만, 이제 아라칸군과 로힝야족은 군부에 반대하는 ‘불편한 동맹’이 됐다”는 문장이었다. 여전히 로힝야족에 가해지는 박해에 비하면 여기서 말하는 ‘불편한 동맹’의 실제 협력이란 아주 미미한 수준일 것이며 어쩌면 단지 반군부 대립 구도를 전한 기자의 레토릭뿐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 한 문장은 나로 하여금 ‘봄 혁명 이후’의 로힝야를 상상하게 했다. 지난 1월 태국 매솟에서 만난 여러 민족 출신의 미얀마 난민들은 봄 혁명의 목표를 물었을 때 ‘진정한 연방제 민주주의’를 답했다. 짐작컨대 어떤 민족 출신인지에 따라 ‘연방제’와 ‘민주주의’에 각각 실리는 무게가 다를 듯하다. 이 봄 혁명이 언젠가 이들의 바람대로 성공을 거두고 나면, 혁명에 동참했던 집단들은 자연스레 각자의 몫을 기대할 것이다. 각각이 생각하는 ‘미얀마 연방 공화국’이 어떤 모습일지는 아직 모른다.
확실한 건 봄 혁명 이후의 미얀마는 사실상 제2의 건국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미얀마라는 국가를 형성함에 있어 어떤 민족은 인정하고 어떤 민족에겐 이름을 딴 주를 줄 것인지를 결정했던 1948년 안팎의 혼란상이 다시 그려질 것이다.
그때 로힝야는 어떻게 될 것인가. 민주적으로 선출된 망명정부인 국민통합정부(NUG)는 2021년 ‘NUG의 로힝야 정책’을 발표해 로힝야 시민권 부여를 약속했다. 이 약속이 과연 지켜질 것인가? 이는 봄 혁명이 언제 어떻게 끝맺어질지도 가늠하기 어려운 현 시점에 너무 어려운 질문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이 질문은 결코 이르지 않다. 저자 이유경은 “작은 차별과 낙인이 제노사이드로 이어진다는 점”과 더불어 “국가·정부·정치 지도자·공동체 지도자가 특정 집단 혹은 어떤 개인을 차별해도 된다는 신호를 끊임없이 보내고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사회라면 훗날 대가를 치를 것”을 로힝야 사례를 통해 논증하는 동시에 경고했다. 이것이 우리가 봄 혁명이 미처 끝나지도 않은 현재 ‘봄 혁명 이후의 로힝야’를 미리 고민해두어야 하는 이유다.
*[평화를 읽다]는 전쟁없는세상 블로그에서 전쟁과 평화에 대한 책 서평을 모아 놓은 꼭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