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재욱(열린군대를위한시민연대 활동가)
이게 진짜일 리 없어
책에 나오는 하나의 이야기로 시작하자. 책은 총 4부로 이루어져 있다. 한 부가 끝날 때마다 ‘함께 고민하고 말하고 싶어’라는 제목 아래 여러 질문을 던진다. 이 이야기는 2부 ‘한국 사회는 전쟁에 어떻게 연결되어 있나’에 붙어 있는 이야기-질문이다.
어슐러 K. 르 귄의 소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에 등장하는 오멜라스는 풍요로운 유토피아다. 그 풍요는 한 소녀의 고통에 기반해 유지된다. 오멜라스의 주민들은 그 소녀가 고통 받고 있음을 알지만 소녀를 구하지 않는다. 소수의 사람들은 소녀를 두고 볼 수도, 풍요를 망칠 수도 없어 오멜라스를 떠난다. 그리고 저자는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 같나요? 왜 그렇게 할 거라고 생각하나요?
난제도 이런 난제가 없다. 선택지는 세 개다. 1. 소녀를 구하고 유토피아를 포기한다. 2. 유토피아를 유지하기 위해 소녀를 모르는 척 한다. 3. 오멜라스를 떠난다. 나는 이 질문이 어떤 절대선에 가까운, 굉장히 높은 도덕적 수준을 말한다고 느꼈다. 가령, ‘나는 아이폰을 쓴다. 아이폰은 중국 공장에서 극심한 노동 착취를 통해 만들어진다.[1] 그렇다면 나는 아이폰을 쓰지 말아야 하는가?’ 같은. 이런 상황은 현실에 너무 많이 일어나고 있다. 많은 이들이 두 번째 선택지, 즉 ‘알면서 모르는 척’ 하며 살아간다. 나 역시 그렇다. 그리고 그 태도는 ‘정말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어’에서 서서히 ‘현실이 원래 그런 거야’라고 변해간다. 그렇게 그 태도는 진짜 현실이 된다.
첫 질문부터 막막했다. 다행히 다음 질문이 있었다. 두 번째 질문을 요약하면 이렇다. ‘한국은 전쟁 무기를 많이 파는데, 만약 한국 사람으로서 누리는 풍요가 전쟁 중인 다른 나라에 한국이 판 무기로 죽어가는 사람들 때문이라면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더 구체적인 맥락이 주어진 이 질문을 읽고, 페이스북에서 백승덕 님(징병문제연구소 ‘더나은헌신’ 연구활동가)이 인용한 문장을 떠올렸다.
부정의한 구조에서 혼자 빠져나오는 건 불가능하지만 정의로운 구조를 함께 짓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미류, “에어컨으로 시험에 든 기분이라면”, 한겨레, 2024.8.19)
오멜라스를 떠나 도착한 곳에도 ‘부정의한 구조’가 기다리고 있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 물론 여기도 낙원은 아니다. ‘정의로운 구조를 함께 짓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두 알고 있다. 그래도 오멜라스의 난제보다는 훨씬 ‘현실적’이다. 여기서 ‘현실적’이란 앞서 언급한 ‘원래 그렇지’가 아니라, ‘정의로운 구조’를 현실에서 만들어가기 위해 힘껏 상상하고 노력하는 것을 뜻한다. 만약 이 책을 처음부터 순서대로 읽었다면, 독자들은 아마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몇 가지의 답이 떠올랐을 것 같다(아니면 어쩔 수 없지만…). 나는 바로 직전에 나온 내용이 생각났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고 있는 러시아나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를 공격하는 이스라엘에서 “나는 전쟁에 반대한다.”고 외치는 병역거부자 100명이 등장했다고 생각해 보세요. 이 병역거부는 정말로 전쟁을 멈출 수도 있습니다. (『전쟁 없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112쪽)
이 책은 전쟁과 파괴가 상존하는 현실에서 ‘전쟁 없는 세상’이라는 ‘정의로운 구조를 함께 짓기’ 위한 여러 상상의 재료들을 제공한다. 앞서 소개한 각 부마다 딸려 있는 ‘함께 고민하고 말하고 싶어’의 질문은 제목 그대로 함께 상상하자 초대하는 질문들이다. 질문은 굉장히 날카롭다. 으레 붙인 말이 아니다. 평화운동을 그럭저럭 6년 넘게 해온 입장에서 책의 여러 주제가 다소 익숙한 내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곰곰히 생각해보게 되는 질문들이었다. 잘 구조화된 질문들이기도 하다. 가령 1부에 붙은 질문에서 첫 번째 질문은 실제 ‘3개의 전쟁이 일어난 원인 3가지를 적는 것’이고, 연결되어 있는 일련의 질문 중 마지막은 ‘어떤 평화행동을 해보고 싶은지’다. 워크숍이나 평화교육에 활용해도 좋겠다. 이 질문들을 먼저 읽고 본문을 읽는다면, 딛고 선 ‘현실’을 좀 더 치밀하게 인식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 책의 많은 소제목 또한 그 ‘현실’이 진짜냐고 되묻는 질문으로 이뤄져 있다. ‘전쟁은 인간의 본성이다?’, ‘인간은 원래 폭력적인 본성을 가졌다?’,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 ‘승리와 평화는 같은 말일까?’, ‘한국은 전쟁 피해국가인가요?’, ‘침략당한 나라에는 무기를 지원해야 하지 않나요?’, ‘한국은 아직 전쟁 중이지 않나요?’, ‘여자도 군대에 가는 게 평등일까요?’, ‘폭력적인 게임을 하면 폭력적인 사람이 되나요?’ 등등. 제목만 봐도 정말 흥미진진하지 않나요? 읽어보고 싶지 않나요? (샀노라, 읽었노라, 전쟁없는세상 가입했노라!)

『전쟁 없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 표지
도망친 곳에서
글에 ‘현실’이라는 말을 너무 많이 써서 하는 말이지만, 최근의 나는 사실 현실주의자에 가까운 것 같다. 뭔가 인용할 만한 게 있을까 싶어 서론과 결론, 에필로그만 읽은 책(결국 인용은 못했다)은 현재 거의 불가역적으로 파탄이 난 한반도 평화 상황에서 국제정치학의 현실주의적 접근[2]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한다.
결국 대안은 현실주의적 패러다임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핵보유국 북한과 공존할 수 있는 ‘공포의 균형’을 군사적 측면에서 구축하고, 군비통제 협상을 통해 핵을 머리에 이고도 안정적으로 남북관계를 운용할 수 있는 외교적 위험 관리 방안을 주변국들과 함께 모색해야 한다. 당연히 이러한 해법은 불만족스러우며 정치적으로도 올바르지 않다. 핵균형 속에서도 늘 전쟁의 위험은—의도된 계획이든, 인간적 실수에 의한 것이든—상존할 것이고, 남북한 모두에서 안보 논리의 우위 속에 자유와 인권 이상의 실현을 지연될 것이다. ( 차태서, 『30년의 위기』,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24, 366쪽)
많은 부분 동의한다. 일단 현상 유지라도 하면 좋겠지만, 그것조차 힘겨워 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안보 논리의 우위’라는 말 앞에선 여전히 꺼림칙함이 남는다. 다시 오멜라스로 돌아가자. 저자는 탁월하면서도 쉽게 읽히는 서평을 거의 ‘서평제조기’처럼 생산하기 때문에 당연히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에 대한 서평도 썼겠다 싶었다. 역시는 역시다. 단체 블로그가 이렇게 ‘고퀄’이어도 되나 싶은(그래서 부러운) 전쟁없는세상 블로그에서 서평을 발견했다. 저자는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을 읽고 성주 소성리에 배치된 사드를 떠올렸다.
내가 아닌 그 누군가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음에도 나 대신 고통스러운 풍경을 항상 마주하며 산다. 얼마 전 있었던 전쟁없는세상 평화캠프는 대추리 평화마을[3]에 있는 평택평화센터에서 열렸다. 캠프 프로그램 중 하나로 신종원 이장님의 대추리 역사관 투어가 있다. 나는 이런저런 기회로 몇 번이나 들은 이야기였는데, 사실 레퍼토리는 비슷했다. 들었던 이야기라고 해도 항상 이장님의 말과 표정, 한숨에 익숙해지긴 쉽지 않다.
오멜라스를 떠난 사람들의 마음도 그럴 거라 생각하고 싶다. 꼭 엄청난 무언가를 하지 않더라도, 자신이 ‘떠나온 현실’과 동시에 자신의 ‘떠남’을 잊지 않는, 그 ‘꺼림칙함’을 놓지 않으며 살아가고 있을 거라 믿고 싶다. 책의 말미에서 저자는 영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이야기하며 전쟁에 참여하기 싫어 도망 다니는 ‘겁쟁이’ 하울이, 폭력을 두려워할 줄 알았기에 오히려 ‘용감’하다고 말한다.(『전쟁 없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199-200쪽) ‘용감’이라는 수식에 다소 거북함을 느끼면서도, 스스로의 ‘떠남’을 잊지 않고 성찰하는 태도야말로 힘껏 노력해야만 가질 수 있는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전쟁과 평화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 끝에 이와 같은 태도를 언급하며 책을 마무리하는 것 역시 이 책의 귀중한 미덕일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부러우면서도 대단하다고 느낀 것은 저자 자신이 속한 단체의 이름을 책 제목에 넣으며 개인 책 홍보와 단체 홍보라는 일타쌍피의 업적을 이뤄낸 기세다. ‘열린 군대를 만들고 싶어’란 제목은 조금 애매해서 아무래도 어려울 듯 싶다…
각주
[1] 아이폰과 노동착취에 대한 내용은 다음 책에 나온다. 제니 챈·마크 셸던·푼 응아이 지음, 정규식·윤종석·하남석·홍명교 옮김, 『아이폰을 위해 죽다』, 나름북스, 2020
[2] 현실주의적 접근은 거칠게 말해, 국제정치의 행위자를 국가로 보고, 국가가 어떤 선한 가치가 아니라 오로지 ‘국익’만을 위해 행동한다는 것을 가정한다
[3] 대추리는 2000년대 중반, 현재 평택 미군기지 건설 과정에서 강제수용되었던 마을이다. 2007년, 마지막 남았던 주민 44명이 대추리를 떠나야만 했고 현재 평택시 팽성읍 노와리에 있는 현재의 대추리 평화마을로 이주했다
전쟁없는세상 주: 전쟁없는세상 이용석 활동가의 새 책 『전쟁 없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 북토크가 9월 9일(월) 오후 7시-9시 마포출판문화진흥센터 플랫폼P 2층 다목적실에서 열립니다. 전쟁없는세상 운영위원이자 피스모모 활동가인 뭉치의 사회로 저자 이용석 활동가와 김중미 작가가 이야기를 나눕니다. 북토크 신청은 여기를 클릭해주세요! (이 글의 대표 이미지는 BTS의 <봄날> 뮤직비디오 한 장면을 캡처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