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원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 활동가)
제주 곶자왈에는 서늘한 바람이 분다. 나무는 울창했고 분출된 용암이 굳어 만들어졌다는 땅은 토양이 적고 단단하게 느껴졌다. 숲해설사가 곶자왈 곳곳에 있는 구덩이를 가리켜 ‘숨골’이라 설명했다. 제주어로 틈이라는 뜻, 자연이 만들어낸 땅굴이라고 했다. 빗물이 숨골로 흘러 들어가 지하수가 되고 주요한 식수 자원이 된다. “땅이 숨을 쉬는 공간”이라는 설명을 곱씹으며 걸었다.
일상에 작은 ‘숨골’을
활동을 시작한 이후로 늘 긴장한 채 지냈다. 빨리 처리해야 하는 일들을 여럿 맞닥뜨리고 난 뒤에는 녹초가 됐다. 한 달에 두 번, 주말마다 집회를 여는 게 주요 일정이 되었고 밤늦게 퇴근하는 날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학살 소식을 매 순간 접하고, 하루 종일 휴대폰 메신저와 기사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되면서 불안해졌다. 폭격은 이어지고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죽어가는 걸 온라인으로 지켜봐야만 했다. 집회나 기자회견에 참여하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해졌고 내 쓸모를 되돌아 보게 되었다. 매사에 자책하는 일이 빈번해질 무렵 나를 돌보는 건 자연스레 후순위로 미뤄졌다. 열심히 활동하고자 하는 그 마음이 나를 갉아먹고 있었던 걸까.
고백하건대, 몇 달째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것 같고 아무것도 하기 싫은 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자꾸만 기분이 가라앉고 부정적인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차 침울해진다. 때로는 너무 화가 나서 혼자 씩씩거리다가, 때로는 슬퍼져서 장소를 가리지 않고 운다. 무던한 편인 내가 기분의 양극단을 오가고, 평소와 달리 아침에 일어나지 못하거나, 눈을 떠도 몸을 일으키기가 어려웠던 경험을 하고 있다. 단순히 피곤해서겠거니, 미뤄둔 휴가를 쓰면 해결될 거라 생각했으나 번아웃과 함께 온 짙은 우울을 직면했다. 병원에 내원하고 주변의 권유로 상담을 받기 시작하는 등 지난한 일상이 이어지게 되었다. 약 복용으로 기력이 올라오면 바짝 일을 했고 부족함을 드러내기 싫어 부단히 움직였다.
마주 앉아 내 이야기를 듣던 상담 선생님은 “탈이 났다”고 했다. 내가 가진 에너지를 다 쓰고도 모자라서, 여태껏 많이 참아 왔을 거라는 말에 하염없이 눈물이 터져 나왔다. 티 나지 않게 우는 법을 터득해 가고, 일과 시간 내내 감정을 잘 추스리는 게 익숙해질 즈음 나에게도 숨골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완의 세계로, 아우토겐 트레이닝
나를 압박하는 일상과 활동 간의 경계를 세우고 작은 숨골을 만드는 연습을 하는 중이다. 우선 굳어있는 마음을 풀기 위해 시도한 일 중 가장 효과가 좋은 건 아우토겐 요법이었다.
아우토겐 트레이닝(Autogen Training 자율 훈련)은 간단히 말해 몸의 긴장을 풀고 이완을 돕는 회복 요법이다. 자주 긴장하고, 걱정을 쌓아놓고 사는 나에게 이완은 언제나 큰 숙제였다.
“나는 아주 편안하다.”
눈을 감은 채 상체를 구부려 발 쪽으로 축 늘어뜨리고 첫 마디를 내뱉는다. 발화만으로도 마음이 조금 편안해지는 것 같다. 이어서 오른팔의 중감, 온감 그리고 호흡과 심장박동, 머리까지 온몸의 감각에 집중한다. 의식하지 않고 오로지 감각에만 집중하는 경험은 이완을 촉진한다. 연습을 통해 몸의 감각을 되짚다 보면 자연스럽게 하품이 나거나, 긴장이 풀린 게 느껴진다. 이완 상태에서 머무르고 싶지 않을 때는 어깨 주변을 두드려 깨어날 수 있다.
왠지 모를 불안감에 잠 못 이룰 때, 새벽에 깨서 다시 잠들지 못할 때 차분히 숨을 들이마시고 다시 길게 내뱉는다. 아우토겐을 시작하기 전 마음을 정돈하기 위한 나만의 루틴. 침대에 누운 채 몸에 힘을 쭉 빼고 아우토겐을 시도한다. 감각에만 집중하다 보면 몸과 마음이 한결 편안해지고 졸음이 밀려온다.
마음에 귀 기울이기
자기 돌봄의 기술은 소개한 아우토겐 요법 말고도 여러 가지다. 몸을 움직여 운동하고, 취미를 갖는 등 자신에게 맞는 방법은 다양하기 마련이니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내 마음에 귀 기울이는 일이다. 내가 하고 싶은 활동을 지속할 수 있도록, 도망치지 않을 수 있도록 내 마음을 돌보자. 현장에서 알게 된 활동가들이 스트레스성 질환을 겪고, 몸과 마음이 지친 채 힘들어하는 경우를 봐왔다.
세상과 사람을 사랑하는 만큼 나를 존중하고 후하게 대하는 일도 필요하다. ‘갈아 넣듯’ 일하는 건 당연하지 않고, 상담선생님의 말처럼 자신에게 인심을 쓰는 시간도 있어야 한다. 내가 나를 잘 돌보게 될 때, 동료들도 지킬 수 있고, 더 나은 사회를 위해 지속 가능하게 활동할 수 있게 될 테니까.
마음이 조급해지고 의도치 않은 감정이 밀려올 때 눈을 감고 천천히 심호흡을 해본다. 마음은 돌봐주면 금방 괜찮아진다는 말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