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라 (녹색당원)
X에게.
X야, 안녕. 잘 지냈어? 5년만에 편지를 쓰게 되었네. 우리 오랫동안 연락을 하지 않았잖아.
2019년 초겨울, 그때도 아주 오랜만에 만난 것이었지. 서로 쌓인 근황을 나누다가 갑자기 분위기가 얼어붙었던 것, 기억해?
너는 트랜스젠더가 여성인권을 추락시킨다고 했어. 화장 같은 것을 하면서 ‘여성적인 것’을 부각하는 트랜스여성이 여성혐오를 부추긴다고 하면서 말이야. 그런 너에게 내가 물었어.
“트랜스젠더를 만나본 적 있어?”
너는 대답을 하지 않았지.
네가 말하는 트랜스젠더는 내가 만나온 트랜스젠더와 달라. 우리집에 살고 있는 트랜스젠더, 나와 학교를 같이 다닌 트랜스젠더, 마라탕집 옆테이블에서 밥을 먹던 트랜스젠더는 단순히 ‘화장을 하는 트랜스젠더’ 라고만 설명할 수 없거든.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사람’, 퇴근 시간이 다가오면 웃음을 짓는 ‘사람’, 매운 걸 즐겨먹는 ‘사람’이야. 그게 다야. 화장은 뭐 하고 싶을 때 하겠지. 그날 보라색 립스틱을 발랐던 나처럼.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던 내가 여성인권을 추락시키는 건 아니잖아.
나에게는 10대에 머물러있는 트랜스젠더 이웃이 있어. 2018년 9월 19일,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에 달려간 순천향대학병원 장례식장. 그날부로 내 세계는 박살이 났어. 그리고 생각했지. 내 소중한 사람들이 트랜스젠더라는 이유로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굴레를 멈추자고 말이야.
K가 죽지 않고 성인이 되었다면 어땠을까 자주 생각해. 대학에 갔을지 입시거부를 했을지부터 알고 싶네. 신념에 있어서 고집이 대단한 사람이었거든. K는 어쩌면 위스키를 좋아했을지도 모르겠고, 서툴던 메이크업을 나날이 연습해 아이라인을 자신의 눈매에 딱 맞게 그릴 수 있게 되었을지도 모르겠어. 퍼스널 컬러에 맞게 옷장을 바꾸어갔겠지. 무엇을 할 때 즐거움을 느끼고 무엇으로부터 아름다움을 느끼는지를 신나게 탐색해나갔을 거야. 좋아하는 게 많은 사람이었어. 열 여덟 살에 네 개 국어를 할 줄 알았으니,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그 사람 안에 있었을지 짐작이 가지.
어제 꿈에 K가 나왔어. 부스스한 가발을 벗고 찰랑거리는 단발머리를 하고 있었어. 스물 네 살이 된 K는 단발머리를 하고 있나봐. 여전히 쫑알쫑알 시끄럽더라. 아쉽네. 수다스러운 스물 네 살 K를 볼 수 없다는 게 말이야.
성소수자 커뮤니티에는 매달 기일이 있어. 겨울에서 봄으로 접어드는 시점에, 여름에서 가을로 접어드는 시점에 기일이 몰려있는 탓에 쌩뚱맞게도 기후변화를 체감하기도 해. 작년 9월에는 니트를 입었는데 올해는 반팔 티셔츠를 입네. 그 해 2월에는 짬뽕을 먹었는데 올해 2월에는 어쩐지 날이 벌써 풀렸네. 추모를 하러 가서 계절을 느껴. 바빠서 미처 볼 수 없었던 하늘을, 덕분에 보게 돼. 좋은 일로 하늘을 보는 날이 많아졌으면 좋겠어. 세상을 떠난 얼굴들이 더 이상 늘지 않았으면 소원이 없겠다.
11월에는 트랜스젠더 추모 주간이 있어. TDoR(Transgender Day of Remembrance, 티디오알)이라고도 부르고 11월 20일 즈음 해서 며칠간 이어지는 주간이야. 조금 있으면 TDoR인데, 보름 전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 국회의원이 얼마 전 국정감사에서 한 말이야. 성전환(성확정)수술 없이 성별정정을 허가하는 법원의 판결이 국민 눈높이에 맞지 않는대. 7년 전 영국에서 트랜스젠더 수감자가 여성 교도소에서 성폭력을 저질렀다면서, 성별정정에 이런 부작용을 생각하지 않았냐고, 청주지방법원장에게 공개적으로 물었어. 참 익숙한 레파토리이지.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악의적인 상상력을 섞어서 존재를 범죄화하는 것 말이야. 조배숙 의원에게 묻고 싶다. 살면서 트랜스젠더를 만나본 적이 있느냐고 말이야. 성확정수술에 얼마나 많은 돈이 드는지 아냐고, 국회의원도 앞장서서 트랜스젠더를 범죄자 취급하는 마당에 수술 할 돈을 벌고 모을 직업을 어떻게 구하겠냐고, 생식 능력을 제거해야만 나 자신으로 인정받는 그 악습이 정말 중요하냐고 똑바로 묻고 싶어.
있잖아. 모르는 사람을 미워하는 것만큼 소모적인 게 또 있을까 싶어. 너는 미디어에서 아주 납작하게, 상징적으로 그려낸 트랜스젠더만 봐왔을 거야. 빨간색 수트를 입고 빨간색 하이힐을 신고 직장동료에게 커밍아웃을 하는 장면. 그런 사람 없어… ‘지어낸’ 트랜스젠더 이미지에 속지말자, X야.
조배숙 국회의원 같은 사람들이 지어낸 트랜스젠더 이야기로 실체 모를 공포감만 끌어올리는 동안에, 실제로 우리 곁에서 살아가고 있는 트랜스젠더들은 오늘도 학교에 가고 일터에 가고 저녁밥을 먹고 있어. 어쩌면 네가 오늘 아침 테이크아웃한 커피를 만든 사람일지도 모르고, 퇴근길 지하철 옆자리였을지도 몰라.
X야, 우리 열 여섯 살에 아이돌 팬클럽에서 만났잖아. 나는 트랜스젠더 청소년들이 딱 우리처럼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다가 친구를 사귀었으면 좋겠어. 다른 사람의 동의 같은 것은 필요 없이 자신의 몸을 존중하고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안전하게 배우고 터득했으면 좋겠어. 세상의 험악한 시선에 눈치를 볼 시간에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 실컷 탐색하는 청소년기를 보냈으면 좋겠어. 그래야 하는 거잖아. 어디에서 어떤 몸으로 태어났든지, 행복할 권리가 있는 거잖아.
우리 5년 전 그날 이후로 한 번도 연락을 한 적 없었지.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없겠다고 서로간에 직감을 했으니까. 시간이 흐르면서 네 생각도 조금 바뀌었으려나? 다 아는 얘기 한 건 아닐까 뒤늦게 머쓱해진다. 이 편지를 쓰다 몸살이 났어. 그럼에도 나는 X, 너에게 편지를 하고 싶었어. 믿어서 연락 하는 거야. 우리가 등을 돌리지 않고 긴장을 풀고 좋아하던 것을 다시 함께 좋아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믿기 때문에.
답장 기다릴게.
너와 함께 투애니원 콘서트에 다시 갈 날을 상상하며,
소라가.

2022년 11월 홍대입구 길목에 TDoR을 알리기 위해 붙인 텍스트 포스터, 그리고 2023년 3월 베를린 여성의 날 집회에 참석할 때 들었던 피켓 “TRANS WOMEN ARE WOMEN 트랜스여성은 여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