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라 (녹색당원)
“나 지금 섹시해? 어때?”
“넌 참 섹시가 중요해.”
“맞아, 나 섹시 중요해. 아, 그래서 어때! 나 섹시해?”
애인과 내가 자주 하는 대화다. 섹시한지 묻는 쪽이 나. 별 건 아니고 어느 외투를 입을 때 더 섹시해 보이는지 묻는 중이다. 보라색 솜점퍼와 검은색 두툼한 가디건, 둘 중에 하나를 골라야 한다. 잠바 하나에 웬 섹시? 유난이다 싶을 수 있겠지만, 내가 좀 섹시한 게 중요한 사람이라 그렇다.
지루한 활동가는 되고 싶지 않다.
나는 활동가다. 시민사회라고 부르는 영역에서 활동을 한 지 올해로 딱 10년이 되었다. 그중 절반 이상은 진보정당에서 기후정치, 페미니즘 정치를 위한 조직 활동을 했고, 지금은 성소수자 인권을 위해 일을 한 지 2년 차가 되었다.
어젯밤의 일이다. 당직 근무를 마치고 함께 퇴근한 동료들과 맥주 한잔을 했다. 요즘의 화두는 무엇인지, 오늘 일을 하는 동안 어떤 생각을 했는지 대화를 나누던 중 나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진심으로 편안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재미를 불문하고 내가 있어야 할 곳에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알게 된 지 고작 1년밖에 되지 않은, 일터에서만 만나는 사이인데 이들과 대화를 할 때면 어느 때보다 안전함을 느낀다. 왜 그럴까? 집에 돌아와 골똘히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대강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건… 여기에 ‘아저씨’가 없기 때문이었다.
잠깐! 내가 말하는 ‘아저씨’는 당신이 생각하는 그 성별의 그 연령층과 다소 다르다. 나의 개인적인 관념 속 ‘아저씨’는 마치 레즈비언 사이의 용어 팸·부치처럼(처음 듣는 용어라서 포털사이트에 검색을 하러 간다면 가지 말라 말리겠다. 이 기묘한 이분법은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 테니까…) 간략하고 명료하게 설명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내 생각에 ‘아저씨’가 아닌 것을 나열하며 내가 말하는 ‘아저씨’가 무엇인지 이해를 돕겠다.
‘아저씨’가 아닌 이들은 마음을 터놓을 줄 안다. 사회에서 흔히 ‘정상’이라고 부르는 것과 멀찍이 떨어져 있는 사람들은 자신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데에 긴 시간이 걸렸기 마련이다. 오랜 기간 숙성된 만큼, 이들은 자기 이야기를 풀어놓는 것이 비교적 어렵지 않다. 여기에 더불어 아파보았기에 타인의 아픈 상태에 예민하다. 아픈 존재이자 아프기만 한 존재가 아니다.
이들은 어디서든 상대가 괜찮은지 거듭 확인한다. 누군가가 배제되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지금 이 공간에 잘 섞이고 있는지, 음식은 입에 맞는지, 덥거나 춥지는 않은지 기민하게 눈치챈다. 달리 말하면 상대를 돌볼 줄 안다. 돌볼 줄 아는 사람들은 타인의 불편한 상태를 알아본다. 이런 이들은 때가 되면 집에 들어간다. 돌보아야 할 고양이가 있거나, 미루지 못할 집안일이 있기 때문이다.
쓰다 보니 이거 완전 페미니즘이잖아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헉! ‘아저씨’의 반대말은… 페미니스트!? (그렇지 않다.)

일터에서 동료들과 돌아가면서 밥을 주는 길고양이
10년 만에 나의 자리를 찾았다는 생각이 들게 한 건, 퀴어페미니스트들 덕분이었다. 이들의 데면데면한 환대가 좋다. 붙잡아 가두는 방식으로 조직하지 않고, 그곳이 좋아서 그곳이 편안해서 모여들게 하는 매력이 있다.
스스로 활동가라는 직업을 택했으면서 운동권이라는 말에는 아직도 소름이 오소소 돋는 건, 운동권 사이에서 보았던 사람들 때문이다. 나이가 어리면 기특해하고, 동시에 가르치려 하고, 모두가 이성애자일 것이라고 전제하고, 실언 후 사과할 용기를 내지 못하고, 그러다 돌아서는 이들을 떠나보내며 시름시름 앓다가 타인을 향한 원망과 비난만 남은 어른들이 너무 많았다.
활동가라는 직업을 바깥에서 바라보면 자유롭고 열정적인 이미지일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겁에 질려 있었던 것 같다. 실수를 할까봐, 내가 있는 조직에 먹칠을 할까봐, 사실은 운동이 무엇인지 추호도 모르는 채로 운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들킬까봐 매일 같이 발가벗은 채로 길 한가운데에 서 있는 꿈을 꾸고 대사를 외우지 못한 채 연극 무대에 오르는 꿈을 꿨다. 그런데 그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운동권 ‘아저씨’들은 아픈 것을 드러내지 않는다. 나도 모르게 이것을 체득한 것 같아 무서웠다.
그러다 퀴어페미니스트들을 만났을 때, 좀 과하게 말이 많은 사람들을 마주했을 때, 쫑알쫑알 쉴 새 없이 대화를 하고 그러다 운동의 의제를 발견하는 사람들을 바라보았을 때 느낀 희열이 있었다. 이들은 자신의 섹슈얼리티에 관해, 돌보는 화분에 관해, 가족과 투닥거리다 생긴 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다. 관계 맺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고 거기에서 어떤 것을 발견했는지 경험을 나눈다. 이게 바로 꿈틀꿈틀 살아있는 일상의 정치구나. 그래, 이 일상의 정치가 중요해서 진보정당 활동을 시작했었는데. 민주당이 어쨌고 저쨌고 이야기하는 것만이 정치가 아니라는 걸 진보정당에서 10년을 활동하고 나서야 다시 떠올리게 됐다.

연대하는 채식인 모임의 친구와 모금 행사를 하던 날이었다.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에서 제작한 조끼를 맨살에 입고 갔다. 등에는 ‘저항과 연대’라고 쓰여있다.
정치적으로 올바르면서 섹시할 수 있다는 걸 배워가는 중이다. 나에게 섹시한 것이란 아픔을 드러낼 줄 아는 것, 돌볼 줄 아는 것, 내가 무엇을 느끼는지 고스란히 꺼내놓을 줄 아는 것이다. 아픔과 돌봄이 있는 공간에서 편안히 지내되 긴장을 놓치지 않는다. 그럴 때 현장이, 일터가 지루하지 않아진다.
종교가 없지만 교회를 다니는 친구가 가장 좋은 옷을 입고 기도를 하러 가는 모습을 보며 ‘저런 마음으로 출근을 하고 싶다’고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나도 좀 더 성심성의껏 동료들을 만나보기로 한다. 이제는 웃어넘길 수 있는 숱한 아픔을 토닥이며 자신과 서로를 돌보고, 활동을 하다 어려운 마음이 들 때에는 차 한 잔 마시며 털어놓을 수 있는 운동권이 되고 싶다. 이 얼마나 섹시한가?
섹시한 활동가들이 운동권을 대표할 때까지. 사회를 바꾸는 것은 결국 아픈 사람들과 돌보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게 될 때까지. 우리 퀴어들, 함께 투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