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1,005명(단일 사안으로 최대의 수감자, 2006년 1월 15일 통계)의 젊은이들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로 차가운 감옥에 수감되어 있습니다. 특히 2003년에는 이라크 파병 결정에 반대하며 강철민씨가 백일 휴가 후 복귀를 거부한 사례도 있었습니다. 이것이 한국에서는 현역 입영자로서 최초의 병역거부였습니다.
오늘 유정민석씨(24세)는 성소수자(동성애자)로서, 또 여성주의의 신념을 갖고 있는 한 인간으로서 전투경찰 복무를 거부하고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선언했습니다.
[유정민석 병역거부 소견서] 나약하고 유약한 제 안의 여전사는 병역을 거부합니다.
2006년은 주역을 공부하신 아버님의 풀이(?)대로 순탄치 못한 지난한 한 해가 될 것 같습니다. 수많은 자가당착과 견강부회들로 점증되었던 병술년 개의 해는 그렇게 슬프지만 때로는 그리워질 상흔들을 제게 남겨놓을 것입니다.
남성은 남성성을 갖는 것이 미덕이며 정상으로 인지되는 세상에서 제 정체성은 국가와 사회가 요구하는 의무와 국민으로서의 권리 양자 모두에 언제나 상충되곤 합니다. 그렇게 무방비로 태어나버린 제 존재를 돌이켜보면 단지 태어난 성과 반대의 성역할이 편하고 행복감을 느꼈을 뿐인데, 그 대가치곤 짊어지어야 할 짐이 무겁습니다. 별나라의 외계인을 좋아한 것도 아니고 여기 푸른 지구의 ‘화성에서 온 남자’를 좋아했을 뿐인데, 때론 억울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초등학생이었던 어린 시절부터 보이스 칼라를 하이 톤으로 내질러 보는 순간이 너무나 재미있었고, 어머니의 화장품을 아버지의 것보다 즐겨 바를 때도 그것 이 어떤 사회적 금기를 깨는 성질의 것이라고 알기에는 너무나 자연스러웠습니다. 그것이 앞으로 닥쳐올 어떤 시련과 압제를 예고하는, 이미 열어버린 판도라의 상자가 되어버렸다는 것은 제 안의 여성의 육감으 로도 알 수 없을 만큼 너무도 편안하고 좋았습니다.
경쟁심이나 호승심을 단련하는 공놀이보다는 소꿉놀이나 피아노가 더 재미있었던 유년기 시절에 “여자 새끼”라는 말은 제가 흔하게 들어야했던 욕 중에 하나였습니다. 나의 여성과 남성 모두가 실추되는 듯한 그 역설적인 조롱 투의 욕설에 그 때부터 저의 정체성은 혼돈을 거듭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허나 살아 남아야 했습니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나를 살도록 하는 세상과 저울질을 해야 했습니다. 나를 둘러싼, 그러 나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 세상과 흥정을 해야 했습니다. 나 혼자 살 수 없는 세상 이였기에, 보호색을 띈 채 나의 초자아로 꿈틀거리는 내 안의 여성성을 양순한 사회적 동물로 길들여야만 했습니다. 나의 나약함 과 유약함의 특성은 또래의 남자아이들이 봤을 때는 겁쟁이요, 계집애 같은 괴물의 모습 이였기에, 그렇게 초등학교 때부터 남주인공 배역에 익숙해졌고, 억지로 스포츠맨쉽과 신사도를 계발해갔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계속된 나의 정체성의 외도는 이미 본능을 잃어버린 채 고향 아프리카를 그리워하는 사파리의 맹 수처럼, 쓰레기통을 뒤지는 고양이처럼, 음료수 병에 꼬인 꿀벌처럼, 공기를 마시는 물고기처럼 그렇게 진 짜 내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후에 대학에 와서 각자 자신 안의 여성성을 긍정하기도, 혹은 부정하기도 하면서 남성우월주의를 거부한 다는 소위 말하는 여성주의자들을 처음 접했을 때의 기분은 제 생물학적인 성과 관계없이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한 이루 말할 수 없는 해방된 기분이었습니다. 그 전의 나의 정체성을 억압하면서 그동안 내가 아 닌 다른 페르소나의 가면을 쓴 채 허파가 아닌 아가미로 숨을 쉬어왔던 나의 삶은, 스스로의 삶의 주인으 로 사는 삶이 아닌 살아졌던 것에 불과했다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군 입대 전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군대라는 남성화된 공간으로 흘러들어간다는 것은, 제게는 엄청난 공 포와 두려움으로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샹송 제목처럼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국가와 군대라는 남성화된 거대한 리바이어던은 거스를 수 없는, 그리하여 결국은 승복할 수밖에 없는 근엄하고 숭고한 남신의 아바 타 같은 힘으로 다가왔었습니다. ‘철수’와 ‘영희’같은 신사·숙녀만 존재해야 하는 세상에서 나는 ‘철수’라는 기득권을 갖고 태어났지만 진정한 남자로 거듭 태어나는 것을 거부했기에, 남성의 신체를 하 고 있는 나에게서 주인공 철수의 역할을 기대했던 사람들에게 ‘게으르고, 뒤떨어지고, 어리버리해서, 그러 기에 싸가지 없는’ 특이하고 이상한 ‘영희 같은 놈’이라는, 참으로 비통하고 원통하게도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평가를 받아야 했습니다. 때문에 진짜 철수인척 하지 않으면 ‘철수들’의 무리에 낄 수가 없었 습니다. 나의 다소곳하고 다정다감한 부분을 ‘레이디 퍼스트’처럼 배려해주기를 누군가에게 하소연이라 도 하는 날에는, 그 즉시 퇴출의 대상이 되거나 보안의 대상이 되어야 했습니다. 속앓이를 하면서도 그렇 게 언제 어디서든 숨기지 않으면 쫓겨야 했습니다.
그렇기에 전 가슴으로나 머리로나 이미 몸에서부터 남성 페미니스트 이자 트랜스 젠더일 수밖에 없습니 다. 로맨틱 코미디 영화와 순정 만화를 즐겨 보며 소설을 읽어도 여류 작가에게, 영화를 봐도 여배우에게 모든 감정이 몰입되고 이입되는 나는 그렇게 방향점과 지향점이 모로 가도 같습니다. 그렇게 섹스와 젠더 의 괴리감을 안고 사는 것에 너무나 익숙해져버린 나는 스스로 진짜 어떤 것이 나인지도 몰랐지만, 의도한 바 없이 되어버린 괴물이 아니라 단지 아직은 태고적의 나는 법을 기억하는 야생의 동물처럼, 예전 시절 어머니의 화장품을 바를 때 행복감을 느끼던 경험을 잃지 않은 ‘철수와 영희들’과 똑같은 인격체의 사 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학에서 여성주의 세미나를 통해 에코페미니즘(생태여성주의)라는 학문을 발견하였을 때는, 마치 나를 위해서 만들어진 학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태주의와 여성주의가 접속된 에코페미니즘은 소위 버려 지고, 나약하고, 쓸모없다고 생각되는 모든 ‘여성적인 것들’에게 자매애를 부여하는 학문이라고 느껴졌 습니다. 스스로 부끄럽게 느껴 와서 받아들이기가 거북했던, 그러나 내 안에 이미 본질적으로 내재되어 있 었다고 생각하는 여성성을 하다 못 해 집게벌레나 거미 따위의 보잘것없다고 규정되어진 뭇 생명 모두에게 서 발견해 가는 에코페미니즘이 제시하는 세상은 단숨에 제 모든 것을 휘감았습니다. 에코페미니즘은 학문 이기보다는 운동 강령에 가깝기 때문에, 설득적이기는 하지만 논증적이지는 못한, 이론보다는 담론이라는 이성적인 비판은 전혀 감성적으로 들리지 않았고, 자연 파괴와 생태계 교란이라는 침몰해가는 거대한 타이 타닉호로부터 나와 인류를 구원해줄 구명선이라고 느껴졌습니다. 그 후 이런 에코 페미니즘은 저의 신념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이 세상은 인간만이 사는 것이 아니라 유기적이고 상호의존적인 관계 속에 제각각 살 려고 하는 생명체들이 공존하며 살아가는 세상이라는 에코페미니즘의 관점은 제게 모든 중심주의를 온 생 명 전체로까지 확장시켜주는 영성을 느끼게 주었으며, 또한 휴머니즘을 가장한 인간중심주의의 이율배반성 에 대해 의문을 갖게 해주었습니다.
내가 그토록 모험감과 죄책감을 가지며 밀어내려했던 강요받던 공격적인 남성성은 남성과 여성, 또한 우 리 인간을 둘러싼 자연환경 양쪽 모두를 충분히 황폐화시킬 수 있기에 나뿐만 아니라 인류를 위해서도, 또 한 미래세대를 위해서도 불필요한 것이라는 신념을 굳히게 되었습니다. 거세되어야 할 것은 단지 그냥 몸 에 불과한 나의 생물학적인 남성의 상징이나 혹은 “사내자식이 계집애 같은” 나의 여성이 아니라, 우리 나라에서 유독 미화되고 가치 절상된, 그러나 사회문화를 가로질러 정상으로 인식되어져 지배하고 있는 정서인 ‘남성성’이라는 판단을 굳히게 되었습니다.
겁이 많고 어리버리한 제 심약함이 신념에 따른 병역 거부의 사유로는 어찌 보면 미약할 지도 모릅니다. 저는 페미니즘 운동을 위하여 플레이 보이지에 잠입한 채 바니걸로 살았던 글로리아 스타이넘이나, 일년 반 동안이나 남장을 한 채 남성들의 사회를 비판적으로 체험한 빈센트는 될 수 없겠지만, 남성적인 가치들 을 강요하는 군대에서의 경험을 통해 반작용적으로 깨닫게 된 섬세한 정체성과 내 안의, 또한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그런 여성성이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면, 겁이 많고 남을 죽이는 연습을 해야 하는 시뮬레 이션의 군사훈련조차 벌컥 손부터 떨리는, 아직은 사람들에게 낯설게 느껴지는 부류의 ‘사내자식이 계집 애 같다’는 그러한 ‘성적 소수자’로서 바라보았던 남성화된 병영문화의 병폐와 호전적이고 공격적인 남성성을 재생산하는, 군대라는 ‘진짜 남자’가 되기 위한 통과의례를 거부할까 합니다.
아직까지도 세상에는 싸나이와 계집아이 두 부류의 성별만이 존재해야 합니다. 또한 세상은 남성에게는 진짜 싸나이로 거듭나라고 강요하고, 여성에게는 오직 집에만 계시라고, 여성으로만 있으라고 주문을 합니 다. 그 와중에서 소위 남자답지 못한 사람들은 “사내자식이 계집애 같이…”혹은 “너 남자 맞냐?” 라 는 식으로 여성성을 비하시켜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유발하여 남성성을 주입받도록 강요합니다. 또한 남성 의 공적인 영역으로 동등하게 진출하고자 하는 여성들에게는 “여자가 감히 어딜!”이라는 식으로 이 시대 남성우월주의적인 성정치학을 들이대며 사적인 영역으로 묶어두곤 합니다. 또한 남성성을 획득하지 못한, 혹은 남성성을 획득하지 않으려하는 남성들이나, 역사적으로 만들어진 여성성을 따르지 않는 여성들과 같 이 ‘탈중심화’된 사람들을 용인하지 않는 사회는, 이를 억누르려는 강력한 구심력을 작용합니다. 이는 남성성을 획득하지 않은 사회적 소수자와 약자들(예를 들면 장애인, 여성, 미성년, 성적소수자)을 제외하고 소외하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역사적으로 규정되어진 사회·문화적 성인 ‘젠더’의 역할에 따른 지극히 남·여 이분법적인 성별분업의 구획 짓기는 남성에게도, 또한 여성에게도 응당 불행의 굴레로 작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남성우월주의적인 관점에서 규정되는 사회·문화적인 남성성은 그 모습이 때로는 군사주의로, 때론 권위 주의와 위계주의로, 때론 목표 달성을 위한 진취성, 성취성 등을 가장한 호전성과 공격성으로 외양을 변태 하고는 합니다. 그렇게 변태된 남성성은 제게는 성폭력의 형식으로, 여성 혐오로, 호모포비아나 게이 배싱 등의 소수자에 대한 폭력으로, 또한 ‘소외’나 ‘배제’의 양태로 다가왔습니다.
남자에게는 남성화된 남성성만을, 여성에게는 또한 젠더적 여성성만을 강요하는 국가와 사회의 성별 구 획짓기식 성교육은 남성과 여성 양자 모두에게 착종과 반목과 거부감과 반감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비단 저만이 아닌 인간의 다양하고 다채로운 섹슈얼리티, 아니마와 아니무스, 기질, 특질, 감수성들을 발현시킬 수 없게 하는 억압기제로 작용할 뿐입니다.
그러한 젠더 구획짓기를 반대하는 페미니스트이자, 젠더 구획짓기의 피안에 있는 게이인 저의 신념은 오 로지 천편일률적이고 획일화된 남성성을 훈육, 교육시킴과 동시에 재사회화 시키는 군대를 거부하려 합니 다.
“여성은 두 개의 유방으로 태어난다. 하나는 페미니즘이며 또 다른 하나는 베지테리아니즘이다.” 라는 생태여성주의자인 쯔루다 시즈카의 명제처럼 제 성 정체성이 오버랩한 여성은 마냥 희생해야 하는 약자로 서의 여성이 아닌, 인류를 먹여 살리는 젖줄을 지닌 채 상생과 공생의 힘을 가진 아마존 밀림 숲의 여전사 같은 여성이었습니다. 때문에 ‘남자도 아니다’, 혹은 ‘남자답지 못하다’는 조롱에, 외유내강과 정중동 의 힘을 가진 제 안의 여전사는 저항했습니다.
‘성적 소수자’인 제가 소수자적 감수성을 가지고 바라본 세상은 오히려 남성우월주의와 권위주의에 의해 스스로야말로 겉과 속이 뒤집힌 ‘네모난 동그라미’같은 세상 이였습니다. 여성을 성적 관심의 대상 이 아닌 동일한 인간으로 보기에 그들의 고통과 교통할 수 있었으며 그 외에 남성성을 획득하지 못했기에 나약하고 심약하다고 배척당하는 모든 소수자, 타자화된 것들에 대해서 조망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자매애’보다는 ‘전우애’를, ‘상생’과 ‘공생’보다는 상멸과 공멸의 결말을 가진 군사주의와 남성우월주의적인 군대를, 제 안의 겁 많고 어리버리한 여전사는 온몸으로 거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