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전국에 계신 평화수감자 여러분, 전없세 활동가 및 후원자 여러분, 병역거부에 관심을 가지고 혹시라도 이 편지를 보고 계실 여러분.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고 계신가요?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저는 그동안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봄에 들어와 여름부터 간병일을 시작하여 가을, 겨울, 다시 봄이 되었습니다. 몇 명의 환자 곁에서 숙식하며 간접적으로나마 대체복무제를 경험하는 심정이었습니다. 교도소가 작아서인지 직원과 수용자 간의 관계가 험하지 않아서 유쾌하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사육장의 햄스터처럼 살도 많이 쪘습니다. 요새는 보는 사람들마다 살쪘다고 한마디씩 하네요. 밥맛이 좋습니다. 누워서 뒹굴거리는 것도 좋고요. 나무늘보가 따로 없습니다.

 

세계 각국에서, 한국 이곳저곳에서 엽서를 받은 건 감동적이었습니다. 연인과 친구 한 명 빼고는 연락 없는 제가 이렇게 다양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다니요. 제가 택한 결정에 대해 누군가 함께 공감해주고 용기를 북돋아 줘서 고마웠습니다. 기억나는 건 어떤 영국의 할머니가 자기 소개를 하며 요양보호하는 노인을 데리고 바닷가에 다녀온 걸 상세하게 써준 편지였습니다. 등대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과 아들내미 결혼식 사진이 동봉되어 있었습니다. 식탁에서 들을 법한 얘기를 창살 안에서 보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했습니다. 수용동 복도를 지날 때면 의도치 않게 수용자들의 맨산을 보곤 합니다. 비슷한 기분이었어요.

 

전없세에서 보내 주신 책들은 잘 받았습니다. <강정평화서신> 잘 봤습니다. 같은 평화수감자인데 이렇게 다를 수 있다니! 나는 배떄기에 살이나 찌우고 있는데… 농담입니다. 저는 종교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존경하는 함석헌, 김용옥 선생은 모두 종교인입니다. 그 분들 책을 보고 생각한 게, 병역거부를 선택하게 된 계기이기도 하고요. 종교인이든 비종교인이든 평화라는 가치는 모두가 함께 이뤄가야할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외부세계의 평화(국가, 기업, 사인 간의)보다는 저 자신 내부의 평화(욕망, 가치, 인간관계 등)를 지키고자 살았습니다. 수감 생활은 제 삶에 대해 돌아보게 된 계기가 되었는데요. 내부의 평화는, 감옥이라는 물리적인 환경과 지속적인 감시, 언어 폭력 등으로 끊임없이 흔들리고 위협받는다는 사실을요. 내부의 평화를 위해서는 외부의 평화도 동시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되냐구요? ..세의 정기 후원자가 되어 보시죠! 후후후.

 

외부의 평화를 위해서는 도돌이표처럼, 자기의 내부로 돌아가야 합니다. 미투 운동으로 불거지는 스캔들이 한 예입니다. 큰 가치에 매몰되어 있다보면 개인적인 욕망은 하찮은 것이고 무시할 수 있는 것이라고 여겨지기 쉽습니다만, 들보없는 집이 어디 있을까요. 스스로의 몸에 평화에 대한 가치가 단단히 심어져 있을 때 비로소 그 기운이 외부에까지 미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평소에 읽고 싶었던 책을 많이 봤습니다. <안나 까레리나>를 얘기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모든 행복한 가정은 비슷하다. 그러나 불행한 가정은 각자 제 나름의 사정으로 불행하다’ 참으로 제각각 사연을 가진 사람들 틈에서 19세기 후반 러시아 귀족 사회를 바라보는 건 흥미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저는 TV를 보지 않아서, 일 끝나면 방에서 책을 읽는 게 낙입니다. 처음에는 귀마개를 껴도 뚫고 들어오는 소음이 고역이었는데, 적응되니까 괜찮더군요.

 

지난 4월에 들어와서, 3개월은 얼떨떨하게, 3개월은 업된 상태로 지내다가 추석 전후로 제 모습으로 지냈던 것 같네요. 참 길기도 길었던 열흘간의 연휴 동안 책을 보면서 마음에도 인이 하나 박힌 모양입니다. 초록을 따라 들어온 게 엇그제 같은데 곧 일 년이네요. 겨우내 입었던 내의를 반판ㄹ로 바꾸면서 시간의 경과를 실감합니다. 몸이 많이 좋아진 것도 수확입니다. 프리즌 스테이 나쁘지 않아요, (, 여름은 안 됩니다!) 책읽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미세먼지 때문에 창문을 열기도 닫기도 머뜩찮은 요즘입니다. 낮에는 햇살이 따듯해서 창을 열면 바람이 좋아요. 수감 중인 평화수감자 여러분들 남은 기간 건강히 잘 보내길 바랍니다. 응원해주신 분들께 이 짧은 편지로나마 감사 인사 드립니다.

 

이만 줄이겠습니다.

 

2018326일 월요일

서산에서 김나무(김진유)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