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재욱(열린군대를위한시민연대 활동가)
전쟁없는세상 주:
오는 4월 21일~4월 22일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에 대한 시민평화법정이 열립니다. 전쟁없는세상 또한 시민평화법정 준비위원회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평화시민법정을 맞이해서 전쟁없는세상의 위치에서 바라본 베트남전쟁에 대한 글을 모두 4편 연재하려고 합니다. 세 번째 글 서울 용산에 위치한 전쟁기념관 해외파병관 답사기입니다. 한국 국가가 베트남전쟁을 어떻게 공식적으로 기억하고 기록하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장소라고 생각합니다.
1.
“대한민국은 6.25 전쟁 당시 자유 우방의 지원에 보답하고 세계 평화에 기여하고자 베트남에 국군을 파병하였습니다.”
“그대들 여기 있었기에 오늘의 조국이 있다!”
“북베트남 및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과 남베트남 사이에 내전이 발생했다. 그러나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공산주의가 확산되는 것을 우려한 미국이 1964년 통킹만 사건을 계기로 전쟁에 직접 개입하면서”
전쟁기념관이 말하는 베트남전쟁 참전의 공식적 이유는 ‘자유 우방의 지원에 보답하고 세계 평화에 기여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아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누구도 이러한 주장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생각해봐야 할 것은 공식적 이유가 숨기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다.
공산주의 확산을 저지하려는 미국이 지원한 정부는 남베트남 정부였다. 남베트남 정부는 최악의 정권이었다. 모든 선거는 부정선거였으며, 정책은 모두 기득권자들을 위한 정책이었다. 지배계층은 가톨릭을 믿었고, 불교를 믿는 낮은 계층 사람들을 탄압했다. 부패한 정권에 억압받던 남베트남 사람들이 반발하는 것은 당연했다. 이러한 맥락 속에 베트남전쟁이 있었다. 위에서 내전이라 언급했듯이, “베트남전쟁의 본질은 남베트남 정부에 반대하는 남베트남 사람들의 저항이었다.”1) 그 저항은 부패 정권에 저항한다는 구체적이고 정당한 이유를 갖고 있었다. 구체적이고 정당한 저항은 ‘공산주의의 확산’이라는 추상적인 말로 왜곡되었다.
본격적인 참전 계기로 언급되는 통킹만 사건도 조작된 것이었다. 통킹만 사건은 1964년 8월 2일과 4일, 정찰 중이던 미국의 구축함이 북베트남의 어뢰정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는 사건이다. 사건 발생 후 오랜 시간이 지나 당시 구축함 선원 중 한 명은 구축함 주위에는 북베트남의 함정이 없었다고 증언했으며, 당시 참전을 결의했던 존슨 미 대통령이 사석에서 ‘우리의 해군이 고래를 쏘았을 뿐’이라는 폭로가 나왔다. 결정적인 것은 2003년 <전쟁의 안개>라는 다큐멘터리에서 맥나마라 국방부 장관이 1964년 8월 4일의 공격은 없었다고 증언했다는 것이다.2)
당시 국제사회에서도 전쟁의 부당함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많은 자유진영의 국가들조차 참전을 주저한 것만 봐도 그렇다. 미국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참전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2.
“1964년 7월 15일, 남베트남 정부로부터 국군 파병을 요청하는 서한이 접수되었고, 7월 31일 파병동의안이 국회 본회의에 상정되어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 … 제1차로 1964년 제1이동외과병원과 태권도교관단을 파병했다. … 제3차로 1965년 한미정상회담에서 전투 병력 파병과 관련한 협상이 타결됨에 따라 그 해 9월 … 파병했다. 이를 통해 우리나라는 미국의 안보·경제 지원 확대 약속을 받아냈다.”
한국은 왜 참전했는가? ‘남베트남 정부로부터 국군 파병을 요청’받았기 때문에? 오히려 한국에서 더 적극적으로 참전 의사를 밝혔다. 이유는 복합적이다. 한미동맹에 대한 고려, 미국의 주한미군 및 한국군 감축 정책에 대한 대응으로서의 파병,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에 공헌 등.3) 하지만 주로 내세워지는 것은 경제적인 요인, ‘미국의 안보·경제 지원’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경제적 요인이 파병 전이 아니라 파병 이후에 추가되었다는 사실이다. 미국으로부터 받는 지원 내용이 담긴 <브라운 각서>는 3차 파병까지 진행된 후에 작성되었다. 경제적 요인은 사후적이었다. 이미 정당하지 못한 전쟁에 참여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다른 파병의 이유들이 내세워지지 않는 이유다. 물론 전쟁기념관에는 베트남전쟁의 부당함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언급되지 않는다.
이러한 것을 차치하고서라도, 참전으로 얻은 경제적 지원이 과연 어떤 ‘조국’을 위해서 쓰였는지에 대한 문제가 남는다. 당시의 지원으로 한국 경제가 큰 도움을 받았음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러한 도움이 직접 전쟁에 참여한 이들과 노동자들에게까지 골고루 분배된 것은 아니다. 사병이 받는 수당은 오히려 국내 회사원이 받는 연봉보다도 적었다. 사상자에게 지원되는 보상금도 사병이 전사했을 때 받는 금액은 당시 직장인의 1년 치 연봉을 조금 웃도는 액수였다. 당시 파견된 노동자들도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 공격을 받아 희생된 이들에게 어느 정도의 보상금이 지급됐는지 정확히 알 수 없고, 봉급도 제때 지급되지 못했다. 1971년 9월 15일 일어난 칼빌딩 방화사건이 그러한 사실을 보여준다. 미지불 임금을 받기 위해 한진 노동자들은 ‘한진파월기술자 미지불임금 청산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빌딩을 점거해 미지불임금 지급을 요구했지만, 사측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위원회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해 방화를 저질렀다. 농성자들에게는 징역이 선고됐지만, 한진은 미지불임금으로 어떤 제재를 받았는지 알려지지 않았다.4)
3.
“한국군은 백 명의 베트콩을 놓치는 한이 있드라도 한 명의 양민을 보호한다.”
위의 인용은 초대 주월한국군사령부 사령관이었던 채명신 장군의 훈령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남베트남 정권은 최악이었다. 당연히 “대부분의 남베트남 사람들은” 정권에 저항하는 베트콩에 우호적이었”고, 더 나아가 “베트콩의 보급 투쟁에 호응하거나 이들을 숨겨주기도 했다. 따라서 대민작전을 하는 한국군에게 베트콩과 양민의 구별은 무의미했다”5)고 볼 수 있다.

전쟁기념관 해외파병관에 전시된 베트남전쟁 당시의 모습 그대로 재현된 팻말
당시 맹호부대의 한 중대장은 이렇게 증언했다. “소년 베트콩에게 아군이 피해를 입었으며 … 거의 60세가 된 노인이 대항 후 도주하는 것을 생포했고 … 겉으로는 승려 복장에 속에는 탄띠를 찬 가짜 승려가 체포된 적도 있었는데 … 이들은 확실한 베트콩이며 결코 양민일 수 없다.”6) 양민과 베트콩을 구별할 수 없다면, 양민을 베트콩으로 간주하고 사살하는 것이 당시의 한국군의 작전 방향이었다. “소개하지 않은 자들을 게릴라로 판단”했으며, “베트콩이 나온 마을의 주민들은 모두 베트콩의 협력자로”본 것이다.7)
이를 고려했을 때, 저 훈령은 오히려 ‘한 명의 베트콩을 죽이기 위해 백 명의 양민을 죽인다.’라고 고치는 것이 더 정확할 지도 모르겠다.
4.
“남베트남은 북베트남보다 더 나은 무기와 더 많은 병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결국 전쟁에서 패하고 말았다. 북베트남은 훌륭한 지도자의 뛰어난 리더십과 이를 믿고 따른 국민들의 투철한 애국심 때문에 불리한 조건에서도 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다. 병력과 무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조국의 독립과 통일을 향한 지도자와 국민의 일치된 열망과 강렬한 호국의지였다.”
남베트남 패망 직전 박정희 대통령은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그 내용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뉘어 있다. 첫째는 공산주의와 협상을 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힘을 길러 힘의 균형이 유지되어야 한다. 둘째는 우방 강대국을 믿을 수 없기에 자주국방을 추구해야 한다. 셋째는 ‘부질없이 앉아서 갑론을박 토론만 하고 시간을 허송’해서는 안 되고, ‘정부와 군과 또 국민이 혼연일체가 되어서 힘을 하나로 뭉쳐 총력으로 대결’해야 한다는 것이다.8) 당시 국제사회에서 베트남전쟁이 부당한 전쟁으로 평가되었고, 그로 인해 한국의 위신도 떨어졌다는 것에 대한 사과는 없었다. 거기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실패한 전쟁에 참여해 목숨을 잃었던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사과라도 했어야 했다. 물론 사과는 없었다.
공교롭게도 위 인용문의 제목은 <베트남전쟁의 결과와 교훈>이다. 전쟁기념관 해외파병실은 올해 초 재개장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담화로부터 40년이 넘게 지났음에도 베트남전쟁을 바라보는 관점은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담화 당시는 박정희 정권의 비민주성이 극단으로 치달았을 때였다. 3선 개헌에 이은 유신 체제에서, 지도자의 입으로 강조되는 ‘지도자와 국민의 일치된 열망’이란 과연 어떤 의미였을까? 독재자는 다른 모든 열망들을 자신의 열망으로 덮어버린다. 그리고 자신의 열망에 이념적인 정당성을 부여한다. 그렇게 비민주성은 정당화된다. 민주정권이 들어선 지 오래인 지금에도, 안보라는 명분하에 다른 의견은 묵살해도 된다는 인식은 바뀌지 않았다.

영상 <우리가 기억해야 할 베트남 전쟁>의 한 장면
5.
“남베트남은 스스로 무너지고 있었다. 무능하고 부패한 지도자. 사회는 분열되고 시위와 소요는 끊이지 않았다. 군의 기강해이는 극에 달했다.”
“북베트남은 달랐다. … 꺼지지 않았던 독립 의지가 불탔다. … 북베트남은 민족과 평화의 논리로 미국 국민의 반전 분위기를 조성하여 미군의 철수를 유도했다.”
“베트남 파병은 한국의 위상을 국제사회에 새롭게 각인시키는 계기였고, 경제성장의 발판이었고, 해외진출의 첫 기회를 주었다.”
“통일된 베트남, 베트남 전쟁의 상처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베트남은 한국이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많이 찾는 나라이며, 수천 개의 한국 기업들이 베트남에 진출해 있다.”
“이제 한국과 베트남은 서로에게 특별한 전략적 동반자로서 세계무대에서 발걸음을 같이하고 있다.”
이 마지막 인용문은 베트남전 전시의 마지막 부분에 상영되는 영상의 내레이션 중 핵심적이라고 생각되는 문장을 따온 것이다. 영상의 제목은 <우리가 기억해야 할 베트남 전쟁>이다. 영상에서 남베트남은 무능하고 부패한 정권으로, 북베트남은 독립 의지를 가지고 국민의 뜻을 하나로 모은 정권으로 평가된다. 왜 무능하고 부패한 남베트남을 지원했고, 독립하려는 북베트남을 적으로 돌렸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렇게 보면 직후 베트남 파병을 통해 한국이 무엇을 얻었는지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전쟁의 정당성에 대해서는 할 수 있는 말이 없는 것이다. 전쟁의 부당함을 언급하지 않으면서 전쟁으로 얻어낸 것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은 비열하다.
충격적인 내용은 계속 이어진다. ‘통일된 베트남, 베트남전쟁의 상처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이미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이루어졌다는 반성이 학계와 시민사회에서 이루어졌고, 공식적으로는 아니더라도 완곡하게나마 몇몇 대통령에 의해 유감이 표명된 바 있다. 이러한 내용의 오류는 내버려 두고서라도, 적국으로서 참전한 국가가 이런 말을 발화한다는 것이 과연 가당키나 한 일인가? 끝맺는 내용은 베트남이 이루어 낸 경제성장, 한국과 베트남의 전략적 동반자 관계다. 난데없다. 전쟁의 과정과 참전국으로서의 반성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반성 없는 비합리다.
전쟁을 기념한다는 것
전쟁기념관이 보여주는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비합리성은 어쩌면 필연적인지도 모르겠다. 전쟁은 합리적이지 않다. 모든 과정을 고려하면서 합리적으로 결정해서는 전쟁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자국의 이익만을 위하는 이기적인 관점과 예측할 수 없는 우발적인 사건이 만났을 때 전쟁은 일어난다. 비합리적 과정은 전쟁으로 이익을 얻는 자들에 의해 은폐된다. 전쟁으로 인한 피해와 무고한 희생에 대해 이야기하는 목소리들은 ‘조국’의 이익 혹은 국가안보라는 명분에 의해 묵살 당한다. ‘조국’은 표면상으로는 포괄적이지만 실은 언제나 선택적이다. ‘조국’이 담지 못하는 이들에게도 ‘조국’을 강요하기 위해 비합리성은 정상적인 것으로 둔갑한다.
역사를 살펴본다는 것은 과거의 잘잘못을 따지는 일이다. 잘한 것은 계승하고 잘못된 것은 반복하지 않으면 된다. 그렇다면 전쟁기념관이 수행하고 있는 것은 역사를 살펴보는 일이 아니다. 반성할 것이 없는 역사는 없다. 전쟁은 더더욱 그렇다. 전쟁은 기념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반성해야 할 대상이다.
각주
- 박태균, <베트남전쟁>, 한겨레출판, 2015, 193p
- 같은 책, 166-169p
- 같은 책, 28p
- 같은 책, 231-235p
- 같은 책, 95p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증언을 통해 본 베트남전쟁과 한국군> 1,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01, 254p
- 박태균, 2015, 100p
- 같은 책, 31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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