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서연(페미니스트 문화연구자)
전쟁없는세상 주:
올해는 전쟁없는세상이 태어난 지 15주년 되는 해입니다. 15살 생일을 맞아 후원인들이 전쟁없는세상과 맺은 인연, 직접 바라본 전쟁없는세상의 활동, 전쟁없는세상을 후원하는 까닭들에 대해 정성스럽게 써주신 글을 블로그에 올릴 예정입니다. 두 번째 글은 전쟁없는세상의 오랜 후원인이자, 페미니스트 문화연구자인 조서연 님이 써주셨습니다.
2004년 봄, 서울에서 자취를 하게 되자마자 당시 봉천동에 있던 전쟁없는세상 사무실을 찾아갔다. 아는 활동가가 있었던 것도 누가 데리고 가 준 것도 아니었지만 그냥 무턱대고 갔다. 온라인으로 회원 가입을 해도 되는데 그때는 왠지 직접 찾아가서 후원회원 등록을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대체 왜 그랬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그렇게 한 2년 정도 전쟁없는세상의 활동을 조금 쫓아다니다가 학업과 생업을 핑계로 매달 후원금 자동이체만 한 게 오늘까지 왔다. 딱히 하는 일도 없는데 글을 써 달라는 연락을 받은 건, 흐릿하게나마 인연을 맺어 온 시간이 그렇게 쌓여와서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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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한겨레 21>에 실린 오태양 씨의 병역거부 소식을 통해 양심적 병역거부를 처음 접했다. 이후 줄이어 병역거부를 선언하는 여러 병역거부자들을 보면서 그것이 몇몇 사람들의 돌출적인 행동이 아니라 큰 물결을 이루는 활동임을 알게 되었다. 이것저것 검색해보다 찾아낸 ‘엄마 나 군대 가기 시러요’라는 노래도 함께 떠오른다. “왜 내가 군대 가야 해? 왜 내가 지켜줘야 해?”라고 내지르는 아나키스트 펑크밴드의 노래를 들으면서, 아무도 질문하지 않는 당연한 삶의 수순과 국민의 의무에 대해 이렇게 마구 따져 물을 수도 있구나 하고 놀랐다(당시 병역거부자들의 선언문은 상당히 진지해서 그런 노래와는 다소 멀게 느껴졌지만 말이다).
그때 나는 학교에 적응하는 데 실패해서 적을 둔 곳이 없는 청소년이었다. 양심을 지키기 위해 국가의 동원을 거부하겠다는 병역거부자들의 선언은, 조직에 속하지 못하고 겉도는 내 상황 역시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닐 수 있다는 걸 암시해주었다. 학교와 군대가 아주 비슷한 원리로 운영되고 있음을, 나아가 대한민국 전체가 고도로 군사화된 사회임을 발견해가면서 당시 내 생각이 그리 틀리지 않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내가 전쟁없는세상을 찾게 된 건 그 곳에 있는 사람들이 내게 어떤 공명을 일으켰기 때문인 셈이다. 사실은 그때의 내가 대단히 부푼 자의식을 가져서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지만(그 시절을 떠올리면 자다가도 이불을 펑펑 차게 된다!), 그렇게 전쟁없는 세상을 알게 되었으니 어쨌든 좋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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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조금 이상한 일이다. 생애 처음으로 뜬금없이 찾아간 사회운동 단체가 왜 하필 전쟁없는세상이었을까? 양심적 병역거부에 거부감을 가진 남자 지인들은 ‘너는 여자라서 군대도 안 가는데 왜 그런 데를 가느냐?’라고 묻곤 했고, 나는 그게 상당히 멍청한 딴지라고 생각하며 비웃었다. 잘 따져보면 꽤나 의미심장한 질문인데 말이다. 여자가 굳이, 왜?
페미니스트 연구자입네 하고 이런저런 글도 쓰고 말도 하고 다니지만 사실 나는 꽤 오랫동안 명예남성으로 살아왔다. 전쟁없는세상을 찾아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양심적 병역거부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그래서 중요한 문제이지만 젠더 문제는 부차적인 일인 것 같았다. 전쟁없는세상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이들 중 상당수가 여성이었음에도 의심 없이 그랬다.
다행히도 나는 당시 대학 내외에서 페미니즘 담론을 접할 수 있는 환경에 있었고, 여러 계기를 통해 점점 페미니스트가 되어갔다. 전쟁없는세상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할 기회가 찾아왔다. 가령 여성 활동가들이 남성 병역거부자를 뒤에서 지원하는 사람들처럼 여겨지는 데 대한 내부의 문제제기도 있었고, 사회가 요구하는 남성성과 불화를 겪는 과정에서 병역거부를 택하는 이들도 늘어나던 참이었다. 그 외에도 간단히 요약하기 힘든 여러 일들을 소식지를 통해 계속 접하고 있다. 페미니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러한 상황들을 의미 있게 인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전쟁없는세상을 통해 젠더 문제의 여러 차원을 접하지 못했더라면, 이 사회의 군사주의가 ‘정상적 남성성’의 구성과 깊이 결부되어 있다는 점을 깨닫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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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차저차 나는 군사주의와 남성성의 문제를 연구하는 페미니스트가 되었다. 사실 딱히 즐겁지도 않고 파면 팔수록 고통스러워지는 주제라 발가락만 잠깐 담갔다가 얼른 그만둘 생각이었다. 군복 입은 남자들로 가득한 매캐한 자료들 속에서 정말 하루라도 빨리 도망치고 싶었는데, 차일피일 어물쩡거리다보니 지금은 베트남전쟁의 문화적 재현에 대한 공부를 시작해버린 상태다. 잘 되진 않지만 일단 들여다보고는 있다. 아, 어쩌다 전쟁없는세상을 알게 돼서 코를 꿰여 여기까지 왔나…….

조서연 님은 페미니스트 문화연구자로, 대중문화 속 남성성과 군사주의를 파해치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전쟁없는세상 블로그에 기고한 드라마 <태양의 후예> 리뷰는 많은 사람들의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냈다.
이렇게 농담처럼 우는 소리를 종종 하지만, 전쟁없는세상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많은 것들을 놓치며 살았을까 싶다. 지금의 내가 페미니즘, 평화주의, 생태주의 등을 지향하게 된 계기의 팔 할은 전쟁없는세상과의 인연으로 만들어진 것이나 다름없다. 후원회원으로서 쓰는 글이라 부풀려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그렇다. 전쟁없는세상과 만난 이들은 어느새 그런 수순을 밟게 된다고 생각한다. 반군사주의와 평화주의는 외따로 떨어진 사상이 아니라 앞서 말한 모든 것들과 함께하는 세계관이자 실천이기 때문이다.
군대도 안 가는 여자가 군대 문제에 입을 댈 자격이 있느냐는 흔한 공격에 이제는 이렇게 답할 수 있다. 군대 문제는 겉보기와 달리 남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성차별과 군대 문제는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라고. 가부장적이고 이성애 중심적인 시스템 속에서 지금의 군대가 존재하고 있다고. 이 문제는 군사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동반하는 것이라고.
그렇기 때문에 나는 페미니스트로서 전쟁없는세상의 활동을 후원하고 있다. 지금보다 더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전쟁없는세상을 만나게 되면, 그리고 전쟁없는세상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페미니즘을 만나게 되면 좋겠다. 이 글에는 이렇게 마침표가 찍히겠지만, 전쟁 없는 세상을 향한 전쟁없는세상의 발걸음은 수많은 친구들과 손을 잡으며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