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우(《퀴어 아포칼립스》 저자)

 

 

2018년 서울 퀴어문화축제 메인행사가 열린 서울광장은 말 그대로 타는 듯한 열기로 가득 찼다. 휴대폰 신호가 잡히지 않을 만큼 많은 사람이 오간 현장에서 ‘전쟁없는세상’을 비롯한 여러 단체의 부스 행사가 펼쳐졌다. 해마다 축제 참가자들이 많아지는 모습을 보면서 퀴어 집단과 전체 사회와의 접촉면이 넓어지는 변화를 체감하고는 한다. 물론 축제에 반대한다는 명분으로 거친 말을 쏟아내고 심한 소음을 내는 반퀴어 집단도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 축제에 대한 반대를 신앙적 소명으로 내세우면서 한 손에는 정죄를, 다른 한 손에는 연민을 담아 기도하는 이들과의 불편한 만남은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퀴어한 몸들의 현실이기도 했다.

서울광장 안팎에서 펼쳐지는 다채로운 장면을 둘러보던 중에 시선을 끄는 피켓을 발견했다. 보수 개신교회를 배경으로 하는 어떤 반퀴어 모임에서 내건 피켓이었다. 「동성애를 반대합니다」 「양심적 동성애 거부」. ‘동성애를 반대한다’는 슬로건은 비록 문법적으로는 성립되지 않지만, 현재 대통령이 된 정치인이 대선 토론회 당시에 명확하게 선언했던 만큼 어떤 의미인지 얼마간 헤아릴 수 있었다. 그런데 ‘양심적 동성애 거부’는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쉽지 않았다. 해석하기에 따라서 양심과 신념에 근거해서 동성애를 ‘거부’한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 양심적 병역거부와 동성애를 모두 거부한다는 의미일 수도 있었다. 협소하게 본다면, 양심적 병역거부를 선택한 동성애자를 거부한다는 의미일 수도 있었다. 축제에서 봤던 많은 슬로건 중에서도 특히 이게 가끔 떠오르는 걸 보면 이 슬로건이 어떤 식으로든 나를 가리키고 있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양심적

자신의 양심에 따라 동성애를 거부한다는 것인지, 양심적 병역거부자와 동성애자를 거부한다는 것인지, 아니면 동성애를 거부하는데 그 동성애가 양심적이라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혐오세력의 피켓

 

가이사의 것, 하나님의 것

이 슬로건을 양심과 신념에 따라서 동성애를 거부한다는 의미로 해석해본다면, 병역거부자들이 겪는 것처럼 법적 처벌, 문화적 불인정, 사회적 배제, 경제적 불안정을 감내하면서 동성애로 대표되는 퀴어 변화에 저항하겠다는 보수 개신교인의 의지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보수 개신교인들이 활동의 정당성을 종교적 양심에 두는 일은 반퀴어 운동뿐만 아니라 여러 현장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익숙한 모습이기도 하다. ‘종교교육의 자유를 침해하지 말라’고 주장한 사학법 개정 반대 투쟁에서도, ‘태아는 하나님이 주신 생명’이라고 외친 낙태죄 존치 운동에서도 종교적인 동기와 정치적 행동은 적극적으로 결합했다. 종교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결합은 내부적으로는 신앙인들의 참여를 독려하고 외부적으로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비판을 무효로 돌리는 전략이자 주어진 상황을 개인의 종교적 신념과 종교 커뮤니티 내부의 결속으로 돌파하는 힘으로 작동한다.

비슷한 모습은 외국의 반퀴어 운동에서도 나타난다. 동성결혼 법제화가 이루어진 미국에서 동성 커플에게 결혼 증명서 발급을 거부한 서기관 킴 데이비스Kim Davis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발급 거부가 위법이라는 법원의 판단에도 데이비스는 ‘종교적 양심에 따라서 결혼 증명서를 발급하지 않겠다’고 고수했고 이에 구속되기도 했다. 동성 커플에게 결혼식장 대여를 거부하거나 동성결혼식에 쓰일 케이크 제작을 거부해서 차별금지법 위반으로 법적 분쟁을 겪은 여러 사례에서도 ‘동성애를 거부할 권리’가 종교의 자유, 양심의 자유, 표현의 자유에 해당한다는 주장이 반복됐다. 반퀴어 개신교인을 소수자에게 차별과 폭력을 행사하는 가해자의 위치에서 기본권을 침해당하는 피해자의 위치로 전환하는 서사는 이들을 ‘세속적인 사회에 맞서 진리를 따르는 거룩한 그리스도인’으로 격상한다.

반퀴어 주장이 양심과 신념으로 인정되어야 하는지, 양심과 신념은 어떻게 규정되는지, 양심과 신념을 드러내고 존중하는 일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 양심과 신념은 개인의 진정성과 확고함 주장으로 완결되는지, 누가 양심과 신념을 판단할 것인지 등의 문제는 단순하게 정리될 수 있는 것만은 아니다. 다만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동성애에 대한 거부’가 인격적 존재의 윤리적 확신을 표현하는 문제로 순진하게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점이다. 반퀴어 실천은 좁게는 동성애로 표현된 퀴어 집단이 인간으로서 가진 권리를 박탈하고 정지하는 데 지지를 표하는 행동이고 넓게는 특정한 몸을 배제하고 제거하는 것을 통해 위생적이고 안전하며 정상적인 세계를 만들겠다는 위험한 기획을 실현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표준화된 인간 규격에 들어맞지 않는 이유로 퀴어한 몸들을 지우려는 이들을 위한 자리는 마련될 수 없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양심에 따라 반대할 자유?

한편 이 슬로건에 대한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서울 퀴어문화축제가 열리기 얼마 전에 헌법재판소에서 대체복무제도가 마련되지 않은 병역법이 헌법에 일치하지 않는다는 역사적 결정을 내렸다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이 슬로건은 병역거부와 동성애를 모두 ‘거부’한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실제로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점차 개선되는 것과는 달리 대체복무제를 비롯한 관련 정책이 제도화되기 어려웠던 데는 보수 개신교회의 적극적인 반대가 큰 영향을 미쳤다. 전쟁을 억제하기보다 전쟁을 정당화하는 데 활용된 의로운 전쟁론, 군부 독재 정권에 대한 지지와 북한 체제에 대한 반대를 신앙적 원칙으로 삼아온 악습, 병역거부자의 많은 수를 차지하는 여호와의 증인 신자에 대한 이단 판정 등은 보수 개신교회가 병역거부를 죄악시하는 근거로 언급되고는 한다.

사실 그리스도교는 오랜 기간 병역거부에 앞장서온 종교로서, 평화의 길을 따른 많은 그리스도인의 저항이 병역거부의 역사에 오롯이 새겨져 있다. 예컨대 기록으로 전해지는 최초의 병역거부자는 북아프리카에 살던 성 막시밀리아누스St. Maximilian of Tebessa로 로마 제국의 징집 명령을 거부하고 21살의 나이로 순교했다. 성 막시밀리아누스는 성 마틴St. Martin of Tours과 함께 병역거부자의 수호성인으로 존경을 받고 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 근거한 병역거부자가 역사적으로 꾸준히 있었다고 할 때, 한국의 보수 개신교회가 그리스도인의 양심을 이유로 반퀴어 운동에 나선다고 할 때, ‘같은’ 양심과 신념에 따라서 병역거부를 선택한 이들을 공격하고 고립시키는 모습은 모순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떤 양심과 신념은 종교의 자유로 옹호하고 어떤 양심과 신념은 처벌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 슬로건이 병역거부와 퀴어 변화 모두를 반대한다는 의미라면, 이는 보수 개신교회가 양심과 신념을 편의주의적으로 다루면서 자신의 이해관계에 복무하는 의견만을 정당한 것으로 승인하는 자의적인 태도 이상을 알려준다. 어떤 면에서 양심과 신념을 주장할 수 있는 몸과 그렇지 않은 몸을 생산하고 위계적으로 배치하는 보수적인 문화정치학을 이 슬로건에서 읽어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병역거부와 퀴어 변화에 대한 반대는 ‘우리’(가족, 교회, 군대, 국가, 아이, 사회)의 안전, 번영, 행복, 미래를 위협하는 ‘그들’(병역거부자, 퀴어 집단, 페미니스트, 종북세력)에 맞서겠다는 다급하고 절박한 요청이자 종교적 양심과 신념으로 교회 안팎에서 유통된다. ‘우리’의 양심과 신념은 생명을 돌보고 가족을 사랑하며 사회를 수호하는 윤리적 선택을 가능하게 하는 것으로, ‘그들’의 양심과 신념은 ‘우리’를 오염시키고 허물어뜨리려는 교활한 주장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의미화된다.

정리해보면 ‘양심적 동성애 거부’ 슬로건에서 양심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고서는 존재 가치가 파멸하고 말 것이라는 내면의 소리’가 아니라 보수적인 신앙에 따라 구축된 도덕적 우주를 의미하고, 동성애는 동성에 대한 성적 지향을 지닌 이들이 아니라 우리를 파괴하는 그들 모두를 아우르는 포괄적인 범주로 기능하며, 거부는 특정한 입장이나 정책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그들을 비인간 영역으로 추방하고 그들에 대한 폭력과 차별을 영속화하는 정치적 행동을 가리킨다. 이 지점에서 나는 국방부가 제안한 표현 ‘종교적 신앙 등에 따른 병역거부자’가 떠올랐다. 양심적 병역거부자라는 표현이 국내외에서 공인된 용어라는 사실을 무시하고, 기본권에 속하는 양심의 자유를 제도 종교의 소속 여부로 환원하며, 결코 양심이라는 말을 쓰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 외에 아무 의미도 발견할 수 없는 이 표현은 어쩌면 반퀴어 집단을 지칭하는 용어로 더 적절하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종교적 신앙 등에 따른 동성애 거부자들, 혹은 퀴어 변화 항의자들protestants’은 어떨까.

 

“우리 모두는 고통스러웠습니다”

올해도 같은 슬로건을 마주할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반퀴어 집단의 조직적인 방해와 공적인 책임을 맡은 기관의 한없는 침묵이 계속되는 현실에 답답함을 느끼면서도, 평등을 향해 기꺼이 도전하는 이들을 만날 것이라고 기대해본다. 병역거부 운동을 비롯한 반군사주의 운동은 무고한 몸과 위협적인 몸, 바람직한 몸과 이상한 몸, 표준적인 몸과 잘못된 몸을 식별하고 분류하는 인구 배치를 거부해왔다. 퀴어 운동 역시 규칙을 거스르는 몸들의 정치적, 윤리적, 미학적 가능성에 주목하면서 정상성과 규범성, 인간성과 보편성에 대한 도전을 이어왔다. 기준에 도달하지 못한 이들,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여겨지는 이들, 국가에, 사회에, 교회에, 가족에게 미안해하라는 명령을 듣는 이들이 자신이 누구인지 증명해야 할 필요도, 누군가에게 양해를 구하거나 변명을 할 필요가 없는 세계를 열망하며 만난 축제의 현장에서 어떻게 공명할지 설렌다.

퀴어문화축제는 동시대적으로 벌어지는 변화를 상징하는 정치적인 공간이자 새로운 논쟁과 갈등을 촉진하는 생산적인 현장이다. ‘종교적 신앙 등에 따른 퀴어 변화 저항자들’이 풍성한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여지를 없애버리고 다른 세계를 실현하는 이들이 모인 사이공간을 파괴하는 현재, 반군사주의 운동과 퀴어 운동은 서로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까? 퀴어 병역거부자로서 나는 ‘다양한’ 삶을 축하하고 기념하는 것과 더불어, 혹은 더 정직하게 이야기하자면 다양성을 기념하는 것을 넘어서 ‘다를’ 수 있는 자유를 기뻐하는 자리를 어떻게 확장할 수 있는지, 체계 안에서 벌어지는 고통스러운 상황을 변화하기 위한 제도화의 움직임과 체계의 질서 자체를 바꾸어내려는 급진적 시도는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 혐오하고 배제하는 그들에 맞서 사랑하고 포용하는 우리를 긍정하는 경축의 시간과 퀴어한 삶의 양식을 탐색하고 길러내는 공간이 어떻게 중첩될 수 있는지에 대해 듣고 싶다.

평화시민 왕유쉔王郁萱이 병역을 거부하면서 했던 이야기를 인용하고 변주하면서 이 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아래 문단에서 활용된 모든 표현은 왕유쉔의 글에서 빌려온 것이다.

우리 모두는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렇게 우리 모두가 당사자가 되었습니다.

고통을 위로하고 상실을 애도하는 자리, 이분법적인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지친 서로를 격려하는 자리, 모두가 당사자로서 따로 또 같이 각자의 몫을 살아내는 자리, 나누어진 아픔을 행동할 수 있는 용기로 끌어안는 자리, 단절된 세상을 다시 연결하려는 자리, 폭력의 구조에 연루된 내가 무기를 내려놓음으로써 나에게서 변화의 가능성을 찾는 자리, 감수성과 상상력, 그리고 창조성을 일깨워주는 동료를 만나는 자리.

2019년 여름, 우리에게 다시 한번 소중한 기회가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