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길완(병역거부자, 민주화를위한변호사모임 간사)

 

1.
11월 25일에 군에 입대 하라는 입영영장이 나왔다. 병무청에서 요구한 양식에 맞춰 소견서를 적으며, 양심적 병역거부를 ‘언제’ ‘결정적’으로 결심했느냐는 질문 앞에서 내가 어떤 답을 할 수 있는지 고민했다. 사회 운동에 참여하면서부터? 스스로를 게이로 정체화하고 살아가면서 이 세상에는 차별과 폭력이 가득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 후로부터? 군대가 성폭력을 비롯한 인권침해가 자주 발생하는 공간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로부터?

“양심적 병역거부”라는 표현을 처음 접한 순간은 기억난다. 2012년 문재인 당시 대통령 후보가 “양심과 신념에 기초한 병역거부자에 대한 대체복무제를 도입하겠다”는 공약을 발표했을 때였다(그때 나는 문재인을 지지했었다). 그 당시에도 나는 질문이 봉쇄되고 위계와 복종이 상식으로 통용되는 군대에 갈 수 있을까…하는 ‘두려움’이 있었다. 중고등학생 때 학교에서 보낸 해병대 캠프와 병영체험을 겪으며 여기는 ‘사람’으로 대접받는 곳이 아니라 ‘물건’으로 취급되는 곳이란 생각을 하게 되면서부터였다. 하지만 당면한 입시를 치르고 대학에 진학해야 한다는 무거운 공기가 나를 짓누르고 있었기에 양심, 신념, 병역거부자와 같이 생소한 단어들에 대해 깊이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그렇다면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특정한 모델(종교적 신념을 가진 사람, ‘극단적’인 폭력의 상황에 매순간 놓인 이 등)이 있을 것이라는 현재 국방부와 병무청의 시각에 기초해서 보면, 그때의 나를 양심적 병역거부자로 정의 내릴 수 있을까?

‘언제’와 ‘결정적 계기’를 답하기 위해 애쓰다 보니, 나에게 남아있는 순간, 기억, 경험, 그리고 언어들을 어떻게 풀어낼 수 있을지 난감했다. 단 몇 개의 결정적 사건만이 양심적 병역거부를 하고자 하는 결심을 만들어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고민을 구체화 하게 된 것은 대학 진학 후 사회 운동에 참여해보고 싶다는 아주 ‘사소한’ 생각에서부터 시작한 학생회 활동, 여성주의 세미나 모임, 성소수자 동아리, 여러 이슈들에 대해 함께 목소리 내던 집회 등 구체적인 현장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성적 소수자로 살아가면서 ‘타자’로 위치되는 것에 저항했던 활동 현장에서 나‘만’의 권리뿐만 아니라 ‘타자’와 연결되어 활동할 수 있었던 경험들은 ‘정상성’에 기반한 위계와 그에 대한 복종, 공권력의 폭력 등을 고민할 수 있게 하는 연결고리가 되었다. 그 연결고리들 속에서 수직적이고 위계적인 문화를 당연시하고 폭력으로 상대방을 복종시키는 것을 ‘일’로 행하는 군대의 일원이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고 ‘평화’의 실천은 무수히 많은 질문과 답을 동반하는 과정이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병역의 의무와 신체검사의 절차, 일상화 된 군사주의 안에서 ‘군대’를 만나는 경험들도 나에게 남아있는 군대와 관련된 주요한 정치적 기억들이다. 그래서 특정하고 명확한 시점과 계기를 소견서에 담아야 한다는 병무청의 기준에 계속 얽매여 대답하는 방식이 내 안의 어떤 언어를 소거시키는지, 그래서 역설적으로 ‘명확한’ 양심과 평화적 신념을 소견서에 담아내는 것을 더 어렵게 만든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이는 “한반도는 학교, 회사, 교회, 가정, 관료사회 할 것 없이 일상 자체가 위계질서와 힘(폭력)의 원리가 지배하는, 전 세계에서 가장 군사화 된 지역 중 하나다(정희진)”란 분석처럼 나를 포함한 징병의 대상이 되는 ‘남성’이든, 누구든 간에 군대 문화와 군사주의로부터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자유로운 단독자로서의 개인은 없음에도, 군대의 존재와 군사화 된 사회가 너무 당연한 조건으로 형성되어 있어 누구나 연루되어 있지만 누구나 ‘군대 문제’에 대한 ‘발언권’을 갖지 못하게 되는 문화와도 연결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언제’ ‘결정적’으로 양심을 형성하게 되었냐는 질문에 답하는 것 대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런 것이다. 나 자신이 활동을 하면서 개인적(이면서 정치적인)인 기억들 속에서 쌓아온 언어를 기반으로 평화를 무엇으로 재정의했는지, 왜 군대 문화와 군사주의가 문제적이라고 생각하는지, 내 “평화적 신념에 의한 양심”을 무엇이라고 설명하고 싶은지 등 질문을 다시 쓰고, 내 스스로에게 그 답을 해나가는 것으로 이 소견서를 채우고 싶다. 그리고 나보다 앞서 평화를 고민하며 양심적 병역거부를 행하고, 평화의 길을 만들어 온 이들, 징병의 당사자가 아님에도 군사화 된 사회의 또 다른 당사자로서 목소리 내길 주저하지 않았던 페미니스트들, 반차별 운동에 함께했던 이들의 언어를 빌려 이 소견서를 쓴다. 내 주변의 동료, 지인, 가족, 그리고 병무청과 그 외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이 글이 내 스스로의 평화적 신념의 마침표가 아닌 공동의 언어를 함께 쌓아가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되길 바란다.
2.
고등학생 때, 아니 그 이전부터 나는 게이로 정체화했지만 중고등학교에서 커밍아웃을 시도하진 않았다. 청소년이 ‘사회에 때 묻지 않은 아이들’이라는 쉽게 통용되는 이미지와 다르게 이미 사회의 상식(=이성애중심적인 사회)을 체화하고 있었고, 동성애자라고 밝히는 것은 친구와의 관계가 전부라고 생각했던 그 시절에 ‘세계’를 잃어버리는 각오가 필요했다. 내가 겪은 남중남고는 지금 생각하면 웃길 정도로 서로에 대한 동성애적 스킨십이 넘쳐나는 공간이었지만 게이인 건 또 다른 문제였다. 왜 나는 내 스스로를 솔직하게 말할 수 없을까? 나와 어깨동무하며 노는 친구들만큼 남학생답지 못한 게 짜증나기도 하고 그래서 스스로의 탓을 많이 했었다. 이성애자였으면 질문 받지 않는 그 질문들은 졸업 후에도 계속 받아야 하는 것인가? 어쨌든 간에 내가 ‘남자를 좋아하는 것’ 만큼 나에게 중요한건 나를 둘러싼 관계들이었다. 게이임를 밝히고 살아가는 것은 그 당시 내가 생각하기론 사회적 죽음과도 같은 의미였기 때문에 언제가 될지 모르는 미래까지 보류하고 살아야 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게이라는 단어를 욕이나 유희로 여기는 상황들이 친구들 안에 있었기에 그 속에 속하면서도 디아스포라를 느껴며 내 존재와 욕구 그리고 내가 살아가는 사회에 대해 고민하게 만들었다. 아무런 ‘질문’도 주어지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고민할 필요도 없는 당연한 것들이 나에게는 ‘출근길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는 것’처럼 낯설게 보이는 것들이었다.

남중남고에서 싸움으로 권위를 얻어내고 그 공간에 중심을 얻어가는 과정 (“남자는 투닥거리면서 크지”), 그리고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와 성차별 (‘선생님’이어도 선생님에 대한 대상화와 엄청나게 ‘높은’ 수위의 성희롱적인 발언들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것),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멸시와 절대 동일시하지 않으려는 태도(“너 장애인이냐?”) 그리고 지금은 디지털 성폭력으로 불릴 수 있는 그 영상들을 돌려보고 성관계를 했다는 것을 자랑처럼 늘어놓는 과잉성애화되어 있는 그이들과 함께지내면서 ‘남성성’을 증명하는 그 문화에 전혀 공감도 못 하겠는데 그 상황을 마주칠 때마다 나도 모르게 하하 어색한 웃음으로 빠져나왔다. 청소년 때의 경험이 단순히 “동성애자로서 불행했다.”라는 말로 납작하게 정리될 수 없지만, 일단 그 사회에서 동성애자인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그 공간에서 배제되는 것이 조금은 두려워서 열심히 ‘이성애자’스럽고 ‘남자답게’ 행동하려고 노력했다(그렇게 될 수도 없고 그렇게 사는 게 역으로 나를 불행하게 만드는 일이라는 것은 시간이 지나며 알았지만). 그래서 중학교 2학년 때 수련회로 간 해병대 캠프는 어쩔 수 없이 강제로 가야했던 것이지만, 고등학교 2학년 때 학교에서 마련한 2박 3일 병영캠프 프로그램에 참가한 것은 내 ‘자발적’ 의지였다. 그 당시에는 군대를 갔다 오는 것은 ‘남성성’에 가까워지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고, 그것을 좀 더 일찍 체험해봄으로써조금 더 ‘정상’에 가까워지기 위한 노력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해병대 캠프도, 병영체험도 군대에 대한 불신과 분노를 키웠을 뿐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경험은 아니었다. 집단에서 배제되지 않기 위해 더 남자다워지려는 노력은, 애초에 그게 나에게 가능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미 다양한 생각과 차이를 지니고 있는 존재들임에도 불구하고 ‘남성성’을 체화하고 있지 않으면 존중 받지 못하는 그 집단의 문화가 누구를 배제함으로서 형성될 수 있는지 고민하게 만들었다. 또한 존중 받지 못 하는 공간에 속해있으면 ‘생각’이 어떻게 바뀌는지도 느끼게 되었다.

해병대 캠프에서 뚜렷하게 기억나는 것은 통나무 들기 같은 ‘극기 훈련’을 하면서 윽박지르고 소리 지르는 조교들이 무서웠는데, 가끔씩 ‘인간적’으로 복종과 훈련을 ‘설득’하는 조교들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내 스스로가 소름끼쳤던 기억이다. 근본적으로 생각하면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내가 왜 새벽부터 일어나서 통나무 들기를 해야만하는 거지? 이게 교육의 현장인가? 하나부터 열까지 이런 현장에 와 있다는 것이 말이 안 되는 일이었지만 PT 체조 동작에서 숫자를 제대로 못 맞추는 친구 ‘때문에’ 10번을 더 해야 해서 나도 모르게 느끼는 것을 인식하며, ‘군인이 된다는 것‘이 ’욕구가 거세된 물건이 되는 것‘ 과 ’폭력의 문제를 ‘남성’답지 못한 이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방식으로 내면화 하는 것‘은 아닌지 숙고하게 되었다.

해병대 캠프가 군인이 되는 것이 불의한 복종에 순응해야 하는 것임을 느끼게 했다면 병영체험에서의 경험은 위계가 존재하고 위력이 행사되는 것을 목격했다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그 군부대(사단이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에서 제일 ‘높으신 분’이 서울고등학교 출신이어서, 서울고 재학생인 우리는 그 부대에서 병영캠프를 할 수 있었는데, 그 곳에 있는 군인들로부터 일종의 귀한 손님 대접을 받았다. 아니 서울고 출신이 대체 뭐기에? 심지어 서울고를 다닌 적도 없는 군인들이 우리에게 이렇게 호의를 푸는가? 저 군인들은 밤늦게 까지 쉬지도 못 하고 저렇게 해야 하나? 저 이들은 짜증과 분노가 뒤섞여 있을 것이라 생각되는데 사단장은 ‘우리 서울고등학교 후배들’이 왔다고 좋아하고 챙겨주며 군인을 동원하는 것에 거리낌 없었다.

그리고 군부대 곳곳에 붙어있는 ‘적’에 대한 ‘살의’에 가까워 보이는 표어들을 보며, 제 시간에 맞춰 일어나고 ‘훈련’을 거침으로 그 공간에 있는 모두가 하나됨을 느끼도록 짜여진 일상표를 보며 이 공간에서는 어떤 인간상에 도달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 곳이라는 생각을 했다. ‘명령과 복종’, ‘하나 된 우리와 적’의 시선으로 인간 쓸모 여부를 분류하는 것 같았는데, 이미 ‘어떤 인간상’에 도달할 수 없는 나에게 있어서 그곳에 짧지 않은 시간을 보내야 하는 미래는 무엇을 견디고 무엇을 삭제해야 가능한 일인지 질문하게 만들었다.

조금 더 ‘정상’에 부합하고 ‘남성’으로 거듭나고 싶었던 나에게 군대 체험(체험? 이 기획을 어떤 선생님이 기획했는지 다시 생각해보면 피가 거꾸로 솟는다)이 깨우쳐 준 것은 이미 이상하고 비정상적인 정체성으로 여겨지는 나의 ‘일부’를 군대에서는 다 내려놓고, 불합리하다고 생각되는 일들을 기꺼이 해야만 하는 일로 받아들여야 ‘관심병사’가 되지 않고 잘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2박 3일이라는 시간이 너무 더디게 흘러가서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내 안의 여러 이야기들을 언제까지 유예시키며 살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병역의 의무가 이미 부과된 존재로서 징집에 응해야 할 때 내가 지을 표정이 상상되었다.
3.
그 이후 2013년 대학입학 후 정말 우연한 계기로, 아니 우연한 계기라기보다, 중고등학교에서는 하지 못 했던 것들 – 내가 생각하고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고 말아야겠다. – 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에 이런저런 공부와 활동을 시작했다.

그 해 있었던 5월 1일 노동절 집회에 학생회 사람들과 참석했는데, 그 날 명확하게 기억나는 2가지가 있다. 하나는 당시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이 대한문 앞에서 농성을 하고 있었는데 그 농성장을 ‘뽑고’ 화분을 ‘심는’ 광경이었고, 또 하나는 노동절 집회 마지막 결의문에 성적 소수자가 차별받지 않고 노동할 권리에 대한 내용이 담겨있었고 그 결의문을 당사자가 낭독하는 것을 생생하게 목격했던 것이었다. 전자의 기억은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의 삶과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이 어떻든 간에 꽃을 심어버리는 행동이 이토록 폭력적일 수 있나 싶었다. 공권력이 삶의 흔적을 지우고 목소리를 지우는 것에 가담하는 광경은 경악스러웠다. 그러면서도 후자의 기억은 나조차도 ‘노동자’를 어떻게 상상하고 있었는지 되물으며, 성적 소수자인 내가 (임금)노동자로서 어떤 세계에 살아갈지 전혀 상상이 안 되었는데, 집회에 모인 이들 중에서 직장을 다니고 목소리를 내고 있는 이가 존재한다는 것은 나의 앞으로를 상상해볼 수 있는 큰 위안이 되었다. 공권력의 폭력이 난무하던 그 곳에서 나와 비슷한 사람을 만났다는 안도감을 느꼈던, 그 날의 아이러니한 경험을 자주 곱씹는다. 이 세계가 차별과 불평등을 당연시하고 폭력의 사용을 정당화하는 장소라고 할 때 환멸과 분노를 느끼면서도, 그 순간 삶을 다시 붙잡고 이어주는 기억들이 무엇인지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안도할 수 있고 속하고자 하는 공동체와 그 가치가 무엇인지 말한다면 적어도 경찰병력이 농성장을 밀어내고 꽃을 심는 그러한 일에 가담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했다.

공권력의 폭력을 마주했던 경험에 대해 이 지면에 조금 더 담자면 : 세월호 참사 1주기 때도 그랬고 故백남기 농민이 쓰러졌던 민중총궐기 때도 대부분의 언론은 경찰병력폭도라는 이분법적인 사안처럼 마치 대등한 힘의 양 당사자가 극단적인 갈등을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보도했지만, 그런 게 아니었다. ‘우리’가 경찰처럼 물대포를 쏘았는지? 최루액으로 집회시위를 해산시켜 목소리를 묵살시켰는지? 5. 18 민중항쟁에서 진압된 이들, 4. 3. 희생자들의 모습들처럼 ‘우리’가 ‘적’으로 간주되었기에 진압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무엇보다 경찰병력과 ‘대치’하던 그 수많은 상황들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국민’에 대해 ‘국가’가 이런 일을 행할 수 있는 것인지 뿐만 아니라, 세월호 참사의 유가족들과 연대자들이 내는 목소리가 지워지고, 故백남기 농민께서 겪은 그 일에 대해 “공권력의 사용은 ‘합법적’이었기 때문에 뭐가 문제냐”는 목소리들이 난무했다는 것이다. 그 집회에 모인 이들의 요구 – 민중총궐기의 경우는 10대 분야 100대 개혁과제가 있었고, 세월호의 경우에는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재발 방지를 위한 안전한 사회로의 전환이었다 – 와 그 요구를 전달하기 위해 ‘청와대’로 가야하는 길목을 가로막는 공권력에 항의하는 맥락은 삭제되고, ‘법’을 위반했으니 진압당할 만했다는 이야기와 복면시위를 규제하겠다는 협박만이 남았다. 집회 참가 이후 경찰 조사와 재판 과정에서도 ‘불법’이 감행되게 된 원인이 공권력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엇을 요구했고 도로가 점거 되게 되었던 맥락들은 모두 삭제되고 ‘불법’행위에 가담했는지 안 했는지가 주요한 쟁점이 되었다. 군대에서 동성애자를 색출하는 일에 대해 어떤 사람을 ‘정상’의 범주에서 내쫓아 ‘타자’로 위치 짓고 처벌하는 권력이 ‘합법’(군형법 92조의 6)이기 때문에 문제없는 일이라고 정당화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싶었다. ‘합법’이 언제나 공권력의 무절제한 행사와 ‘타자’로 분류하는 권력의 정당성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분법적 경계에서 ‘우리’와 ‘타자’ 그리고 ‘적’을 분별해내는 그 권력이 지나치게 ‘합법’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폭력을 마주하는 것은 언제나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세월호 유가족이든, 연대자들이든 그 누구든 간에 공권력과 폭력에 의해 진압을 당하는 것은 무엇으로도 정당화 될 수 없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불평등한 위치에서 폭력이 행사되기 위해서는 폭력을 당하는 이들을 ‘사람’이 아닌 ‘적’과 ‘물건’으로 인식할 때 가능하다는 것을 느꼈다. ‘적’이든 ‘물건’이든 그렇게 인식되는 순간 그 이들이 갖고 있는 삶의 맥락과 목소리는 이미 고려대상이 아니다. 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아무런 상호 관계 안에서의 책임과 위치성, 그리고 인간적 감정들이 ‘없다’고 인식해야 가능한 일이라 생각한다. 나는 맘편히장사하고싶은상인모임의 상가임차인들이 쫓겨날 처지에 있어서 연대했을 때도 목적을 위해 ‘합법적’으로 폭력(경찰력 혹은 용역)을 동원하던 상황들 속에서 끌려 나가는 ‘우리’들 중 한명이었다. 생존권을 요구하는 임차상인들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마주해야 했던 것은 대화와 수용이 아닌 일방적인 진압이었을까.

이때에도 공권력이 ‘실수’할 수도 있지, 건물주의 지대는 무제한에 가깝게 보장될 수 있지, 그리고 ‘사회적 상식’에 문제제기하는 이들은 공동체의 질서를 위해 폭력적 방법으로 찍어 내릴 수 있지 라고 폭력을 정당화하고 내면화하는 태도들에 분노했다. ‘합법’이면 폭력을 가해도 괜찮은 것일까? 그럼 ‘불법’이면 항상 문제로 취급되어야 하는 것인가? 경찰 등 공권력이 행사하는 폭력은 ‘합법적’으로 인식하고, 사회적 소수자에게 가해지는 일상화된 폭력과 불평등한 조건들, 종종 소수자들의 존재와 행위가 ‘불법’으로 간주되는 이 상황이 문제적이지 않을까? 왜 당연한 상식이 도전받고 질문되는 것에 못 견뎌 하면서, 그 질문을 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삭제되는 것에 많은 이들은 동의하는 것일까. 누군가를 ‘적’으로 규정하고 ‘총’을 들어 살상할 수 있는 군대의 일원이 되는 것은, ‘적’을 분별하는 위계에 대하여, 폭력의 사용에 대하여 거부하는 나의 양심에 배치되는 일이다.

물론 이 기억들 속에서도 다른 용기의 실천을 느꼈던 적이 있다. 세월호 1주기 때 경찰병력이 연대자들을 연행해가지 못하도록 유가족들이 인간 띠를 만들어줬던 경험은 선명하게 그어진 폭력의 세계에서 용기를 행하는 ‘사람’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폭력으로 점철된 상황에서 용기를 행한다는 것이 ‘두려움 없음’을 뜻하지 않기에 더욱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아서 눈물이 났었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행했던 그러한 용기는, 내가 누구의 편에 서서 누구의 목소리에 함께 동참하고, 어떠한 사회를 실현하고자 하는지 까지 연결 지어 고민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세월호 1주기 이후에 내가 서 있고 싶은, 함께하고 싶은 자리가 폭력이 행해지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그 곳’이 아닌, 목소리 내지 못하는 – 종종 나 자신 – 이자 ‘타자’들의 자리이고 원하는 사회는 ‘모두가 배제되지 않는 지속가능한 사회’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질문이 봉쇄되고 항상 ‘적’으로 규정되기 가장 취약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자, 그렇게 취급되어본 적 있는 사람으로서, 누군가를 ‘적’이나 ‘타자’로 인식하여 살상할 수 있다는 폭력의 가능성이 상존하는 군대에 가는 것은 내 안의 ‘양심’을 삭제해야 가능한 일이라 생각한다.
4.
평화적 신념을 어떻게 형성해왔는지 주요한 경험 중 하나는 여성주의 세미나에 참여하고 성소수자 동아리를 결성하는 활동들 속에서였다. 여성주의, 퀴어 운동에 동참하며 배우고 실천하고자 했던 것들은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시각으로 세계를 인식하며 이 사회가 상상하는 ‘정상 시민’의 기준과 ‘보편’의 기준을 분석하고 ‘타자’를 분별하는 힘과 그들에게 가해지는 일상화된 폭력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가부장제적인-이성애중심적인-성별이분법적인 기존 사회의 문법과 권력을 바꾸고 새로운 사회적 정의를 만들어가기 위해서 다른 운동의 언어들과 함께 어떻게 사회에 개입해 나갈지 고민했다. 그렇기에 페미니즘, 퀴어 운동에 동참하고 그것과 연결된 평화 운동의 언어들을 통해 정의 내렸던 평화는 ’타자‘로 위치 지어진 그 자리에 안주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서로의 차이를 응시하고 차별의 지점을 공유하며 그 처지를 이해함으로써 당연하게 구획된 경계를 질문하는 ’과정‘이었다. 오히려 많은 이들은 ’평화‘를 갈등이 발생하는 상황과 존재하는 차이를 폭력의 사용, 발언권의 제약, 시민으로서의 자격 여부를 따지고 그렇게 무화시킴으로서 이륙할 수 있는 ‘상태‘로 정의 내리지만, 나는 그 평화적 상태는 폭력으로 다시 쓰여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가 구획 되어 있는 이곳에서 오도된 ‘평화적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리-국민, 우리-이성애자, 우리-비장애인, 우리-남성의 경계를 흐트트리는 소수자들이 공동체의 질서와 안보를 어지럽히기에 추방되어야 하는 존재이자 ‘무임승차자’로 취급되는 것으로까지 이어진다는 것이다. 일례로 서울퀴어문화축제에 성적 소수자 당사자이자 활동가로 2014년 이후 매 년 참여하며 항상 마주쳤던 혐오세력의 주장은 “동성애자는 정상인으로 교정되어야 한다.” 혹은 “동성애가 피땀 흘려 세운 나라를 망친다.”는 것이었다. 이 주장들에서 삭제되는 것은 성적 소수자 당사자들이 ‘비정상’의 범주에 갇혀있는 일상에서 겪는 문제들이다. 혐오와 차별의 시선 속에 만들어지는 청소년 성소수자 집단의 높은 자살률, 내 주변의 트랜스젠더 지인들이 성별정정을 위해 국가에서 특정 하는 몸으로 완전히 ‘전환’할 것을 강요받았던 일, ‘우리’에게 친밀함을 기반으로 한 ‘가족’과 같은 공동체를 형성하고 단결할 권리에서 배제된 상황 등은 이 사회의 ‘위기’로 조차 인식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내가 겪었던 병역자원으로 동원하기 위한 과정 중 첫 단계인 신체검사 절차 역시 사회적 소수자를 ‘정상인의 몸’과 그렇지 않은 몸으로 분류하는 과정으로 여겨졌다. 주민등록번호 앞자리 1번과 신체검사 판정에서 병역자원으로 가치 있는 현역 1급을 받은 것은 존재하는 다양한 삶과 존재를 1과 2의 세계로 나누고 역할을 부여하는 성별 이분법에 대해서, 군대의 목적에 따라 나의 의사와 상관없이 이미 배치되는 몸으로서 나 자신의 위치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도 심리 검사 설문지에서 “동성에게 호감을 느낀 적이 있는지”를 물어보는 문항을 보았을 때 이 질문을 답하는 ‘사람’을 ‘누구’로 상정하기에 가능한 질문이었는지 싶었다. 병역의 의무에서 애초에 배제되었음에도 ‘무임 승차자’ 혹은 권리의 주체가 아닌 ‘보호 대상’으로 이중의 편견에 노출되는 여성의 위치를 생각했을 때, 병역자원으로 선발하는 절차와 ‘정상 남성’으로 구성되고 유지되고 있다고 상상되는 군대가 어떻게 차별을 지속적으로 강화하는 장소인지 생각하게 되었다. 병역 의무 이행 가능한 ‘정상인의 몸’은 사회적으로 이미 형성되어 있는 ‘정상’의 기준을 반영함과 동시에 그 범주를 더 강화시켜나가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병역의 의무가 시민권과 연동되는 상황에서 병역의 의무에서 애초에 배제되거나, ‘정상적인 몸‘으로 분류되지 못 하는 ’비남성‘들은 사회적으로 어떤 차별에 노출되는가?

이는 식민지 역사, 한국 전쟁, 분단 등의 토대 위에 있는 한국 사회에서 자신과 생각이 다른 이들을 ‘빨갱이’로 낙인찍고, 편을 가르는 적대적인 군사주의가 일상에서 조차 나와 다른 존재에 대해 이분법적으로 인식하는 것을 ‘상식’으로 자리 잡게 하는데 영향을 미친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군사주의가 내외부의 ‘적’을 빠르게 ‘색출’하고 ‘처단’할 수 있도록 위계와 복종, 폭력을 통한 목적 달성, 이것을 효율적으로 행할 수 있는 ‘남성성’의 강화를 추동하고 이를 근거로 ‘정상 시민’을 중심으로 권리와 의무를 배타적으로 분배하는 힘이라고 할 때, 한국 사회는 이미 차별의 구조 속에서 수많은 이들을 ‘정상’과 ‘비정상’으로 나누고, ‘타자’로 배치된 이들을 ‘외부’로 끊임없이 추방해내려 한다는 점에서 군사화 된 사회다.

하지만 군사화 된 사회에서 차이는 지양되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고, 차이를 근거로 차등적인 권리를 부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는 것을 보며 폭력을 내면화 하는 것은 그러한 문화가 끊임없이 재생산될 뿐이라고 생각했다. “주인의 도구로는 결코 주인의 집을 무너뜨릴 수 없다”는 오드리 로드의 선언처럼, 각자가 지닌 차별의 ‘두려움’은 교차적인 억압에 대해 공동의 이야기를 지어나가며 새로운 사회적 정의를 요구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였다.

부양의무제와 장애등급제의 족쇄에 갇혀 지역사회와 격리된 시설에 수용되는 많은 장애인의 삶이 병역자원을 선발하는 신체검사의 장면과 성적 소수자를 ‘보이지 않는 자리’로 추방하고자 하는 차별적 언설들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장애여성이 시설에 나와 독립적이고 자립적인 삶을 영위할 권리를 이야기 할 때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 돌봄의 권리-돌봄의 사회화가 개인-가족에게 돌봄의 모든 책임이 부과되어 있는 현재 사회 시스템에서 노인, 성적 소수자 등 돌봄의 영역에서 배제되어 있고 돌봄의 단위를 구성할 수 없는 이들의 권리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60여 년간 여성의 임신중단 권리를 제약해온 낙태죄가 폐지되는 것이 성적 소수자와 HIV/AIDS 감염인 등 다른 소수자들의 성적·재생산 권리가 보장되는 것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휠체어 이용 장애인들이 엘리베이터도 없는 2층에 설치되어 있는 투표 장소에서 겪는 좌절이 공부상의 성별과 남들의 시선에서 보이는 자신의 모습이 불일치하는 트랜스젠더퀴어가 투표를 할 때 겪는 좌절과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 각자가 경험한 다르고 또 연결되어 있는 차별의 경험으로부터 출발하여 누군가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어떻게 모두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구체적인 현장 – 서울퀴어문화축제, 아이다호 집회, 차별금지법제정을 촉구하는 평등의 행진, 낙태죄 폐지를 외쳤던 헌법재판소 앞,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 폐지를 외쳤던 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집회 – 에 참여하며 깨달았다.

그리고 서울퀴어문화축제에서 소수자의 자리에서 피해를 증명하는데 그치지 않고 혐오세력을 가로질러 ‘끼 넘치게’ 행진 하는 이들 속에서 사회가 원하는 소수자로서의 모습인 ‘영원히 복구되지 않을 피해’를 입은 ‘무기력’한 모습을 거부하는 태도를 배웠다. 누구도 대표할 수 없고 대표하겠다고 이야기 하지 않은 성적 소수자들에게 조차 둘러씌워지는 불행으로 점철된 피해자의 모습 혹은 문란한 이들이라는 이분법적인 시선 속에서, 차별적 대우에 분노하면서도 잘 먹고 잘 싸우고 “평등을 향한 도전”을 멈추지 않는 이들과 함께했던 것은 시끌벅적한 평화적 실천의 감각을 만들어 가게 했다. 무엇보다도 기어코 행복하게 살아가겠다는 태도를 갖고 당면한 현실에서 변화를 만들어가는 이들 속에서 ‘아군-적’, ‘외부-내부’, ‘정상-비정상’ 등 끊임없이 이분법적 경계를 구획하고 그 경계들에서 소수자를 향해 가해지는 폭력은 설 자리가 없다. 그런데 이분법적 경계를 끊임없이 구획하는 것을 당연시 여기는 군대의 일원이 됨으로써 내 양심을 ‘멈춰’야 하는 것은 나에게 어떻게 가능한 일일 수 있을까?

울고 웃는 그 경험들 속에서 만들어간 나의 평화적 신념과 삶의 태도들이 군대 안에서도 여전히 유효할까? 강약약강으로 행사되는 용기 말고, 세월호 유가족과 서울퀴어문화축제 참가자들처럼 내가 용기를 내보이는 것이 군대 안에서도 가능할까? 내 안의 어떤 가능성과 목소리를 삭제하고 ‘타자’를 ‘적’으로 여겨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판단되는 그곳에서, 그리고 용기있는 ‘선택’이 사실상 불가능한 그 공간에서 잘 생존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가정에서 아버지의 폭력을 경험하면서 나를 살리고 폭력을 중단시킬 수 있었던 것은 ‘아들’의 자리를 묵묵히 지키는 것이 아니라, 집이었지만 ‘집’으로 느끼지 못하는 그 공간에서 뛰쳐나오는 결정이었다. 그래서 나에게 있어서 군에 입대함으로써 내 안의 어떤 가능성과 평화의 언어들을 ‘잠시’ ‘보류’하고 살아남기는 이미 나에게 ‘정답’이 될 수 없다.
5.
한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해 최근 하급심 법원에서 “양심적 병역거부에서 말하는 양심은 그 신념이 깊고, 확고하며, 진실하여야 하는데 그의 양심은 유동적, 가변적이고 상황에 따라 타협적이거나 전략적이어서 양심적 병역거부에서 말하는 양심에 해당된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얘기를 들었을 때 즉각적으로 떠올랐던 것은 성폭력 피해자에게 너 왜 그때 문제제기 하지 않았어? 라는 가부장제적 편견에 의존한 인식이었다.

군대라는 공간에 예견되는 폭력적 상황과 군사주의가 일상화된 사회에서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나누는 힘과 그 경계에서 발생하는 폭력을 거부하는 양심을 매순간 일관되게 실천하지 않았다고 추궁하는 것은 피해자에게 왜 “악 소리 내지 않았느냐”며 책임을 돌리는 언설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언설이 피해를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는 것의 문제도 있지만, 가해자의 책임과 폭력이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된 공간의 문화와 구조 성찰을 없는 셈 친다는 점에서도 문제적이다. 심지어 커밍아웃을 했어도, 안 했어도 성적 소수자에게도 끊임없이 악의적인 질문이 제기되고 답할 것을 요구 받는 것처럼 양심적 병역거부자에게 답하기 불가능한 질문들이 제기되는 것을 볼 때는 차라리 “내가 누구인지 설명하지 않겠다(권김현영)“는 태도가 제일 ‘평화’의 실천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래서 평화적 신념에 의한 양심적 병역거부자에게 질문되어야 할 것은 언제부터 신념을 구체화하고 어떻게 실천을 끊임없이 이어갔냐는 추궁이 아니다. 그것은 양심적 병역거부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풀어낼 일이다. 질문되어야 하는 것은 : 양심을 감옥에 가두는데 일조했던 사법부의 무능, 폭력으로 상대방을 굴복시켰던 역사와 그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문화, 소수자를 차별하고 배제하는 것을 정상화하는 군사화 된 사회, 안보와 공동체 수호의 유일한 적임자를 자임함으로 평화 담론을 독점해왔던 한국군의 자기반성 여부이다.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향해 ‘진짜’와 ‘가짜’를 판별해내겠다는 태도는 헌법상의 권리인 양심의 실천을 막아왔던 국가의 책임과 폭력이 재생산 되는 구조를 은폐하는 언설이다. 예 난민이 제주도에 도착했을 때 ‘가짜’ 난민과 ‘순수한’ 난민을 구별해낼 수 있다는 생각이 그들이 본국을 피해 한국 땅에 도착할 수밖에 없던 수많은 삶의 맥락을 모조리 삭제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인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폭력 사건에서의 전형적인 피해자의 상이 있다는 식의 인식이 더 많은 이들이 폭력과 불평등을 말하지 못 하게 함으로서 문제제기를 봉쇄하는 효과를갖듯, 전형적인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모델을 염두에 두는 것은 군대의 존재와 군사주의 그리고 폭력에 대한 아주 조금이라도 ‘다른’ 생각을 하는 이들을 다시 병역의 굴레에 가두고 질문을 봉쇄하는 효과를 가져 온다는 점에서 우려스럽다. 뿐만 아니라 이미 군사화 된 사회에 살아가고 있는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있어서 병역과 군대를 질문하지 못하게 만드는 부정적 효과를 확산한다고도 생각한다. 질문이 봉쇄된 사회가 ‘민주 사회’는 아니지 않은가? 무엇보다도 국방부와 병무청이 이해하듯 평화적 신념과 양심이 마치 특출 난 어떤 사람들에게서 타고난 것이거나, 전형적인 ‘피해자’로서의 서사를 가진 이들만이 갖고 있는 ‘어떤 것’이 아님을 말하고 싶다. 피해자 혹은 가해자로 태어나는 사람이 없듯 평화적 신념에 의한 양심은 삶의 연속성 안에서 형성되고 변화하며 실천되고 맥락적으로 구성되는 것임을, 그래서 반드시 명확한 언어로 조직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양심의 실현과 평화적 신념의 실천은 구체적인 상황과 맥락들 속에서 실천될 수도 있고 실천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에 대해서 여전히 “군대를 갔다 온 나는 비양심적 인간이냐?”라는 ‘양심’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낙인, 헌법재판소의 결정 이후에도 하급심 법원에서 유죄가 나오고 있는 상황들, 그리고 징벌적 대체복무제가 도입되는 것이 기정사실화 되는 상황에서, “너의 양심이 그렇게 진실하다면 이 어려운 난관에도 불구하고 한 번 해보라“는 태도는 ”군대는 원래 힘든 것“이라며 군인권의 진전에 일말의 도움도 안 될 뿐만 아니라 모두의 인권을 후퇴시키는 말과 무엇이 다른지 묻고 싶다.

또한 이러한 신념과 양심의 형성이 반드시 태어나면서부터 형성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타고 났다는 그 말은 내가 이제 배우고 경험해온, ‘타자’들 간의 연대의 가능성과 현실의 변화를 만들어왔던 이유들과도 배치된다. 앞서 밝혔듯이 이미 ‘소수자’라는 말 속에서 그것이 단순히 타고나는 정체성의 무엇을 표현하는 것만이 아니라, 권력 관계 안에서 ‘소수자’로 배치되는 위계와 ‘다수자’와의 관계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두렵기’ 때문에 ‘타자’와 연대하는 것이고, 이 공동체에 살아가는 한 명의 사람으로서 ‘몫’이 있다고 생각해서 운동에 동참하였던 것이며 그 속에서 평화적 신념과 양심이 형성되었다고 생각한다. 연결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회에서 우리 사회가 ‘사람’을 누구의 ‘얼굴’로 상상하고 있을까를 질문해볼 때 나는 ‘얼굴’로도 상상되지 못하는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이들과 함께 공동체의 사회 정의를 다시 세울 것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끊임없이 내고 싶다. 무엇보다도 폭력으로 누군가를 굴복시키는 공간의 일원이 되는 것이 그간 해왔던 활동과 경험에 기반 한 양심에 반대되는 것임을 이야기 하고 싶다. 그리고 내가 아닌 다른 많은 병역거부자들의 수많은 양심‘들’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 양심들을 신체검사 절차 과정에서 행정편의적으로 몸을 분별 해낼 수 있다는 생각처럼 천편일률적으로 판단되고 분류할 수 있다고 여기지 않길 바란다.

그리고 병무청에서 나의 소견서뿐만 아니라 부모 소견서, 직장 동료 소견서, 사회운동 경력 등 까지 요구하고 있다. 트랜스젠더의 성별정정에 있어서도 부모 동의서를 제출해야 한다는 대법원 예규가 삭제된 시대인데, 양심적 병역거부가 견고한 군사주의 구조를 해체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어떻게든 심사하려는 것일까? 하지만 내가 쓴 소견서뿐만 아니라, 엄마와 민변의 동료들이 쓴 병역거부 소견서들이 참고문헌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연결되는 글이 되어 더 많은 평화의 담론이 퍼져나갈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함께 활동하고, 서로를 존중하고 북돋으며 서로의 지지기반이 되어줬던 그이들과 함께 시끌벅적한 평화의 실천과 병역거부 선언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길 바란다.

이 소견서가 내 양심의 표명의 끝이 아닌 과거의 시간들이 쌓여 지금의 나를 설명하는 지표이자 함께하는 이들과 평화를 실천해 나가겠다는 다짐이라고 생각한다. 폭력과 위계로 점철된 군사화 된 사회의 ‘보편적 상식’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며 권력을 다시 재구성하고 다른 사회를 만들어가는 모든 이들에게 평화를 빈다. 무엇보다도 누군가를 착취하지 않아도 지속가능한 사회를, 전쟁과 폭력-차별과 배제로 죽음에 노출되는 것이 아닌, 우리 모두가 삶의 존엄을 이끌어가며, ‘마지막’을 진정으로 ‘선택’할 수 있는 사회가 도래하길 바란다. 앞으로 더 할 말이 이어질 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