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수경(〈드라마의 말들〉저자)
태초에 전쟁이 있었다
전쟁은 언제부터 존재했을까? <거의 모든 전쟁의 역사> 저자 제러미 블랙은 “무력 충돌 이야기는 종교가 존재해 온 유구한 시간과 연관될 뿐만 아니라 인류만큼이나 오래됐고, 사실 인류의 이야기이기도 하”기에 “인간의 경험과 떼어놓고 볼 수 없다”라고 전쟁의 역사를 갈음한다. 정말 그럴까?
‘상고시대(역사의 시대 구분에서 가장 오랜 옛날의 시기)’를 상상하여 구현한 드라마 <아스달 연대기>(2019년)와 후속작 <아라문의 검>(2023년)을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드라마는 첫 회부터 고대 가상의 땅 아스(ARTH) 부족들의 연맹인 ‘아스달 연맹’이 본래부터 그 땅에 존재했으나 ‘인간이 아닌 존재’라며 경계의 대상이 되었던 ‘뇌안탈’들을 멸족시키며 시작한다. 그 후 인간들은 지속적인 전쟁을 벌여 세력을 넓힌다. 즉, 전쟁은 어떤 존재를 적으로 만들어 멸절시키며 ‘문명’을 발전시켜 온 인간의 역사 자체인 것이다. 그러나 그 연맹도 오래가지 못한다. 인류의 첫 국가를 만들어 왕이 되려는 아스달 연맹장 타곤(장동건)이 처절한 전쟁을 벌여 연맹 부족은 물론이고 변방의 부족까지 섬멸하여 통일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인류 최초의 국가, 최초의 왕은 ‘전쟁’을 통해 탄생한 것이다. 즉, ‘아스달 연대기’는 ‘전쟁 연대기’이기도 하다.
한편 ‘문명’을 상징하는 아스 땅 바깥에는 이아르크 부족 와한족이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아스와 구분되는 대흑벽 아래 사는 와한족은 아스달 연맹과 대칭을 이룬다. 아직 농업이나 소유 개념이 없다. 힘으로 상징되는 남성 중심인 아스달 연맹과 달리 ‘씨족 어머니’ 중심 사회인 이곳에서는 아스달에서는 마땅히 죽었어야 할 불길한 존재인 인간과 뇌안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인간 ‘이그트(현대 사회의 사회적 소수자를 은유한다)’가 평화롭게 공존한다. 어떤 결정을 할 때 위계를 없애기 위해 서로 반말을 하는 ‘판결의 말’을 쓰는 이들에게는 이것이 ‘문명’인 것이다. 그곳을 정복하기 위해 원정 온 아스달 연맹이 “땅을 뺏으러 왔다!”라고 할 때 와한족은 그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다. “땅을 소유한다는 건 하늘과 바람을 가진다는 건데 어떻게 그게 가능하다는 거지?” 이렇게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와한족은 말을 타고 갑옷으로 무장한 채 철로 만든 날카로운 것을 휘두르는 아스달 연맹에 정복당하고 부족 사람들은 포로로 잡혀간다.
“신은 오직 약한 자를 벌하신다!” ‘아스달’로 상징되는 문명의 세계관이다. 그들에게 전쟁이란 기회다. 노예와 재물을 획득할 기회, 명예를 성취할 기회. 물론 이 모든 것은 살아남아야 얻을 수 있는 기회다. 그렇기에 전쟁은 잔혹하며 약탈적일 수밖에 없다. 살아야 하므로. 기회를 누려야 하므로. 이 세계관을 가진 곳에서는 전쟁을 다르게 상상할 틈이 없다. 아니, 전쟁을 다르게 상상하는 게 애초에 가능하긴 한가?

전쟁을 통해 국가를 세운 최초의 왕 타곤(장동건)
그리고 ‘다른’ 전쟁을 상상한 이들이 있었다
인류 최초의 왕 타곤에게는 양아들이 있었다. 이그트 배냇벗(쌍둥이)으로 태어난 둘 중 한 아이는 타곤이 키우고(사야), 한 아이는 와한족의 아이(은섬)가 된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사야는 문명사회의 세계관을 장착한 권력지향형 전사가 되고, 은섬(이준기)은 아스달 바깥의 부족을 통일한 전설의 인물이 된다. 그리고 은섬은 조금 다른 전쟁을 상상하고 구현하려고 한다. 그는 어떤 전쟁을 구현하려는 걸까? 은섬의 동료인 잎생은 이런 말을 한다. “나는 살아생전은 물론이고 옛날이야기에서도 ‘약탈 없는 군대’란 들어본 적이 없어. 그런데 은섬이가 그걸 하려는 거잖아. 이 정도는 해야지. 약탈을 안 한대. 쟤들 뭐냐. 대체 어떤 세상을 만들려는 거냐.” 그런 동료에게 다른 동료는 묻는다. “그래서?” 동료는 다시 말한다. “우리가 만들려는 세상을 보여줘야지. 다 같이 바라게 해야지.”
아스달이나 은섬이 이끄는 아고 연맹 모두에게 전쟁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의미는 달랐다. 아스달에게 전쟁은 빼앗고 누리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지만, 아고 연맹에게 전쟁은 나도 살고 동료도 지키는 것이었다. 은섬은 피할 수 없는 전쟁을 다르게 상상하며 구현하려 한 것이다. 약탈하지 않는 군대. 피해를 최소화하는 전쟁. 그에게는 그것이 자신이 만나고 싶은 ‘세상’의 다른 이름이었으며 ‘문명’이었다.
사야와 은섬과 같은 날 태어난 또 다른 ‘예언의 아이’ 탄야가 바라는 세상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아스달의 대제관(오늘날로 치면 ‘교황’과 같은 직위)이 된 탄야는 전쟁의 본질을 ‘공포’라 간파한다. 타곤이 계속 전쟁을 일으키는 것도, 백성들이 언제든 전쟁을 치를 준비를 해야 하는 것도 결국 두려움 때문이라 여긴다. 그렇기에 탄야는 말한다. “두려움을 버리고 증오를 거두어라. 우리는 그동안 두려워하는 모든 것을 파괴했고, 증오했고, 멸시했으며, 핍박해 왔다.” 탄야는 자신이 가진 신적 능력을 이용해 전쟁을 막으려 한다. “이 막을 수 없는 살육의 시대에 내가 할 일을 해야죠. 흰 늑대 할머니(아사 신)의 후예로서 신은 사람을 돕지 않는다고 사람을 돕는 건 오직 사람이라고 서로 돕고 베풀지 않으면 너희들 모두 끝장날 거라고 신의 아름으로 협박이라도 해야죠.”
비록 무수한 희생을 치르긴 했으나 은섬과 탄야는 최소한의 희생을 치르기 위해 자신을 던져 더 큰 전쟁을 막는 데 성공한다. 그렇게 전쟁이라는 ‘문명’ 대신 새로운 세상의 문이 열린다.

약탈하고 빼앗는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의 전쟁을 꿈꾼 탄야(신세경)
전쟁 없는 세상을 꿈 꿀 권리
이야기는 여기서 끝난다. 아니, 다른 시작으로 이어진다. 은섬과 탄야가 만든 새로운 세상에서 후퇴한 사야와 태할하(타곤의 정치적 파트너이자 최초의 여왕) 즉, ‘문명’을 잃을 수 없는 이들이 다시 아스달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을 시작할 것을 예고하며 드라마는 끝난다. 드라마가 멈춘 지점에서 그 이후의 이야기를 상상해 본다. 아마도 은섬과 탄야가 이룬 세상은 ‘사야’와 ‘타곤’의 후예들에게 정복되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전쟁이라는 개념을 신화나 고대 벽화에서 발견했을 테니까.
우리는 전쟁을 “인간의 경험과 떼어놓고 볼 수 없”는 문명으로 여기지만 <아스달 연대기>와 <아라문의 검>은 그것이 당연한 건가?라는 질문 앞으로 우리를 데려다 놓는다. “뺏기고 뺏고 싸우고 피를 뿌리고 복종시키기 위해서 때리고 죽이고 그렇게 할 거야? 시체의 산! 피의 강! 사람들의 울부짖음! 그게 옳아?”라는 탄야의 질문이 어디 그 시대에만 필요한 질문일까? “신은 자애롭지 않다. 자애로운 것은 너희 사람이다. 신은 돕지 않는다. 서로 돕는 것은 오로지 너희 사람이다. 너희들이 나고 자라고 사는 그 모든 것 중에 사람에 기대지 않는 것이 하나라도 있느냐? 그러니 너희는 서로 돕고 자애로우라. 그것이 너희를 돕는 것이다. 또한 너희들이 먹고 자고 입는 그 모든 것 중에 세상에 기대지 않는 것이 하나라도 있느냐 그러니 너희는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라.”라는 (다소 홍익인간 정신 같은) 탄야의 선포가 단지 아스달 사람들에게만 소용 있는 것일까?
그게 아니라는 감각이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전쟁 없는 세상을 꿈꿀 권리가 있다.
*설명 : <아스달 연대기>는 ‘예언의 아이들’인 사야, 은섬, 탄야의 성장기와 타곤이 최초의 국가인 아스달을 세워 왕이 되는 이야기를 다루고, 후속작인 <아라문의 검>은 타곤이 아스달의 왕으로 등극한지 8년이 지난 후를 다룬다. 이 글에서는 두 드라마가 모두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