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아영(피스모모 대표)

전쟁없는세상 주:

이 글은 문아영님이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2019 평화의 책 시상식에서 『3월 1일의 밤』에 대한 토론문으로 작성했던 초고를 수정, 보완한 글입니다.

 

3월 1일의 밤이 당겨 쓴 미래

가을이 한창이던 어느 오후,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에 계시는 이찬수 선생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매해 ‘평화의 책’을 선정해서 시상하는데 올 해 선정된 책이 『3월 1일의 밤』이라는 책이라고 어쩐지 그 책과 내가 어울리는 것 같으니 토론자로 오면 어떻겠느냐고 물어오셨다. 『3월 1일의 밤』은 권보드래 선생님의 최근작으로 3·1운동에 대한 10년간의 연구를 담은 책이다.

밀레니얼 세대로 분류되는 내가 1919년 3월 1일에 대해 기억하는 것들은 부끄럽게도 태극기, 유관순, 33인의 민족대표, 하얀 한복을 입고 만세를 외치는 사람들의 이미지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3월 1일의 밤』의 첫 장을 펼치던 순간부터 3월 1일에 대한 나의 기억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3월 3일에 잇을 고종의 장례 및 그 습의에 참석하기 위해 상경해 있던 사람들은 이 ‘소동’을 보며 처음에는 아마 어리둥절했을 것이다. 상복 복제가 공포되지 않았음에도 자발적으로 백립을 쓰고 인산구경차 상경한 촌로들, 그들 중 하나가 채만식에게 물었다. “여보 학생, 이 웬일이요?” 채만식의 대답은 간결했다. “조선이 독립이 되었습니다.” 70세도 넘어뵈는 노인은 잔뜩 겁먹은 얼굴이었는데, 채만식의 말을 듣고는 “당장 표정이 환희”로 바뀌었다. 감정에 복받친 듯 “어? 허어! 그럼…… 그럼” 하며 더듬거리더니 이내 지팡이를 높이 쳐들곤 “나두 만세! 만세!”하고 부르짖었다. (p.27)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 독립을 위해서 만세를 외친 게 아니라 독립이 된 줄로 알고 기쁨에서 차서 만세를 불렀다는 것은 지금껏 단 한번도 상상해보지 않은 시나리오였다. 3.1운동의 장면 속의 인물들이 모두 하나같이 독립에 대한 결기로 분연히 일어나 외쳤을 거라고 믿어왔던 나에게, 학교 교과서가 소개한 3.1운동 이상을 만나본 적 없는 나에게 이 장면은 충격적이었다.

<3월 1일의 밤> 표지

 

오지 않은 미래를 당겨 쓴 수행적 서술

이 노인 외에도 3.1운동 당시 많은 이들이 “조선의 독립은 이미 확정된 것으로 알고” 만세를 외쳤다고 했다. 만세가 울려 퍼졌던 곳곳은 3.1운동은 독립을 염원하는 이들과 독립을 선언하던 이들의 만세소리만이 아니라 독립이 이미 온 줄로 알고 환희에 차서 외쳤던 이들의 목소리가 한데 어우러졌던 것이었다. 저자는 이렇게 만세를 외쳤던 이들의 목소리를 “오지 않은, 그러나 와야 할 미래를 당겨쓰는 언어적 양식(p.33)”이라고 이름 붙이며 이를 “수행적(perlocutionary)”이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나는 여기서 ‘수행적’이라는 단어가 ‘performative’가 아니라 ‘perlocutionary’로 표현된 것에 주목하게 되었다.

젠더연구자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는 『젠더트러블』(주디스 버틀러 저, 조현준 역, 문학동네, 2008)
을 통해 ‘수행성(performativity)’이라는 개념을 소개했다. 존재의 “구성을 결코 한 가지 방식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면서 젠더 수행성을 “젠더가 곧 드러나게 될 어떤 내적 본질로 작동하고 있다는 기대, 젠더가 기대하는 바로 그 현상을 가져올 것이라는 기대”라고 설명한 것이다. 이 때의 수행성(performativity)은 반복적이고 의례적인 행위를 통해 젠더화된 몸의 양식화와 연관되어 있다.

저자가 주목한 “perlocutionary”라는 단어의 의미를 들여다보면 이는 ‘발화를 통해서 매개된다’는 의미로, 말을 함으로써 그것이 이루어진다는 뜻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나는 3.1 운동이 수행적이었다는 점에 매우 동의하면서도 저자가 굳이 언어를 중심으로 매개되는 수행에 대해 주목한 이유가 궁금했다. 왜냐하면 3.1운동의 기억은 팔 잘린 소녀(p.416)라는 상징을 담은 이광수의 시를 통해서 매개되지만 동시에 그러한 ‘시’는 결국 팔이 잘린 ‘몸’을 경과하지 않고는 만들어질 수 없지 않은가.

2013년 9월 임진강 지류 탄포천에 설치된 철책을 넘어 강으로 뛰어들었던 한 남성은 초소를 지키던 병사들로부터 수백발의 사격을 받고 그 자리에서 사망하였다. 그에 대해 알려진 것은 많지 않다. 이후 밝혀진 사실에 따르면 일본 정부에 정치적 난민 신청을 했다가 거절당하고 추방되었다는데 그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왜 북한으로 가고자 했는지 역시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부고가 전해진 후, 군으로서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다는 반응과 살인행위이며 과잉대응이라는 비판이 함께 있었다. 당시 총격을 가했던 초소의 초병들은 그 사건 이후 포상을 받았다.

 

탈분단의 시선은 어떤 미래를 당겨 써야 하나

“수백발의 총격을 받은 몸”과 “팔 잘린 소녀”는 어떻게 만나는가? 식민지라는 상황 속에서 독립을 염원했던 그들과 끝나지 않은 전쟁과 분단을 짊어지고 사는 지금, 여기의 ‘나-들’은 어떻게 만나야 하는가? ‘국민’의 완성과정이 곧 난민의 형성과정과 일치한다고 했을 때, 한국 사회의 내부와 외부를 구분하며 끊임없이 작동하고 있는 분단을 수행적(performative and perlocutionary)인 것으로 보려는 탈분단(post-division)의 관점, 목소리, 행위들은 어떤 미래를 당겨쓰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소식 하나 전하기 힘들었던 1910년대, “국제의 정세를 감지하고 독립의 가능성을 민감하게 포착한 여러 주체들은 연결 없이, 소통 없이, 동시다발적으로 ‘선언’을 계획했던” 사람들의 흔적은 지금, 이 곳의 일상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을까? 소식을 전하지 않기가 힘들어진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는 무엇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인가?

왕유쉔

왕유쉔은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 운동을 함께 해온 엄문희, 최성희와 함께 2019년 5월15일 병역거부 선언을 했다.

대만에서 온 왕유쉔은 그녀의 병역거부선언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군사기지는 군인들이 닫게 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함께 닫게 해야 하는 것이고 군사기지 안에 서있는 군인들에게 총을 내려라 말하기 전에 제가 먼저 총을 내려야 하는 것인 것 같습니다. 제 손에 실제적으로 총을 들고 있지는 않지만 제가 그 폭력의 구조를 깨지 않은 이상 제가 바로 그 사람에게 총을 들게 만든 사람 중의 한 명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저는 병역거부 선언으로 무기를 내리겠습니다.

평화는 마땅히 왔어야 하지만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해서 말할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누군가 세상에서 가장 급진적인 노래라고 말했던 존 레넌의 “이매진(imagine)”을 새삼스럽게 들여다본다. 천국도 지옥도 없고 그냥 하늘만 있는 세상, 누구를 죽일 이유도 죽음을 당할 이유도 없는, 국가도 없고 종교도 없고 소유도 없고 배고픔도 없는 세상을 이야기하는 일은 그저 ‘말’에 그치지 않는다. 조선이 독립한 줄로 알고 만세를 부르며 환희에 찼던 그 노인처럼 구체적인 언어를 통해 매개되는 일상이 나의 몸을 경과할 때 우리는 이미 그 세상을 사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