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곳에 온 지 3달이 된 요즘도 8월 21일 그날을 매일 떠올립니다. ‘진정한 양심’을 확인할 수 없다는 판사의 말을 끝으로 이곳에 구속되던 그 날을요. 조직권력과 집단주의로 무장한 이곳은 위에서 결정하면 무조건 한다는 조직구조로 개인의 무기력함을 키워내는 인큐베이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는 합니다. 매일처럼 법정의 그날을 떠올리면서 ‘나는 무기력해지지 말아야지’ 하며 다짐하고는 합니다.
그래서 더 치열하게 ‘진정한 양심’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내가 가진 양심은 정말로 진정한 양심이 아닐까 하는 생각부터 하나씩 꺼내가면서요. 이곳은 생각에 빠지기 참 좋은 장소이기도 합니다. ‘만약 내가 군대를 가면 어떨까?’ 고민했던 시간들, 군대를 가야만 하니까 어쩔 수 없다며 납득했다가 다시 부정했던 시간들을 회상해가면서요. ‘그 시간들이 내가 가진 양심을 진정하지 못한 것으로 만든 것일까?’ 하는 고민을요. 하지만 오히려 그런 고민의 시간을 통해 제 신념은 더 단단해졌습니다.
양심의 진정한 가치가 있냐 없냐를 따지는 일은 결국 병역거부자들을 법의 권력 앞에서 무기력하게 만드는 법력의 틀에 불과합니다. 어쩌면 지금까지 저는 그 틀이 되지 않기 위해, 그리고 틀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온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 이름 송상윤, 이 세 글자는 직업군인이셨던 할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으로 나라 송, 오히려 상, 이을 윤, 송씨의 집안을 이어가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집안의 유일한 남자로 태어났기에 가지게 된 이름이었습니다. 제 이름을 지어주시고 일찍 돌아가셨기에 할아버지께 직접 물어볼 수는 없었지만 어릴 적 처음 그 이름의 뜻을 알게 되었을 때 집안의 유일한 남자의 역할이라는 건 참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 제게는 항상 ‘남자’라는 말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습니다. 그리고 그 남자가 된다는 통과의례는 ‘군대’를 통해 완성되는 듯싶었습니다. 남자로 인정받는 군대를 다녀와야 이 사회의 일원이 될 수 있다는 가족들의 말을 그대로 믿으며 성장했던 어린 시절의 저는 수염이 자라는 나이가 되자 모든 것들을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누구일까? 미래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라는 생각이 그 소년을 사로잡기 시작하면서 매일이 당혹의 연속이었습니다. 거울을 바라보면서 조금씩 달라지는 모습은 또 얼마나 당황스러웠던지요. 나 자신에 대한 혼란이 가득하던 중학생 시기의 반항심은 ‘틀’을 거부하는 것으로 이어졌습니다. ‘매일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가는 이 모습은 내가 아니다’라는 생각을 시작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점점 커져서 학교를 그만두고 대안학교를 택하는 길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대안학교 생활은 제게 새롭고 신선했고 창조적이었으며 앞으로 살아갈 삶에 대한 아이디어를 만드는 시간이었습니다. 몇 년 후 성인이 되고 그 ‘틀’은 다시 찾아왔습니다. 대한민국의 남자로써 역할을 해야 한다는 틀이었고 이는 한국사회 모든 조직에 해당하는 문제였습니다. 당시 영화촬영팀 막내였던 저는 위계를 바탕으로 한 남성 중심의 서열화와 강압적인 문화로 당시 영화인을 꿈꾸는 제게 깊숙한 상처로 기억되게 되었습니다. 그 경험은 영화인을 꿈꾸며 가슴 설레는 미래와 희망 속에서 지내던 10대의 경험을 뒤로 하고 그 길을 포기하기로 결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때 저는 자연스럽게 ‘군대란 무엇일까?’ ‘그 틀 안에 들어간다는 건 무슨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라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고, 그 과정 속에서 <전쟁없는세상>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의 경험을 통해 전쟁 없는 세상을 향한 비전과 꿈을 이해하게 되었고 병역거부를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병역거부를 결심한다는 것은 불행하게도 징역을 감수하겠다는 의미였고 양심을 포기하거나 감옥에 가는가 하는 중대한 문제는 매번 입대연기를 반복하며 10여년 동안 고민해온 결정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미필자’로 10여 년 동안 사회생활을 하게 되었고, 이에 저는 ‘남자’가 되는 통과의례를 거치지 않은 남자로 살아가기보다 조직생활을 포기하고 독립적인 활동을 통해 사회생활을 하기로 계획했고, 밝게 빛나는 의미로 <루민>이라는 활동명을 통해 미디어 아티스트의 정체성으로 살아갔습니다.
태어나 이름이 지어지는 그 순간부터 언제까지나 제게는 남성이라는 그림자가 따라다니며 조직 권력과 정신의 틀 속에서 살아가길 강요해왔습니다. 제게 병역거부는 평화로 나아가는 양심의 실천이자 한국이라는 남성공화국이 시민사회로 바뀌길 바라는 열망입니다. 평화가 완성되는 체험을 꿈꾸는 우리 병역거부자들의 열망이 평화를 만들어 낼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병역거부자들에게 ‘요즘 군대’를 이야기하며 미성숙한 소년에서 벗어나 남자로 태어나길 요구해 왔습니다. 하지만 제 삶에서 가장 도전적이며 올바른 선택은 항상 틀에서 벗어난 미성숙의 시기에 있었습니다. 우리 사회는 병역거부자들과 같은 틀에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을 통해 새로운 삶을 향한 비전과 꿈과 계획을 만들어 낸다고 봅니다.
새로운 사회를 열망하는 몽상가의 독백이 되어버린 이 편지를 이만 줄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9.11.12. 송상윤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