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은 전쟁을 거부한다는 외침과 실천 하나로 한국에서만 수십 년 동안 ‘병역법’ 위반이라는 이유로 징역 생활을 감수해왔다.

전쟁을 위한 군사훈련과 집총으 거부하는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폭력으로 억압하고 처벌하는 한국의 형식은 오랜 시간 동안 국제 사회의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평화수감자들과 시민단체들의 오랜 노력으로 2019년 12월 대체복무법이 통과되었다.

 

나는 대체복무법이 통과되기 전인 2019년 8월에 재판을 통해 유죄가 결정되었으니 항소를 통해 바뀐 대체복무법에 맞추어 대체복무의 기회를 달라고 하였다. 하지만 그 결과는 항소를 받아주지 않는다는 의미의 기각이었다.

 

이미 1심의 재판을 통해 구속이 결정되어 의정부교도소에 구속된 상태로 재판을 받았으니, 항소심에만 6개월의 기다림이 필요했다. 지난 재판에서 ‘양심의 증명’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철창 속에 가두어진 나는 재판부에게 양심을 증명하기 위해서 주변인들의 진술, 평화시민활동 사진들과 작성했던 글들을 포함해 할 수 있는 모든 자료들을 재판부에 제출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항소심을 기각하였다. 이미 처음부터 평화적인 이유로 전쟁을 거부한다는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의 ‘유죄’를 확정해둔 재판이었기에 ‘양심의 증명’이라는 재판부의 요구는 이미 증명할 수 없는 요구였다.

 

나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감옥을 가야한다면 차라리 감옥을 택하겠다는 병역거부자들의 신념은 이미 그를 통해 ‘양심의 증명’이 된 것이다. 심지어 나는 감옥에서 재판을 했다. 더 이상 증명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러면 지난 12월에 바꾸니 대체복무법에 따라 대체복무를 하게 될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은 누구란 말인가? 지금까지의 정부의 방침들과 사례를 본다면 현재 한국의 대체복무법이라는 게 마치 여호와의증인을 위한 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양심을 증명’ 하라는 정부의 요구에 여호와의증인들은 교인증명서와 종교활동 증명서 같은 서류들을 제출하였고 이에 많은 수의 여호와의증인들은 종교적인 이유의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해 ‘무죄’를 선고 받았다. 양심을 증명해야 대체복무의 기회가 주어지고 그 양심의 증명은 오로지 종교 활동의 측면에서만 인정된다면 양심을 증명하라는 사법부의 방식에 커다란 문제가 있는 것이다.

 

어째서 양심에 따라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에 대한 이유는 개인에게서 나온다. 그 이유를 증명하라는 방식으로 단체의 활동 증명서 교인 증명서 같은 서류만을 인정하는 방식은 국가가 ‘양심’에 대한 이해에 앞서 큰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양심은 개인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이론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개인 내부에서 만들어 지는 것으로서 한사람의 지식, 욕망과 같은 것들도 양심을 중심으로 쌓여 나가는 것이다. 개인의 양심이라는 것은 모든 활동의 중심이 되는 인격의 뿌리라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의 양심은 가장 개인적인 것이다. 증명서와 같은 서류를 통해 개인의 양심이 증명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애초에 국가에 양심을 증명해야 한다는 요구가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다. 그렇기에 국가가 개인의 양심을 판단하여 유무죄를 결정하고 중형을 선고 하는 것은 침대에 사람을 눕혀 길면 자르고 짧으면 늘리는 푸르크루스테스의 침대를 두고 사람을 재단해 내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침대를 들이대는 이유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아직 무장한 평화의 시대이기 때문이라는 이유이다. 하지만 그 이유로 우리게에 주어진 병역의 의무란 것은 당연한 것일까? 우리 주변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군대라는 건 당연한 것일까? 왜 한국의 남성은 군대를 다녀와야 한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일까? 그 해답은 군대를 가지 않는다면을 가정했을 때 얻을 수 있다. 만약 군대를 가지 않는다면 국가 권력의 강력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 군대에 있어서는 어떤 선택의 권리도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입대가 아니면 처벌이라는 방식의 무의미한 공포가 입대를 앞둔 남성의 동기가 되는 것이다.

 

결국 개인의 이해관계 때문이 아니라 오직 절대적인 명령에 따르는 것이다. 그것은 권위이기 때문에 개인의 선택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그 안에서는 개인의 양심이란 존재할 수 없다. 그런 식의 권위를 따르는 것이 유일하다면 힘들 가진 이의 명령이 입대를 앞둔 이들의 양심의 결정을 만드는 유일한 길이 될 것이다.

 

하지만 개인의 양심은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다. 개인의 이상으로 하는 것이 정해지고 그 위에 양심의 판단이 작동하게 되는 것이다. 양심은 오직 가장 큰 힘만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내가 군입대를 하거나 거부하거나 하는 일들은 나의 양심이 정하는 바를 따르는 것이다. 만약 그저 강한 권력을 따르는 게 유일한 선택이라고 한다면 그 권력이 세상에 남은 유일한 양심적 존재가 될 것이다.

 

군 입대를 앞둔 이들의 선택이 오직 권력을 따르는 게 유일한 길이라면 결국 억압이 되고 그것은 국가의 비윤리적 행위에 불과할 뿐이다. 또한 오직 가야만 하기 때문에 가야한다면 그것은 권력에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바 당연한 것은 당연한 것이라는 관념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앞에서 개인의 이상이 정해지고 그 위에 양심이 자리를 잡는다고 이야기했다.

내게 그 이상은 ‘전쟁 없는 세상’을 이야기하고 행동하는 이들이었다. 평화를 이유로 병역거부를 하고, 감옥생활을 하던 수많은 평화수감자들, 전세계적인 평화운동의 노력들, 영화, 음악, 책들을 통해 새롭게 바라보게 된 평화의 관점들, 존 레논의 ‘이매진’ 가사처럼 전쟁 없는 세상을 상상하며 바라보는 세상에서 전쟁 없는 세상은 나의 이상이고 그것은 내가 사랑하는 존 레논, 조지 우웰, 스텐릭큐브릭과 함께 하는 일이었기에 비록 ‘병역법’ 위반으로 감옥생활을 감수해야 한다고 하더라도 기쁜 일이었다.

사법부는 권력을 앞세워 양심의 자유를 재단하려 하지만 그 억압은 내게 오히려 이상을 실현할 자유가 되었다. 나에게 있어서 그 어떤 권력에 의해서 제어되고 억압되어도 그 이유를 알기에 억압은 성립되지 않는다. 토크라테스를 독살한 아테네 사람들보다도 소크라테스가 자유의 인간이었다.

 

우리는 분단 국가라는 상황에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군대는 당연한 것이다라는 말은 한국 사회에 있어서 이견이 있을 수 없는 진리가 되었다. 이것과 다른 의견을 믿는다면 그 사람의 의견은 틀린 것이 된다. 나와 다른 의견을 내는 사람 그러니까 양심적 병역거부자는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틀린 것으로 보고 있다. 한국 사회 전체에 통용되는 군대라는 진리, 그것은 보편적 진리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진리에 대한 다른 인식과 해석이 불가능한 사회 다른 의견이 용납되지 않는 사회, 그것은 주체사상이 지배하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주요 체제이다.

 

니체는 그러한 통찰을 보고 신은 죽었다고 이야기했다. 니체의 말처럼 진실과 진리에 대한 판단은 결국 나의 입장이다. 보편적 진리라고 하여도 최종적인 판단은 나일 수밖에 없다. 나의 결정이 나의 이상을 따른다고 하여도 결국 나의 입장이다.

 

우리는 늘 군대에 있어서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나의 입장을 늘 예외로 두었었다. 분단 국가라는 이유로 병력을 충원해야 한다는 이유로 그저 당연하다는 이유로. 하지만 내가 서 있는 곳이 내가 보는 지점이다. 지금 당장 전쟁이 일어난다고 하여도 나의 입장은 총을 들지 않는 것이 평화를 지키는 일이라 여기기에 병역거부를 선택하는 것이다.

 

내가 있는 이 자리, 내가 서 있는 이곳이 평화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병역거부의 실천이란 그저 내가 있는 자리에서 할 수 있는 평화의 실천일 뿐이다. 그것이 비록 감옥을 감수해야 한다고 하여도 지금 내가 있는 자리에서 평화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게 내가 가진 양심이고, 양심의 실천이기에 병역을 거부하는 것이다.

 

 

  1. 4. 28 안양교도소에서 송상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