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 (전쟁없는세상, jungmin.duck@gmail.com)
코로나 시대 집콕 프로젝트 3번째로 조지 레이키(George Lakey)의 책 <How We Win: A Guide to Nonviolent Direct Action Campaigning>을 골랐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나의 관심사이기도 하고 4, 5월 서평을 썼던 두 책과 이어지는 내용이라 영어지만 막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앞의 두 책이 차례로 비폭력(비무장)민중봉기가 사회를 바꿀 가능성이 폭력투쟁에 비해 2배 높다는 것을 통계적으로 입증하고(<비폭력 시민운동은 왜 성공을 거두나>), 그 비폭력(비무장) 민중봉기를 2가지 조류(장기적 조직화를 기반으로 하는 앨린스키 접근법vs대규모 시위의 파괴력을 기반으로 하는 피벤 접근법)로 분석한 후 전술적 화합을 제시하는(<21세기 시민혁명>) 분석적 이론서들에 가까웠다면 조지 레이키의 책은 나와 같은 활동가들, 더 나은 길을 찾으려는 사람들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될 만한 실용서와 같은 책이었다.
저자는 책의 도입부에 이렇게 말한다. ‘이 책은 작은 개혁보다 크고 근본적인 변화를 얻기 위해 어떻게 사회운동을 만들 것인가를 적은 지침서이다.’ 저자 조지 레이키는 운동가, 사회학자, 작가, 교육자로서 1960년대 흑인민권운동에서부터 최근 퀘이커 직접행동 그룹 Earth Quaker Action Team(EQAT)에 참여하며 PNC 은행의 석탄채굴 기업 투자철회 캠페인을 승리로 이끈 60여년 간의 경험을 토대로 사회운동의 다양한 경험과 통찰을 이 책에 다 녹였다. 책이 다루는 내용은 구체적이고 광범위하다. 캠페인과 사회운동이 무엇이고 어떻게 디자인하며 캠페인을 수행하면서 예상되는 도전과제들은 무엇이고 어떤 원리로 세상이 바뀌는지를 다양한 사례와 트레이닝 툴, 활동가들의 생생한 인터뷰를 활용해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미국의 사회운동에 기반한 관찰, 평가, 제안이지만 많은 부분 다른 나라(지역)의 운동에도 적용될 수 있다. 책을 읽으면서 한국에서 사회운동을 하는 내가 꼭 명심하고 어떤 행동이나 캠페인, 운동을 조직할 때 참고해야겠다고 생각한 몇 가지 포인트를 정리해볼까 한다. 사실 이 모든 것은 이미 우리가 기획하거나 실행해왔던 행동, 캠페인들이다. 새로워서 정리, 소개한다기 보다는 정리함으로써 한국에 적용가능한 논리를 보강하고 이후 사회운동 전략화의 기초를 마련하기 위함이다. 또 그래야만 대를 이어 학습되고 시대에 맞게 덧붙여 발전될 수 있다. 매일 투쟁하고 많은 경우 실패하지만 잘 실패해 배우고 끝내 성공하기 위함이다.

조지 레이키의 책 표지 이미지
드라마가 이긴다
저자는 드라마가 없는 대규모 시위와 비폭력적인 드라마를 이용하는 중∙소규모 직접행동을 비교하면서 후자가 훨씬 잘 작동하며 사람들을 설득하고 장기적으로 요구사항을 관철시키는 측면에서 더 효과적이라고 진단한다. 피벤 스탈의 운동단체이지만 대규모 시위를 조직하기 어려운 전쟁없는세상과 같은 조직에게는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통찰이 아닐 수 없다. 드라마란 이런 것이다. 여호와의 증인이 아닌 최초의 공개적 평화주의 병역거부자 오태양은 입영일 기자회견을 열어 자신이 왜 입대를 거부하는지를 밝히고 노숙자 쉼터 ‘아침을 여는 집’과 ‘자비의 집’에서 자신만의 대체복무를 시작했다. 당시 한국 사회에서 병역을 거부하는 행위는 최소 1년 6개월 이상의 징역형을 살아야 할 만큼 중죄로 다뤄지지만 이미 국제적으로는 기본권으로 인정을 받아서 대체복무가 널리 시행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평화운동단체들은 말 대신 행동으로 보여주고자 했다. 오태양은 그 곳에서의 생활을 매일 일기로 써 사회와 소통하는 것을 통해 평화단체들이 생각하는 국방과 안보가 무엇인지 사회에 질문을 던졌다. 오태양과 사회단체들이 만든 이 드라마는 국방이란 무엇인가에서부터 살상을 배우거나 준비하는 것을 할 수 없다는 양심이 처벌받는 것이 당연한가라는 사회적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언론은 소위 군기피자에게 딱히 우호적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주로 지적장애를 가진 노숙 노인들의 쉼터가 만만한 일터가 아니라는 점, 집에서 나와 그 쉼터에 기거하며 활동을 할 거라는 사실 등이 평화운동단체들이 생각하는 국방의 의무에 딴지를 걸 수 없게 만들었다. 캠페인의 주장에 동의하는가 하지 않는가와 상관없이 생각이란 걸 하게 만든 것이다. 오태양이 만약 기자회견에서 자신의 신념만 말하고 말았다면 사회적 논쟁이 아니라 일방적인 매도가 되었을 것이다. 말보다는 행동이 한국 사회에 아주 생소한 주장을 잘 설명해준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드라마가 있는 직접행동이 행진이나 집회와는 아주 다르다고 본다. 행동 논리는 말하기보다는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것도 매우 이치에 맞고 논리적으로 말이다. 특히 1회성 시위, 행진, 집회와 같은 반복적인 전술은 숫자 게임을 자극한다는 문제가 있다. 다음 집회는 그 전 집회보다 규모 면에서 커져야 제3자와 언론이 계속 관심을 갖게 될 것이다. 이러한 1회성 시위는 많은 경우 지속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권력자들에게는 실제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실 일회성 시위를 통해 큰 변화를 겪은 국가는 없다고 저자는 못박는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산발적 항의에 참여하더라도 다들 언젠가는 집으로 돌아갈 것임을 권력자들은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이다. 캠페인의 주요 요구 사항을 관철시키려면 저항의 힘을 꽤 일정기간 유지해야 하며 그것도 일련의 행동을 고조되는 순서로 활용하는 직접행동 캠페인을 디자인해야 한다.
나를 비롯한 많은 활동가들은 어떤 사회부정의에 맞닥뜨렸을 때 기자회견이나 행진, 집회, 또는 준비하기 수월하고 익숙한 어떤 전술을 흔히 떠올리고 그 방식을 사용하게 된다. 때론 이것이 우리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들 이외에 사회운동이 승리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우리 편으로 끌어당겨야 할 제3자에게 별다른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다는 의심이 들기도 하지만 이런 저런 가성비를 생각하며 늘 익숙한 방식에 의존하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저자는 봉쇄와 같은 직접행동에 대해서도 같은 룰을 적용한다. 드라마가 없이 무조건 막고 보는 방식은 운동의 효과성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미국) 공화당의 전당대회가 벌어지는 장소 앞길을 막는 것이 예를 들어 마침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러 가는 길에 시위대에 갇혀 꼼짝할 수 없게 된 부모에게는 이치에 닿지 않는 행동방식이다.
책에 소개된 멋진 드라마 몇 편을 조금 더 감상해보자. 우리 캠페인에도 적용해볼 수 있으면 더욱 좋다.
- 우리 시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정보를 공개하지 않는다구? 그럼 우리가 직접 가지러 가겠어. (필라델피아의 카지노 프리 캠페인. 이 캠페인의 시작은 캠페이너들이 펜실베니아 게이밍규제위원회에 언제언제까지 카지노 관련 문서를 공개하지 않으면 직접 가지러 가서 대중에게 공개하겠다는 선언을 한 것이었음. 이후 그 결전의 날까지 캠페인은 매주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명랑한 액션을 선보였는데 예를 들면 양동이와 청소도구로 무장한 캠페이너들이 지역의 게이밍규제위원회 사무실에 찾아가 유리창을 청소하며 투명성 향상을 돕기 위해 왔다고 하거나 이 캠페인의 시그너처 액션도구가 된 엄청나게 큰 돋보기를 들고 사무실 앞에서 회의를 위해 게이밍규제위원회 사무실로 향하는 변호사들이나 위원들에게 관련 문서를 본 적 없느냐는 거리연극을 하는 식. 이 캠페인이 영리한 것이 게이밍규제위원회가 문서를 공개하면 캠페인이 승리하는 것이고 공개하지 않아도 애초에 게이밍규제위원회가 지는 게임으로 만들어버림. 공개하지 않았을 때 캠페이너들이 사무실에 들이닥쳐 최후의 결전을 벌이고 체포되는 드라마가 펼쳐지길 바라는 게이밍규제위원회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비슷한 직접행동이 캐나다를 비롯 다른 나라에서도 벌어짐.)
- 위생서비스가 제공이 안된다고? 그럼 우리가 직접 수거한 다음 누가 실제로 책임을 져야 하는지 보여주자. (필라델피아 북부 쓰레기 수거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자 캠페이너들은 직접 쓰레기를 수거한 후 그 비용을 시에 청구했고 이것이 거부당하자 수거한 쓰레기를 시청 계단에 버림.)
- 돈이 없으면 감옥에 갇혀야 해? 그럼 우리가 보석금을 마련하기 위해 돈을 모으자. (National Black Mama’s Bail Out Day, 집단 수감을 끝내기 위한 캠페인의 하나로 유, 무죄와 상관없이 돈이 없으면 감옥을 벗어날 수 없는 미국의 현실을 겨냥함. 어머니의 날에 맞춰 여성 수감자들을 위한 기금 조성. 딱히 위의 사례들과 같은 드라마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실제로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함.)

2001년 12월 12일 입영일 아침, 오태양은 논산행 입영열차에 오르는 대신 국가인권위, 병무청을 차례로 방문했다. 두 기관에 진성서와 호소문 접수를 마친 그는 서울 보문동의 노숙자 쉼터로 향했다.
비전을 보여라
한국의 평화운동단체들과 오태양이 만든 드라마는 비전을 보여주기 때문에 더 좋다. 물론 대체복무제도가 비전이라기보다는 비전의 실현 가능한 전략적 목표에 가까운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이를 사회운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직접행동을 반대하기 위한 행동 vs 촉진을 위한 행동으로 구분해 부르기도 한다. 전쟁없는세상이 발간한 <비폭력 캠페인을 위한 안내서>에는 이렇게 설명한다.
“반대를 위한 행동에서는 참여자들이 무엇에 동의하지 못하는지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촉진을 위한 행동에서는 참여자들이 어떠한 대안을 보여줄 것인지에 초점을 맞춘다. 이 두 가지 다른 행동 안에는 수많은 선택지들이 존재한다. 많은 경우 대안에 대한 계획이 가능하다면 긍정적인 이미지를 만드는 일은 무척 용이해진다. 반대를 외치는 것은 쉽고 흔한 행동이지만 종종 도움이 안 되거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가로막는 것으로 여겨질 때가 많다. 대안을 보여주는 것은 반대를 외치는 것보다 더 많은 노력이 요구되긴 하지만 사람들에게는 생산적인 이미지로 비추어 진다.”
책의 저자는 비전은 청사진이 아니고 원칙이기에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여 창의적인 의견을 제시하면서 진화하는 모델이라고 설명한다. 가끔은 평등이나 지속가능성처럼 비전이 너무나 당연해서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논의하지 않거나 확인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할 수 있다. 반대로 세상이 너무 거지 같아서 비전을 성취한다는 생각조차 완전 허무맹랑 해져 논의하거나 확인하는 것이 무의미 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저자는 비전을 세우는 것이 불필요한 갈등을 없애고 무의미한 타협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필요하다고 본다. 전략적, 전술적 의견의 불일치에서 오는 대부분의 조직간 혹은 캠페인간 갈등은 비전에 대한 상기를 통해 일정정도는 해소될 수 있다. 전략이나 전술은 비전보다는 하위의 개념이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에 비전을 생각하고 논의하는 것만으로도 생기는 긍정적인 분위기와 임파워링 효과에 대해 덧붙이고 싶다. 전쟁없는세상의 트레이닝 툴 중 ‘미래에서 현재로’라는 게임이 있다. 게임의 진행 방식은 이렇다.
- 10년 뒤, 20년 뒤에 달성하고 싶은 목표를 미리 정해두고 타임머신을 타고 그 미래에 도착한 후 성공을 축하하는 자리를 갖는다. 실제로 박수도 치고 축포도 터트리고 한다. 그러면서 지난 10, 20년을 돌아본다.
- 이 자리에 오기까지 어떤 사건들이 있었는지를 브레인스토밍 한다. 내부적, 외부적 변화 모두를 포괄한다. 사건 리스트를 모두가 볼 수 있게 적는다.
- 이후 이 사건들을 목표를 이루는데 ① 관계없음 (중립), ② 관계가 있음 (그러나 무시할 수 있음), ③ 영향력이 있음 (다른 충분 또는 필요 조건에 긍정적 ·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음), ④ 필요함 (목표 성취를 위해 꼭 필요하지만, 다른 조건들도 함께 필요함), ⑤ 충분함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이 조건만 충족되어도 충분함)으로 분류해 생각해보는 것이다.
이 게임은 장기적인 목표와 그에 따른 계획을 세우려 할 때 유용한 툴로, 사회변화가 달성되기까지의 과정을 상상하면서 가능성과 위험요소를 구체적으로 예측하고 사회 변화를 위해 필요한 과제들을 논의하며 여러 과제들의 우선순위를 꼽아볼 수 있도록 해준다. 물론 이 게임은 비전을 생각해보기 위해 원래 고안된 것은 아니지만(10, 20년 후의 목표가 어떤 악법의 철폐일 수도 있다) 요소는 충분하다. 노(NO)가 아닌 예스(YES)를 생각할 때 갖게 되는 에너지와 임파워먼트 효과는 트레이닝의 분위기를 즐겁게 만들어주며 사람들에게 무한한 창의력과 영감을 준다.
조직을 점검하라
책에는 EQAT 활동가 라이언 레이트너(Ryan Leitner)와의 대화를 통해 EQAT가 PNC 은행의 석탄채굴 기업 투자철회 캠페인을 승리로 이끌면서 내부적으로 어떤 전략을 취했는지가 나와있다. 이전까지 다른 퀘이커 그룹들이 주로 위원회(Committee) 위주로 움직인데 반해 EQAT는 더 많은 사람들을 이 캠페인에 조직하고자 코어팀(Core Team) 구조라는 생경한 실험을 시작한다. 코어팀은 짧은 시간 안에 특정 프로젝트에 착수하기 위해 배정된 소규모 자원 봉사자들 그룹을 지칭한다. 일반적으로 사무국 활동가의 지원을 받는 4~5명의 자원봉사자로 구성되며, 팀의 임무는 보통 직접행동 혹은 일련의 연속적인 직접행동들을 기획하는 것이다. 코어팀은 참여 방식(위원회는 참여가 공개적으로 요청되고 선발되지만 코어팀은 다른 팀원과의 케미 등 여러 다양한 조건을 고려해 초대되는 방식), 리더십 개발(위원회는 위원장이 있지만 팀에는 팀장이 없고 협력적으로 운영됨), 책무의 수준(많은 조직에서 위원회 멤버십은 기간이 길고 적은 노력을 요구하지만 코어팀은 기간은 짧으나 업무량이 상당하다)에서 위원회 구조와 차이를 보인다. 코어팀은 캠페인의 필요에 신속하게 대응하고 코어팀 참여자들에게 리더십에 대한 즉각적이고 구체적인 경험을 제공하며 “중견활동가”들의 소진을 방지하고 다양한 캠페인 기술을 가진 사람들을 구체적이고 단기적인 목적으로 함께 모이게 함으로써 더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의도적으로 기획된 내부 전략이었다. 저자와 인터뷰이는 이 코어팀 구조가 PNC 은행의 석탄채굴 기업 투자철회 캠페인 승리의 큰 부분이었다고 평가한다. 여러 코어팀이 동시에 진행되면서 새로운 구성원들이 코어팀으로 많이 들어올 수 있었고 이것을 통해 EQAT는 매우 성장 친화적인 조직이 되었고 캠페인에 필요한 여러 기술들의 학습곡선이 활발해졌다는 것이다. 반면 오래 활동한 중견 활동가들에게 부과되는 짐이 줄어들어 소진의 가능성은 줄어들었다.
전쟁없는세상은 2012년 단체를 재정비하면서 지금의 캠페인별 워킹그룹 구조를 갖게 되었다. 2003년부터 단체 창립의 이유이자 지금도 제1의 활동인 병역거부캠페인이 있고 좀 늦게 출발했지만 현재 전쟁없는세상이 메인 캠페인으로 키우고 싶은 무기감시캠페인이 있다. 이 이외에 2012년부터는 위 두 캠페인보다는 규모가 작지만(프로그램 코디네이터가 주 이틀 파트타임임) 두 캠페인의 방법론을 고민하는 비폭력프로그램까지 더해 현재 전쟁없는세상은 이 3가지 프로그램별 워킹그룹 구조를 중심으로 사업이 진행되며 단체 운영과 관련한 전반은 전쟁없는세상의 상설 의사결정기관인 운영위원회가 담당하고 있다. 이전에도 전쟁없는세상에 단체 구조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 체재가 확립된 후 확실히 각 캠페인이 보다 체계화 되었다. EQAT의 구조와 비교해보자면 전쟁없는세상의 워킹그룹은 활동기간이 길다는 것을 제외하면 위원회 보다는 코어팀에 가까운 그룹이다. 워킹그룹 멤버들은 신중한 고려를 거쳐 초대되며 그룹은 기획한 사업과 관련한 전권을 갖는다.
전쟁없는세상의 현 구조는 구성원과 단체의 사정에 따라 여러 번 논의와 조정을 거쳐 현재에 이른 것이고 미래의 전쟁없는세상은 어떤 모습일지 모른다. 다만 현 체제가 순전히 캠페인 위주라 단체의 관리업무를 담당하는 활동가가 따로 없는 것이 만들어내는 이 분야 아마추어리즘 혹은 공백이 있고(정의연 사태 이후 좀 우려스러운 지점이 생겨버렸다) 점점 미디어 활동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캠페인의 분야를 떠나 단체 내 미디어 전문가를 두어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도 잠깐 얘기가 오간 적이 있다. 또 전쟁없는세상 이외에 많은 단체들에서 하고 있는 고민일텐데 단체의 활동과 분위기가 더 이상 신입 활동가들에게 매력적이지 않고 신입활동가가 합류한다 하더라도 잘 안착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문제가 있다.
EQAT의 스토리를 읽으면서 전쟁없는세상은 과연 성장 친화적인 구조를 갖춘 단체인가 그래서 이러한 조직화를 바탕으로 캠페인이 점점 커지고 끝내 성공을 거둘 수 있는 구조를 갖췄는가 하는 고민을 해봤다. 사무국을 구성하는 몇몇 활동가들의 모임이었던 EQAT는 코어팀 모델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13개주에서 PNC 은행의 석탄채굴 기업 투자철회 행동을 벌일 정도로 성장했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단순참가 이상의 무언가를 과연 자신들이 할 수 있을까 의구심을 가지기도 했지만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만큼, 가능한 시기에 코어팀에 참여하며 운동근육을 단련했다. 이를 통해 캠페인에 꼭 필요한 통찰과 기술이 학습, 이전될 수 있었다. 책의 필자와 인터뷰이도 코어팀의 작은 규모와 확실한 임무, 그리고 처음부터 코어팀 참가자들이 개인적으로 팀에 참여하면서 무얼 배우고 연마하고 싶은지를 밝히는 과정이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전쟁없는세상의 메인 캠페인인 병역거부와 무기감시캠페인은 상설적이고 지속적인 워킹그룹이 존재하고 그 외에 병역거부자들이나 병역거부를 고민하는 사람들을 위한 모임을 비정기적으로 운영하고 있으며 2년에 한 번 진행되는 무기박람회 ADEX 저항행동에 참가단체나 개인참가자를 그때그때 모아서 진행하고 있다. 두 캠페인의 공통적인 고민은 모두 조직화가 확대되기보다 정체되거나 줄어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EQAT의 아이디어를 당장 가져다 적용할 수도, 적용한다고 꼭 또 똑같은 좋은 결과가 나온다고 보장할 수도 없다. 하지만 캠페인의 승리를 위한 조직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조직 진단이란 측면에서 고민해볼 수 있도록 해주어서 고맙다.
게다가 코어팀 아이디어는 EQAT에게 캠페인의 승리만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조직 내 갈등 또한 해결해 주었다. 사실 코어팀 아이디어는 조직 내 갈등에서부터 출발한 것이었다고 저자는 전한다. 당시에 EQAT 회의는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올 수 있었고 회의의 가장 기본은 캠페인이나 직접행동을 기획하고 준비하는 것이었다. 매번 참석하는 사람이 조금씩 달라지면서 단체 내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는데 이전 회의에서 결정한 사항에 대해 이해를 못하거나 반대하는 사람이 생기고 특히 예정된 행동을 수행하기로 한 날이 다가올수록 갈등은 걷잡을 수없이 커졌다. 평가회의 때마다 갖가지 비판이 제기되고 특히 비난의 화살은 단체의 붙박이인 사무국 멤버들에게 향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코어팀 체재로 내부를 개편하고 EQAT 사람들 간의 신뢰와 팀워크는 더욱 돈독해졌다.
전쟁없는세상에도 수습하기 어려운 단체 내 갈등으로 트레이닝 문의가 종종 들어오는 편이다. 들어보면 갈등의 원인은 매우 복잡하고 다양하다. 사실 전쟁없는세상이 진행하는 트레이닝 몇 번으로 이 갈등이 해소되거나 해결의 실마리를 뚝딱 찾기는 어렵다. 어떤 갈등의 원인은 제3자가 개입하는 것이 더 나을 때도 있고 어떤 원인은 제3자가 무용지물일 경우도 있다. 우리는 조직내 민주주의의 위기 혹은 갈등을 겪고 있는 단체들에 우리 생각을 솔직히 말씀드리고 조직의 구조나 일상적인 회의에 관한 점검에서도 실마리를 찾아볼 것을 권유드리는 편이다. EQAT는 조직의 구조를 코어팀 중심으로 바꾸고 갈등이 많이 줄어드는 경험을 했다. 조직의 내부적 문제는 다 다들 것이고 따라서 그것의 원인진단이나 해결책도 같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꼰대여서 문제인 팀장/동료도 조직이 어떤 구조에서 어떤 방식으로 회의하고 결정하는가 하는 내부 문화에 따라 적어도 일적인 관계에서는 꼰대성을 일정부분 덜어낼 수도 있다.
정치(인)와의 관계
미국의 정치는 기본적으로 세계 최강의 금권정치이다. 돈이 없으면 아무리 쪽수가 많아도 정치(인)에게 영향력을 거의 발휘하기 어렵다. 그러니 한줌의 사회단체나 노조의 영향력은 정말 별볼일 없는 편이다. 그래서 미국의 운동은 일단 눈에 띄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는 방식을 많이 사용한다. 21세기 시민혁명의 저자 엥글러 형제들에 의하면 피벤 스타일의 파괴적 전술을 사용하는 방식이다. 이런 미국에서도 운동의 요구사항이나 활동가들을 기존 정치로 흡수하려는 시도들이 있고 이것이 활동가들 사이에서는 꽤나 이슈가 되는 모양이다. 저자는 책의 말미에 이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 저자의 생각은 확고하다. 미국의 정치는 유능하고 의욕적인 활동가들이 끼어들어 바로잡기에는 너무 망가져버려서 거의 시간낭비에 가깝다는 것이다. 그 시간에 오히려 사회운동에 매진하는 편이 사회를 바꾸는데 훨씬 가성비가 좋다고 진단한다.
나는 기본적으로는 저자의 입장에 동의하는 편이지만 미국과 다르게 기성 정치에 진입장벽이 상대적으로 낮은 한국에서는 쉽게 ‘시간낭비다’ 진단을 내리기 어려운 측면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는 잘 모른다. 그런 제안을 받아본 적도, 진보정당이라도 어떤 정당조직에 가입해 정당운동을 해 본 적도 아예 없으니 고민이 없어서 그렇다. 하지만 내 주변의 많은 훌륭한 활동가/진보적 학자들이 사회운동을 떠나서 기존 정치에 뛰어들었거나 고민하는 것을 봤을 때 그들의 판단에도 나름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 기존 정치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확신이 있어서라기 보다는 오히려 사회운동이 세상을 바꿀만큼 충분히 강력하지 않아서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내 고민은 이 지점에 머문다. 만약 사회운동이 강력했다면 거래와 타협이 기본인 기성 정치에 뛰어들어 약간만 만족스러울 결과에 박수치지 않아도 됐을 수 있다. 사회운동만으로는 쪽박을 찰 것 같으니 그런 유혹도 생긴다. 만약 사회운동이 충분히 강력하다면 꼭 운동가 출신 정치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의 요구사항을 외면할 수 없다. 책에 나온 카지노 프리 필라델피아 활동가들은 캠페인 초창기 쉽게 정치인들을 찾아가 탄원을 하고 로비를 하는 대신 자신들의 힘을 키우고 캠페인을 단계적으로 확대하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 결국 그들이 정치인들을 찾아가기 전에 정치인들이 캠페이너들을 찾아왔고 그들은 좀 더 유리한 위치에서 로비를 할 수 있었고 좀 더 자신들이 원하는 것에 가깝게 요구사항을 관철시킬 수 있었다.
이 외에도 책은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사람들에 대한 현명한 조언으로 가득하다.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사회의 부정의를 SNS로 열심히 실어 나르는 것도 좋지만 그에 저항하는 사람들의 소식을 전하는 것이 더 낫다. 자신감과 운동의 역량을 과소평가하게 하는 정서적 사기에 빠지지 않으면서 승리를 위한 전략과 전술을 배울 수 있다. 분위기 자체가 지나치게 차별화를 추구하거나 상대에게 비판적인 단체는 매력적이지 않다. 물론 갈등이 있다면 직접적이고 정직하게 내부 갈등을 해소해야 하지만 그것과 이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등. 책 한 번 더 읽고, 고민 열 번 더 하고 한 번 훌륭한 활동가가 되어 보겠습니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