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수환(병역거부자)

 

 

몇 번이고 문장을 다시 써야 했다. 사실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자꾸만 조언하듯 일타강사연하는 짓을 멈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2월 25일 평화적 신념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에게 무심히 유죄 선고를 처리해 버리고 지나가는 대법원 선고를 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 병역거부자 중 한 명이 3월 12일 소환 통보도 없이 강제 연행되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한국 사회가 인정한 것이 군대를 거부할 권리, 군대 너머를 상상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 심사를 받을 권리, 자신을 시험대 위에 올려 놓을 수 있는 권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새삼스레 깨달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양심과 비양심을 가르는 협소하고 일방적인 기준을 바꿔나갈 수 있을까? 시험대를 깨뜨릴 수 있을까? 내가 대체역 심사의 소감 내지 후기를 쓴다는 것이 이러저러한 요령, 꿀팁 노하우를 제시하는 것에 그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한 마땅한 질문들에도 불구하고 나는 보잘것없는 경험이나마 잘 정리하고 싶었던 것 같다. 떨지 않고 시험대에 오르는 데, 자기를 잘 설명하고 증명해내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수사의 틀을 정해 놓고 약점을 찾아 공략하려는 듯한 경찰, 검찰 조사에 비하면 심사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 그 자체로 감지덕지한 일이긴 했다. 정해진 질문들에 답하는 방식이 아니라 홀로 차분하게 시간을 들여서 진술서를 작성하고 증빙 자료들을 모을 수 있었다. 조사관과의 1대1 대면 조사와 사전 심사위의 심사 모두 내가 제출한 진술서와 기타 자료들에 기반하여 구체적인 사실, 생각, 의미 등을 묻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사법 조사 과정에서 양심이 형성된 시기가 언제냐는 질문에 몇 날 며칠이라고 짧고 분명하게 이야기해야 했다면, 대체역 진술서에서는 양심이 형성되는 복잡하고 지난한 과정을 문단으로 서술할 수 있었고, 그에 대한 질문을 받아도 넉넉한 발언과 설명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내 이야기를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충분히 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을 경청하고 유심히 살펴보는 상대가 있다는 것만으로 생겨나는 안정감이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이야기와 생각을 얼마나 정확하고 논리적이고 일관되게 풀어낼 수 있을까 의문이 들기도 했다. 어렸을 때부터 모든 사람들에게 공공연히 신념을 밝히고 평화 운동을 줄기차게 해 온 사람이라면 문제없겠지만, 나는 스스로 활동가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활동가로서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병역거부를 했다기보다 병역의 의무가 먼저 주어졌고 고민하는 가운데 거부를 결심하였고 그렇게 평화주의 신념을 확립해 가는 가운데 활동 내역이 생겼을 뿐이었다. 양심의 외부 표출이 없던 시기들, 중간 중간 비어 있는 시기들에 대해 나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길을 걸으며 사람들과 대화하며, 잠이 오지 않는 밤 잠을 청하며 문득문득 느끼고 생각해 온 것들을 어떻게 추리고 정리하여 전달할 수 있을 것인가? 생각하는 방식, 책을 읽고 공부하는 방식, 관계 맺고 소통하는 방식, 사회를 바라보는 방식에서 조금씩 표출되고 다듬어져 갔던 나의 양심을 어떤 말과 글로 표현할 것인가? 법원에서 인정한바, 가정환경, 성장과정, 학교생활, 사회경험 등 전반적인 삶의 모습이 증거가 될 수 있다지만 사실 구체적인 자료로 남아 증거가 될 수 있는 삶의 국면이란 많지 않다.

결국 주변인 진술서에 빚진 바가 컸다. 10년 가까이 알고 지내 온 친구, 선후배, 동료들, 선생님들이 기꺼이 진술서를 써주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나의 양심을 다양한 각도에서 조망해 주었다. 몇몇 친한 친구들은 더 적극적으로 나서 성별과 연령대별로 폭넓게 진술서를 부탁하라며 조언하기도 했고, 몇몇은 거의 신원 보증, 빚 보증에 가까운 비장함으로 글을 써주기도 하였다. 개중에는 나보다도 더 나에 대해 잘 기억하여 잘못 알고 있던 사실 관계를 지적해 주고 집단 기억으로 서사를 보완해 준 이들도 있었다. 참으로 다행스럽고 운 좋은 경우이겠으나, 달리 말하면 결국 나의 힘만으로 부족했을 것 같다는 고백이기도 하다. 말을 할 수 있게 되자마자 말할 수 없는 것들이 함께 아른거렸다. 내 말과 글, 생각들에는 말 되어지지 못한 것들이 흔적처럼, 때로는 해질녘 그림자처럼 말보다도 더 길게 붙어 있었다. 그것은 나만 알아볼 수 있는 이야기들이자 나조차도 알아볼 수 없는 무언가였다. 그것을 말로 바꾸지 못한 것은 나의 부족함 때문도, 경청해 주는 이의 부재 때문도 아니었다.

나는 대체역 심사가 최대한의 공정성과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누군가는 거짓 양심과 병역기피자를 우려하며 3년의 복무를 무임승차라 비난하겠지만, 하나의 인생을 창조했다 할 정도로 모든 국면들을 내밀한 세부 사항에 이르기까지 지어내고, 어떤 상황에서 어떤 질문을 받든 똑같이 대답할 수 있으며,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증언과 증거들까지 확보한 희대의 사기꾼이 아니라면 그런 일은 발생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개개인이 아닌 우리가, 우리 사회가 조금 더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냥 군대 가는 것이 두렵고 힘들다고 말하면 거짓 양심의 병역기피자일까? 왜 두렵고 힘든지, 그 두려움과 힘듦의 실체에 대해 충분히 이야기되고 경청된 적이 있었나? 그 복잡미묘하고 다양각색일 감정들을 말로 바꾸어 내는 초인적인 노력을 개인에게 맡기는 것 자체가 폭력 아닐까? 군필, 군인, 예비 군인들도 쏟아낼 이야기들이 많을 것이다. 그렇게 군대가 바뀌어야 할 부분들은 재빨리 바꾸고 군대를 거부하는, 꺼리고 기피하고 겁내는 다양한 마음들을 함께 헤아려 볼 수는 없을까? 양심에 단 하나의 정답만 있는 것이 아니라면, 충분히 언어화되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 씨앗들을 쳐내고, 더듬더듬 표출된 양심들은 기준에 부합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떨구어, 창백하게 남은 양심만을 존중하는 사회란 너무 끔찍하지 않은가?

고 변희수 하사님의 부고 소식에 일주일 내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감히 비할 바는 못 되지만 나 또한 한 명의 성소수자로서 느끼는 감회가 있었다. 법, 제도, 원칙, 규정, 심사 등 한국 사회를 살아가면서 계속해서 맞닥뜨리는 어떤 틀들에 대해, 그것을 손쉽게 관철시키는 군대의 특수성이란 편한 변명들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남성 성기가 없는 것이 장애이고 트랜지션 수술은 고의로 신체를 훼손한 자해라서 군 복무에 부적합하다는 기이한 주장들이 말 되어질 수 있다는 것. 심지어 힘을 갖는다는 것. 군대의 특수성이 어떤 이유로 어떤 영역, 어떤 범위 내에서 한정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지 설명하는 사람도, 설명하려는 노력도 없다는 것. 그 사이에서 변희수 하사님께서 어렵게 꺼내 놓았을 이야기들은, 아직 말 되어지지 않았을 숱한 이야기들은…

법은 법이고 규정은 규정이라는 동어반복적인 논리들이 되풀이되었다. 그 앞에서 개인은 분열할 수밖에 없다. 틀에 맞추다가도 틀을 바꾸려다가도, 이야기를 깔끔하게 정리하다 그렇게 잘려나간 부분들에 멈칫하다가도, 구구절절 중언부언 지리멸렬한 내가 남는다. 어디에서는 급발진하고 어디에서는 기가 죽는다. 심사를 받는다는 것은 그런 과정인 것 같다. 제도의 공정성이나 합리성, 청자의 친절함이나 호의로 무마될 수 없는 고독한 사투가 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그 과정을 홀로 감당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족함이 있다면, 아직 충분히 설명되고 입증되지 못한 것들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모두의 몫이기에. 나의 이야기는 진술서에 갇히지 않는다고, 변희수 하사님의 이야기는 이제 다시 시작되고 있다고 그렇게 믿기에. 이야기는 몇 번이고 다시 쓰일 수 있고 함께 쓰일 수 있다고, 그렇게 믿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