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지우 (보드게임 디자이너) intothereign@gmail.com
1970년대, 세계 각국 정부는 전례 없는 에너지 수요에 직면하고, 이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도처에 오염을 일으키는 발전소가 건설되었다. 해가 갈수록 발전소에서 발생하는 오염은 증가했지만, 이를 줄이려는 노력은 거의 행해지지 않았다.
2010년, 조약이 체결되고 정상회담이 개최되었지만, 이로써도 부족했다. 증가하는 오염의 여파는 이미 너무 커졌다.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가 350ppm에서 400ppm으로 증가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인류는 우리가 대재앙을 향해 다가가고 있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이제 지구를 구할 두 번째 기회가 주어졌고, 우리에게는 새로운 청정 에너지원으로 에너지 수요를 감당할 의무가 주어졌다.
– 보드게임 <CO2: 두 번째 기회> 서문 중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지만, 보드게임 소개글 치고 사뭇 낯설고 비장하다.
2012년작 <CO2>는 보드게임 디자이너 비딸 라세르다(Vital Lacerda)의 초기작 중 하나로 기후위기와 에너지 문제를 테마로 한다. 작가는 깊은 테마를 묵직한 규칙에 멋스럽게 녹여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다룬 테마는 이 밖에도 포도주 양조(비뉴스), 미술관 운영(갤러리스트), 1755년 대지진 후 리스본 재건(리스보아), 화성 식민(온 마스), 전기 자동차 생산(칸반 EV) 등 다양하다.
재생에너지를 개발하라
<CO2>에서 플레이어들은 에너지 회사의 경영자가 되어 각국 정부의 요구에 부응해 재생에너지를 개발한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제안하고, 기반시설을 구축하며, 이를 바탕으로 재생에너지 발전소를 건설하고 숲을 조성한다. 그 와중에 과학자들로 하여금 연구를 진행하고, 로비스트들의 기대를 맞추며, 에너지 정상회담을 개최해야 한다.
흥미로운 점은 게임이 기본적으로 플레이어 간의 경쟁이면서 협력의 요소도 있다는 것이다. 증가하는 세계 인구의 에너지 수요에 맞춰 재생에너지를 개발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면 기후재난이 발생하고 화석연료 발전소가 추가로 건설된다. 만일 그로 인해 이산화탄소 농도가 2050년까지 500ppm을 넘기면 게임은 모든 플레이어의 패배로 끝난다.
2018년에 나온 개정판 <CO2: 두 번째 기회>에는 몇 가지 변경점이 있다. 규칙의 차이 외에 테마적으로 태양광, 바이오매스, 폐기물 발전, 상온 핵융합이었던 에너지 기술의 종류가 태양광, 수력, 풍력, 폐기물 발전으로 바뀌었다. 상온 핵융합이 빠진 점이 눈여겨볼 만하다. 또한 플레이어들이 모두 힘을 합쳐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완전 협력 모드가 추가되었다.
승리가 너무 어렵다?
그런데 <CO2: 두 번째 기회>에는 규칙상 작지 않은 ‘결함’이 있다. 게임에서 재생에너지 개발을 제때 하지 못한 지역에는 화석연료 발전소 타일이 놓이고,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가 증가한다. 문제는 타일 뽑기에서 운이 나쁘면 플레이어들이 무엇을 하든, 심지어 ‘완전히 협력’해도 2050년까지 이산화탄소 농도가 500ppm을 넘겨 모두가 패배할 수 있다는 점이다.
비슷한 문제가 경쟁 모드와 협력 모드 양쪽에서 발생하지만, 아무리 잘해도 운이 나쁘면 실패하는 상황은 특히 테마성 강하고 난이도 높은 협력 게임에서 심심찮게 있는 일이다. 하지만 경쟁 게임에서, 일단 세팅을 마치고 나면 미리 알 수는 없지만 불가피한 패배가 예정된 시나리오를 플레이한다는 것은 아무리 반(半)협력이라도 플레이어의 의욕을 상당히 떨어뜨리는 요소이다.
이에 대해 디자이너는 그것이 의도된 것이며 성공 확률이 25% 정도 되도록 게임을 설계했다고 밝혔다. 다만 게이머들의 의견을 반영해서, 특정 행동(UN 지속가능 개발 목표 이행)으로 이산화탄소 농도를 낮출 수 있게 하거나, 세팅 시 오염이 심한 발전소 타일 일부를 제거해 최악의 경우에도 ‘완전히 협력’하기만 하면 500ppm 이내에서 게임이 끝나도록 비공식 변형 규칙을 제안했다.
‘실패’하는 사회운동도 중요하다
게임의 테마를 생각하면 기후위기를 막기 위한 노력은 어려워야 마땅하고, 어쩌면 우리가 아무리 애써도 실패는 예정되어 있을지 모른다. 현실의 사회운동도 마찬가지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때로는 활동가로서 ‘실패’하는 싸움을 해야 할 때도 있다.
특히 군사주의나 신자유주의 같은 거대악에 맞서는 싸움이 단기간에 거시적인 성과를 내기는 어렵다. 예를 들어, 군사 기지 건설에 저항하는 선주민들의 투쟁이나, 국제 경제 기구에 반대하는 반세계화 운동 등이 ‘승리’한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5·18 민주화 운동처럼 눈앞의 생사가 걸린 경우에도 당시 광주 시민들이 계엄군에 맞서 승리할 것을 예상하고 싸우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운동 혹은 활동가의 목표는 무엇이고, 어떤 행동을 해야 할까? 우선 기지 건설 저지, 국제 기구 폐지처럼 너무 커다란 목표보다는 일정 기간 안에 달성 가능한 구체적이고 측정 가능한 의미 있는 목표를 세워야 한다. 그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전략과 전술을 세우고, 작은 행동들을 실행에 옮겨야 한다. 당초 계획에서 벗어나 지고 있는 싸움에서도 출구 전략이 중요하다.
이런 작은 운동과 직접행동이 가까이서 보면 실패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이 모여 거대한 구조에 균열을 일으키고 장기적인 운동을 성공으로 이끄는 큰 그림의 밑바탕이 된다. 시도가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지만 시도하지 않고 성공할 수는 없다. 그리고 설령 실패하더라도 모든 시도는 중요하다. 게임에서 승패에 관계없이 최선을 다하듯, 현실이 아무리 암울하더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