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인화(서울대학교 국사학과 BK조교수)
이 글은 <사회와 역사> 제131집(2021년)에 게재된 저자의 논문 “병역을 통한 시민자격의 형성: 1960년대 병역미필자 축출과 구제”를 토대로 작성되었습니다. 인용 및 자료의 출처 등은 해당 논문을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1960년 4·19혁명을 전후로 제기된 ‘아래로부터’의 병역미필자 축출 요구는 5·16쿠데타로 등장한 박정희 정부에 의해 ‘위로부터’ 전면 실현되었다. 이 글은 1960년 4·19에서 5·16으로 이어지는 시기의 병역미필자 축출 및 구제 조치와 함께 병역에 기초한 시민자격이 형성되는 과정을 추적한다. 또한 미필자 구제를 이유로 제시된 병역 ‘대체’ 개념에 주목하여 대체복무를 포괄하는 현재의 징병제가 가정하고 있는 ‘병역’ 개념의 형성 배경을 살펴본다.
병역미필자를 축출하라
해방 이후 한국전쟁을 거쳐 1950년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경제적 빈곤을 포함하여 다양한 사회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면서 일반의 분노가 축적되었다. 1960년 4·19혁명은 이렇게 누적된 분노가 공개적으로 표출되는 계기였다. 군복무자 남성들은 병역미필 공무원의 ‘축출’을 요구하며 대대적인 집단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고의적으로 병역을 회피한 자들을 포함하여 군복무를 마치지 못한 미필자들을 공직과 직장에서 추방하고, 이렇게 만들어진 자리에 군필자를 고용하라고 요구하였다. 대표적으로 1960년 8월 경남 거창에서 ‘병역의무미필공무원 축출투쟁위원’들이 모여 “병역기피 공무원을 즉시 파면하라”, “우리에게도 직장을 달라”고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같은 달 전남의 재향군인들 또한 “병역미필공무원 축출하라”고 요구하는 ‘데모’를 벌였다. 1960년 11월 충남재향군인회 회원들은 선전 차량에 올라 충남 각 군을 돌아다니면서 공직에 있는 병역기피자를 해임하고 그 자리를 재향군인으로 대체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렇게 ‘아래로부터’ 제기된 병역미필자 축출 요구는 1950년대 징병제도 운영 과정에서 누적된 병역 당사자들의 불만과 병역에 대한 인식을 드러낸다. 군복무를 ‘차별’로 인식·경험한 병역 이행자들은 병역을 마치지 못한 미필자의 직위를 해제하고, ‘재향군인’을 고용하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병역미필·기피자 모두를 징집해야 한다면서 지금까지 징병제 운영 과정에서 보였던 부조리를 해결하고 부정의를 시정하라고 하였다. 집단화된 병역미필자 축출 요구는 빈곤과 실업에 직면한 군제대자의 생존권 요구이자 병역 당사자의 응축된 분노에 기초한 ‘사회 정의’ 요구였다.
이처럼 4·19혁명 시기의 군복무자들은 병역이행이라는 (성)역할의 수용에 기초하여, 국가에 의해 부여된 ‘국민의 의무’를 이행한 자로서의 공식적인 인정과 지위 보장을 요구하였다. 미필자를 축출하라는 아래호부터의 요구는 병역이행자의 사회·경제적 우선권 보장을 통해 병역의 시민권적 지위를 확립하고 병역과 시민자격의 연관을 공고화하는 과정과 연결되어 있었다. 병역 당사자들은 미필자 축출을 요구하는 과정에서 이렇게 병역에 기초한 시민자격의 형성에 기여하는 동시에 ‘군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강화하면서 군사·안보 활동을 담당하는 ‘국가적’·‘남성적’ 존재로 구성되어 갔다.
5·16과 병역미필·기피자 축출의 전면화
4·19혁명 이후의 장면 정부에 이어, 5·16쿠데타로 등장한 박정희 정부는 병역미필 공무원의 무조건적인 해고를 단행하여 “병역미필자는 사회적으로 공민의 대우를 받지 못한다”는 방침을 전면화하였다. 그런데 장면 정부가 해임 대상자 선정 과정에서 미필자와 기피자를 구분하였던 것과 달리, 박정희 정부는 미필·기피자를 동일선 상에 놓고, 이들 모두를 일소되어야 할 ‘구악’의 대표로 삼았다. 또한 박정희 정부는 4·19 직후에 이루어진 장면 정부의 징병대상 공무원 조사 결과 및 재신체검사 결과 등을 모두 금권·결탁에 의한 부정의 산물로 취급하고, 미필·기피자 축출을 전면화하며 스스로를 ‘4·19 혁명정신’의 진정한 계승자로 자임하였다.
1961년 6월 7일에 열린 제14회 각의는 1929년 12월 31일 이후 출생한 징집연도 해당 공무원 중 군복무 미필자의 해임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1961년 6월 11일 김병삼 당시 내각사무처장은 공무원 대량 정리를 단행하여 모두 9,291명의 병역미필 공무원의 해면 조치를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군복무를 이행하지 않은 공무원들은 ‘병역의무 미필’ 또는 ‘일신상의 형편’ 등을 사유로 하는 사직서를 제출해야 했다. 사직서를 제출하지 않은 경우에는 직권 면직으로 해면되었다. 1961년 7월 7일을 기준으로 6,780명의 병역미필 공무원이 해면되었고, 1961년 6월 20일부터 7월 20일까지 1개월 동안 모두 7,571명이 병역미필을 사유로 해면되었다. 정부는 1961년 6월 20일부터 7월 20일까지 1달 동안 모두 35,684명의 공무원을 감원했는데, 병역기피·미필 7,571명을 포함하여 정부가 밝힌 감원 사유별 인원은 축첩 1,047명, 부정부패 1,676명, 정실 인사 관계 19,860명, 무능력자 908명, 근무태만 및 징계 686명, 기구 변동 3,236명이다.

병역미필 공무원의 사직서(1961년 6월)
자료: 국가기록원 BA0139341
1961년 6월 20일 제정·시행된 「병역의무미필자에 관한 특별조치법」은 미필자 축출 조치의 법적 기반이었다. “대한민국의 남자로서 병역법이 정하는 현역복무를 필하지 아니한 자를 공직으로부터 해면”(제1조)하여 병역의무를 “숭고하고 엄숙하게 인식”하도록 하려는 목적으로 제정된 특별조치법의 시행으로 병역미필자의 사회·경제적 지위 박탈이 법적 정당성의 외관을 갖추게 되었다. 하지만 신체장애 등을 이유로 현역 복무에서 제외되었거나 징집 순서에 밀려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병역을 마치지 못한 이들은 “억울하게 해면되었”다면서 해임 조치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병역미필자가 반드시 병역기피자가 아님”에도 5·16 이후 축출의 과정에서 미필자는 고의적으로 병역을 회피한 이들과 동일하게 취급되었다. 이에 병역미필로 해고된 당사자들의 호소에 더하여, 자의와 관계없이 병역에 복무하지 못한 이들이 “억울하다는 생각을 품”게 만들 수 있다는 사회 일각의 우려가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뒤늦게 「병역의무미필자에 관한 특별조치법」(법률 제789호, 1961.12.3)의 일부 개정으로 해고 대상에서 예외가 되는 ‘병역미이행’ 사유가 추가되었다. 그러나 해당 법이 이미 해고된 이들의 “공직 취임상 우선권을 부여하는 것은 아”니라고 해석되는 등 병역을 마치지 못했다는 이유로 해임되었거나 사직한 이들의 사회·경제적 지위 문제를 전면 해결하지는 못하였다. 법률 개정 뒤에도 고의적 기피자가 아닌 미필자들의 취업 및 복직 문제가 사실상 방치되면서, 병역 ‘미필’은 ‘기피’와 동일한 범주에 놓이게 되었다. 5·16 이후 무조건적인 해임 방침에서 제시되었던 미필자를 향한 태도는 사회적 분위기로 자리 잡아 병역 ‘미필’을 ‘기피’로 간주하여 직장에서 해고하거나 취업에 지장을 주는 양상이 지속되었다.
5·16 이후 가속화된 병역미필자 축출의 과정에서 병역 이행 풍토가 자리잡았다. 1960년 35%에 이르던 병역기피 발생률은 1961년 27%에서 1962년 6.9%, 1963년 10.2%로 급감하였다. 4·19 시기 아래로부터 요청되었던 병역미필자 축출이 5·16으로 전면 실현되면서, 병역 이행은 사회·경제적 지위 확보를 위한 기본 전제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리고 병역 불이행이라는 “꺼림직하던 생활에서 벗어나는 기회를 맞”은 병역미필자들은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자격을 회복해야 하는, ‘구제’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국토건설과 병역: ‘총’ 대신 ‘삽’을 든 청년들
박정희 정부는 축출 조치로 “사회적 불구자”가 된 병역미필자들이 사회·경제적 지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병역 이행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때문에 병력충원 계획과 관계없이 ‘국민의 의무’인 병역을 완수하지 못한 이들을 모두 징집하고, 다시 이들 중 대다수가 병역에 부적합하거나 불필요하다는 이유로 군 입대를 대신하는 ‘국가 봉사’의 의무를 부여하려 하였다. 이렇게 병역미필자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보류·박탈한 뒤에 이들의 신분을 회복시키는 ‘구제’의 과정에서 현역복무가 아닌 다른 방식을 통해 병역을 ‘상쇄(相殺)’·‘대필(代畢)’할 수 있다는, 병역 ‘대체’ 개념이 제시되었다. 다시 말해서, 병역미필자의 축출과 구제를 이유로 병역 ‘대체’ 의무 부여가 정당화될 수 있었다. 이처럼 1960년대 초반 박정희 정부의 미필자 축출·배제 및 구제·포섭 조치를 통해 권리 향유 이전에 의무 이행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의무에 근거한 국민 개념이 강화되고, 병역의무 이행이 사회구성원의 시민자격 획득·유지를 위한 기본 전제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1961년 7월 25일 기자회견에서 송요찬 당시 내각수반은 해면된 병역미필 공무원 및 병역미필 자수자들을 병력충원 계획에 따라 처리하되 나이와 징병신체검사 결과 등을 고려하여 “입대 대신에 국가에 봉사할 방법을 강구 중에 있”다고 밝혔다. 다시 1961년 8월 송 내각수반은 경제개발을 위해 병역미필자 중 만28세 이상의 징병적령자와 제2국민병, 징집면제자, 일반 지원자 등을 주축으로 다음 해인 1962년 ‘국토건설군’을 창설할 것이라 발표하였다. 이후 ‘국토건설군’은 ‘국토건설단’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이처럼 미필자에게 병역을 대신하여 제시된 국가 봉사의 의무는 ‘국토건설’ 작업이었다. 정부는 군복무 대상 인원이 실제 요구되는 병력 규모를 지속해서 초과하는 상황에서도 병역법에 명시된 복무기간 등의 규정을 준수하려하기보다, 현역 보충 뒤 ‘과잉된 자’와 징집면제자를 필요에 따라 활용하려는 정책을 폈다. 미필자 인력활용이라는 실용주의 방침은 ‘국민’이 되기 위한 ‘인간수련’ 과정으로 담론화되었다.
「국토건설단설치법」(법률 제779호, 1961.12.2)에 의하면, 국토건설단의 건설원은 병역법에 따른 징병적령자 중에서 1934년 12월 31일 이전 출생자로 징집되지 아니한 자와 현역병으로 부적당하다고 국방부장관이 인정한 자, 징병적령자로서 징집이 면제된 자, 근무동원에 관한 법령에 의해 동원된 자로 충당하도록 하였다. 건설원의 복무기간은 18개월로 하되, 지원자의 경우에는 12개월로 규정하였다. 건설원에 편입된 자가 복무연한을 마쳤을 때에는 군복무를 이행한 것으로 보고, 징집면제 조치가 필요한 이에 대해서는 징집을 면제하고 제1예비역에 편입하도록 하였다.

1962년 4월 국토건설단제2지단 입단식
자료: 국가기록원(CET0063045)

1962년 국토건설단 “병역의무를 마치기 위해 삽을 든 청년들”
자료: 경향신문 1962.12.29.
정부는 1962년 3월부터 17,000여 명의 건설원을 진주, 정읍, 춘천, 예미, 울산, 영주 등에 배치하여 국토건설사업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1962년 4월 24일 「국토건설단설치법」(법률 제1056호)을 일부 개정하여 국토건설단의 건설원을 군형법 적용 대상으로 규정하고, 규율과 감시, 강제의 강도를 높였다. “결코 징벌이 그 목적이 아니라는 당국자의 다짐”과 달리 “고의적이 아닌 신체허약으로 병·무종의 판단을 받은 병역미필자조차 동원되어 감당키 어려운 과로로 말미암아” 영주 5지단의 경우 76명의 늑막염 환자가 발생하여 거의 전원이 귀휴되는 등 불상사와 인권침해 논란이 거듭되었다. 국토건설단 운영 기간 동안 전체 귀향자는 건설원의 10%를 상회하는 1,658명에 달했다. 1962년 11월 30일 건설원을 전원 귀휴조치하기로 하면서 국토건설단은 사실상 해체되었다. 「국토건설단설치법」(법률 제1219호, 1962. 12. 17)」은 1963년 1월 1일자로 폐지되었다.
박정희 정부는 병역미필자의 인력을 활용하여 국토건설사업을 추진하려던 계획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공공사업에 미필자를 동원하려는 시도를 지속하였다. 국토건설사업을 시작으로 국토녹화사업 등으로 이어지는 1960년대 동안 ‘현역미필’ 상태에 놓인 이들은 언제든 병역을 ‘대신’하는 노무를 제공해야 하는 국가의 동원 대상자로 취급되었다. 그리고 축출·배제 조치로 시민자격이 보류·박탈된 이들을 구제·포섭하여 사회·경제적 지위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병역 ‘대체’ 의무의 이행이 필요하다고 강조되었다. 그런데 병역의무와 근로의무가 상호 치환·대체가능함을 전제로 “병역의무를 마치기 위해서는 삽을” 들어야 한다는 병역 ‘대체’ 개념의 제시되었지만 이러한 담론 행위에 상응하는 제도적 기반이 마련되지 못하면서 미필자의 사회·경제적 지위는 불안정한 상태에 놓였다. 역설적으로, 병역미필자의 지위 불안을 담보로 대체복무를 포괄하는 ‘병역’ 개념의 지속적인 제시가 가능했다.
한편, 박정희 정부는 1962년 병역법(법률 제1163호, 1962.10.1.)을 개정하여 1957년 병역법 개정 과정에서 도입된 학력에 따른 복무기간의 차등을 없애고, 병역의 ‘평등화’를 추진하였다. ‘총’ 대신 ‘삽’을 들라는 병역 ‘대체’ 개념의 제시와 병역의무 대상 및 내용의 확대는 ‘아래로부터’의 요청에 따른 ‘사회정의’ 구현이라는 차원에서 정당화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