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정훈(병역거부자)

 

 

철창과 담벼락으로 둘러싸인 세계를 떠났습니다. 꿈처럼 아득하게 멀어진 건 현실감각인지, 지나온 시간인지 알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함께 길을 나선 스무 명이 내뿜는 흥분과 조바심에 전염되지 않으려, 끝까지 차분함을 유지하려 노력했습니다. 매일 밤 꿈꾸었던 연인과 가족과의 감격스런 만남을 코앞에 두고 지난 시간을 더듬었습니다. 감옥 세계에서의 시간이 아니라, 제가 일상을 잃기 직전의 시간들 말입니다. 제가 누구였고, 어떤 표정을 지었고, 무슨 단어를 즐겨썼는지 회상했습니다. 그간 많이 달라져서 저를 알아보지 못하면 어떡하나 조금 걱정했습니다. 잠깐만 상상해도 슬픔이 한껏 차오르던 재회의 순간, 막상 눈물이 한 방울도 나지 않아 당황했습니다. 오로지 환희로 가득해 다른 감정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었습니다.

지금 제 기억은 딱 거기까지입니다. 바깥 세계의 따뜻한 온도로 혹한의 시절이 눈 녹듯 사라진 것만 같습니다. 거짓말처럼 진짜 봄이 찾아왔고 영하권의 날들이 커튼을 닫았습니다. 벌써 감옥에서의 기억이 어렴풋이만 떠오릅니다. 천천히 되새기면 당연히 잊기 어려운 이름과 그와 얽힌 이야기들이 다시 나타나겠지만, 이제는 굳이 그럴 이유가 없습니다. 만 1년에 가까운 시간을 채웠을 뿐이니, 감옥 이야기를 무용담처럼 늘어놓는 일은 하지 않겠습니다.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 지난 삶과 단절하는 데 도가 튼 사람이라 그런지 꽤나 잘 헤쳐나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랜 시간 떠나있던 공간으로 돌아와 잃어버린 모든 걸 하나씩 주워담고, 다시 제자리에 놓으려 애쓰고 있습니다.

분명 순탄하게 복귀할 거라고 기대했는데 이틀만에 배탈이 나서 약을 지었습니다. 기다랗게 늘어놓은 명단을 절반도 채우지 못하고 전화 돌리기를 멈췄습니다. 이 편지를 쓰기로 한 주말에는 생전 처음 스마트폰 액정을 박살냈습니다. 순수한 행복으로 채워지길 바랐던 시간이지만, 이런 일도 일어날 수 있는 거라고 담담하게 받아들입니다. 벗어날 수 없는 시련을 겪었던 시기처럼 비탄에 빠지진 않습니다. 완전히 지나왔기 때문인지, 지난 고통이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닌 것처럼 느껴집니다. 생애 한 번쯤은 겪을 만한 일이라고 여길 여유까지 생겼습니다. 다만 감옥 근처에서 저보다 긴 세월을 이겨내야 할 대체복무자의 과업은 조금도 가볍게 여기진 못하겠습니다.

감옥에서의 사계절을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시간으로 치부할까 고민했던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견딘 시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저를 기다려준 사람의 시간이 있다는 걸 이따금 깨닫습니다. 혼자가 아닐 수 있도록 위로해주시기 위해 보내주신 따뜻한 편지와 책과 후원금 역시 평생 잊을 수 없다는 걸 되새깁니다. 온전히 저로 존재할 수 없었던 시간이지만, 동시에 제가 지닌 조각들을 잃지 않았던 시간이었습니다. 감사하다는 말로는 온전히 담아낼 수 없어서 속상합니다. 무척, 정말, 아주, 많이 따위의 수식어가 오히려 진심을 가리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감사하고,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라고 꾸준히 말하겠습니다. 제 과업은 끝났지만 수없이 다짐했듯 대체복무자의 시간을 외면하지 않겠습니다. 앞으로도 전쟁없는세상의 평화운동을 지지하며 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