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서연(페미니스트 문화연구자)
난민에게 허용된 각본

〈도쿄의 쿠르드족〉 상영회 포스터 (포스터 제작: IW31 이명재)
지난 6월 20일, 세계 난민의 날을 맞아 서울의 한 영화관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도쿄의 쿠르드족〉(휴가 후미아리, 2021) 무료 상영회가 열렸다. 이 영화는 터키에서의 박해를 피해 1990년대부터 일본에 들어와 살고 있지만 난민 인정을 받지 못해 ‘불법 체류자’로 지내고 있는 2천여 명의 쿠르드족, 그중에서도 특히 이제 갓 사회에 진입하는 두 청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새우꺾기 고문 사건’으로 세간에 알려진 화성외국인보호소의 인권침해에 맞서 싸우고 있는 피해당사자 M, 그와 연대하는 외국인보호소폐지운동 활동가들이 함께 마련한 이 날의 상영회는 국경 내에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이들의 현실을 알리고자 하는 이들, 그리고 이를 알고자 하는 이들이 모인 현장이었다.
〈도쿄의 쿠르드족〉은 일본을 배경으로 한 영화다. 그러나 난민협약 가입국으로서의 역할을 내팽개치다시피 하는 것은 일본이나 한국이나 매우 비슷하므로, 영화 속의 반인권적인 상황들을 한국에 대입하여 이해해도 무리가 없다고 활동가들은 말했다. 특히 일본과 한국의 난민 인정률이 각기 0.3%와 1%로 최하위를 다투고 있다는 점이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던 듯하다. GV(관객과의 대화) 중 객석에서 나온 마지막 질문도 이와 관련되어 있었다. 어렴풋한 기억에 기대어 적자면, 한국의 난민 인정률이 다른 국가들에 비해 너무나 낮은데도 난민들이 한국행을 택하는 이유는 무엇이냐, 한국의 어떤 점 때문에 이들이 한국에 오게 되는 것이냐 하는 질문이었다.
나 역시 궁금한 바였던 이 질문에 대한 활동가들의 답변은 적잖이 놀라웠다. 역시 기억에 의존해 적자면, 한국에 오고 싶어서 오는 난민은 없다고 한다. 다른 ‘좋은’ 나라에 가고 싶은데 어쩔 수 없이 한국에 온다는 게 아니라, 난민들이 행선지를 선택해서 온다는 생각 자체가 난민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내국인의 사고방식이라는 이야기였다. 이 질의응답을 들으며 나는 직전에 본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불안정한 신분으로 일본에서 20년 가까이 살아온 한 쿠르드인 중년 남성이 이렇게 말한다. 다시 한번 기억나는 대로 적자면 다음과 같다. ‘나는 일본에 평생 살고 싶은 마음이 없다. 일본은 내가 정착하고 싶은 곳이 아니다.’
영화 속의 쿠르드인들은 수시로 출입국관리국에 불려가서 체류 연장 허가를 받아야 했다. 감히 노동을 해서 돈을 버는 ‘불법’을 저지르지 않았음을 확인받아야 했고, 상급 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신분을 보장받아야 했고, 제멋대로 적용되는 출입국관리법을 피해 생활을 꾸려야 했고, 정당한 이유 없이 ‘보호소’에 갇혀 고통받곤 했다. 그처럼 불리한 상황에 놓인 이가 일본인들이 보는 일본 영화에서 저렇게 직설적이고 솔직한 말을 하고, 제작진은 그 말을 또 그대로 담아내는 것을 보고 나는 ‘아니, 저래도 괜찮나? 문제가 없나?’ 하며 순간 흠칫했었다.
영화의 탓은 아니다. 〈도쿄의 쿠르드인〉은 쿠르드인들이 때로는 개인적으로, 때로는 조직적으로 일본 당국에 분노하고 저항하는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충분히 보여준다. 그걸 제대로 인지했다면 해당 장면에 새삼 놀라지 않았을 텐데 나는 지레 불안해했다. 내가 소위 내국인 입장에서의 전형적인 각본, 즉 심사하는 주체로서의 국가/당국과 심사받는 대상으로서의 난민이라는 역할의 각본을 내면화하고 있었던 탓이다. 규범에 순응하면서 피해자다움을 어필하기보다는 저항감을 표현하는 난민, 정치적 주체로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동지들과 연대하는 난민은 그 각본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당일 GV 현장에서 화성외국인보호소의 인권유린 실태와 한국 난민 정책의 문제를 비판했던 M을 비롯한 수많은 난민의 각기 다른 실존과 다양한 실천은 그 각본의 바깥에 있다.
이날 이후, 내가 2년 전에 썼던 과거 한국영화의 베트남전쟁 난민 재현에 대한 소논문을 새삼 떠올려 보았다. “한국은 파병 국가로서 베트남 난민의 구호에 책임을 요구받는 위치였으나, 이 영화들은 ‘우리’는 베트남 난민을 처분할 권한이 있는 위치로, ‘저들’은 자신의 적합함을 증명해야 하는 존재로 그려내고 있었”다며 입바른 지적을 해 놓았지만, 나 역시 고정관념에 붙잡혀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반성을 빙자한 나의 자의식을 길게 내보이기는 면구스럽다. 그러나 이 일을 계기로, 타자를 이해하는 데에 흔히 쓰이는 익숙한 각본의 문제를 잠시 돌아보고 싶다. ‘우리’가 들어야 할 오래고도 새로운 이야기, 성심껏 응답해야 할 베트남의 이야기가 오는 8월 9일에 열릴 베트남전쟁 민간인학살 국가배상소송의 원고 응우옌티탄 님과 함께 한국을 다시금 찾을 예정이기 때문이다.
‘나라 잃은 사람들’의 이미지 만들기
1975년 4월 30일 베트남전쟁 종전을 전후로 수많은 난민이 발생했고, 그중 일부는 한국을 향했다. 1,400여 명의 난민을 태운 해군 LST가 5월 13일 오전 부산항에 도착하고, 그로부터 9일 후에는 민간 화물선 ‘쌍용호’가 200여 명의 난민과 함께 부산항에 닿는다. 이 두 건의 상륙은 해외로부터의 난민이 한국 사회에 일종의 스펙터클로서 나타난 사건이었다.
1973년 3월을 기해 파월 미군과 한국군이 모두 철군한 후, 박정희 정부는 승리하지 못한 전쟁의 기억을 어물쩍 봉합하려 했고, 참전 이데올로기를 선전하던 영화의 제작 편수나 언론 보도 역시 급격히 줄었다. 그러던 중 등장한 난민들은 소위 ‘월남 패망’이라는 이름으로 유신 정권의 안보 위기론을 강화하는 데에 적극 활용되었고, 미디어는 이를 스펙터클화했다.1) 이 같은 박정희 정부의 통치술에 남한 역사상 처음으로 대규모의 해외 난민이 유입되는 상황의 시각적인 충격이 더해지면서, 참전 당시에 형성되었던 한국-베트남의 관계에 대한 상상에 일대 전환이 나타난다. ‘월남 특수’를 가져다주는 기회의 땅으로 그려졌던 베트남이 이제 한편으로는 반공과 자주국방에 실패하여 나라를 잃은 반면교사로,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의 온정으로 품어주어야 할 불우한 난민들을 배출한 곳으로 여겨지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한-베 관계에 대한 새로운 상상은 참전 시기에 형성된 서사를 약간 다른 버전으로 반복한 것이기도 했다. 가령 베트남전쟁 참전 시기에 통용되었던 ‘공산당과의 전쟁을 먼저 겪은 형님 나라로서 아우 나라인 월남을 도와준다’라는 아이디어가 여기에 재차 투입된 것이 그러하다. 베트남전쟁의 성격이나 전개 과정을 생각할 때 이는 아주 큰 착각이지만, 참전 시기 베트남 ‘현지’에서 촬영된 한국영화들은 베트남인들을 아이와 여성으로, 파월 한국군을 인자한 아버지이자 매력적인 남성으로 그려내는 가부장적인 상상력을 통해 자아상을 부풀렸다.

〈가위 바위 보〉(김수용, 1976) 스틸 파일 (KMDb 제공)

〈웨딩드레스〉(이혁수, 1990) 스틸 파일 (KMDb 제공)
이는 1976년 영화 〈가위 바위 보〉에서 변형되어 이어졌다. 베트남 난민 여성 및 아동들의 수난사를 통해 눈물을 자아내는 이 영화는, 난민 문제에서 국가의 책임을 은폐하고 온정적인 개인들을 내세움으로써 한국(인들)이 연루된 베트남전쟁의 구조적 문제를 회피하는 장치를 겹겹이 배치한다. 종전 직후의 이러한 베트남 난민 재현은 베트남 공산화의 결과로서 난민들의 빈곤과 곤경을 전시하여 승공 경제성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효과를 발휘했다. 한편 1990년의 영화 〈웨딩드레스〉는 국외자이자 성노동자로서 이중적인 타자의 위치에 놓인 베트남 난민 여성 인물을 극화한다. 이 인물은 자신의 ‘적격함’과 ‘순결함’을 철저히 증명한 결과 온정적인 한국인 남성과 결혼하여 안착하는데, 그 과정은 남성화된 한국-여성화된 베트남 사이에 가부장적‧이성애적‧이데올로기적인 위계관계를 상정했던 참전 시기의 각본을 반복하고 있었다.
한국을 찾은 베트남 난민들은 하나의 덩어리가 아니었지만, 한국 사회에서 이들은 ‘나라 잃은 사람들’2)로 쉽게 일반화되었다. 또한 당시 미디어는 1975년의 1차 난민 중 교민 및 연고자가 많았다거나 한국을 경유한 후 제3국을 향한 이들이 많았던 실제 상황3)과는 다소 다른 방식으로 특정한 그룹을 과잉되게 표상하였다. 즉, ‘오갈 데 없던 처지에 자유대한의 품에 안겨 우는 난민’의 이미지를 유독 확대 재생산한 것이다. 1977년 이후 2차 난민이 계속 유입되고 1980년대를 통과하면서 이는 ‘망망대해를 떠도는 선상난민’의 (역시 상상된) 이미지와 제멋대로 뒤엉키며 여러 선입견을 양산했다. 이 과정에서 은폐된 것은 바로 참전국으로서 한국의 책임과 연루의 문제였고, 남은 것은 망국의 난민들을 포용하면서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는 한국의 자아상이었다.4)
반성이라는 이름의 자기중심성
편리하게 도려내진 참전의 경험이 ‘기억 돌아보기’의 방식으로 한국영화의 장에 나타난 것은 이르게는 1980년대 중반, 본격적으로는 1990년대 초반부터의 일이다. 이 맥락에서 눈여겨볼 만한 유형 중 하나가 바로 라이따이한5) 소재의 영화들이다. 이 영화들은 탈냉전과 한-베 수교를 전후한 시기에 한국 사회의 관심사로 떠오른 라이따이한의 존재를 파월 한국군이 저지른 과오의 결과로 간주하며 반성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러나 그와 같은 ‘인도적 양심’은 부계 혈통에 대한 의심 없는 가치부여와 만나면서, 참전 당시 한국인-베트남인 간에 상상적으로 구성되었던 가부장적 관계의 각본을 강화하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 이후에 제작된 〈머나먼 사이공〉(1991)과 〈라이 따이한〉(1994)은 베트남이라는 공간을 매력적인 관광 산업 진출지로 그려내면서, 참전 시기 한국 사회에서 널리 통하던 ‘남방(南方)’에의 환상과 경제적 진출에의 욕망을 재생하기도 했다.

〈머나먼 사이공〉(황동주, 1991) 스틸 파일 (KMDb 제공)

〈라이 따이한〉(서윤모, 1994) 스틸 파일 (KMDb 제공)
참전의 과거를 반성하며 돌아보는 일과 참전 시기에 지배적으로 통용되던 각본을 새로이 강화하는 일이 어떻게 동시에 이루어질 수 있었을까? 이 시기 라이따이한의 존재는 참전에 대한 비판적인 분석과 담론이 한국 사회에서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은 시점에 드러난 것이었다. 말하자면 참전국인 한국 측의 책임과 연루의 문제를 감지하기는 했으나, 이를 다룰 방법에 대한 고민이 부족한 상태였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라이따이한의 존재는 부계 혈통에 근거한 민족적인 연결감이라는 사적이고 감상적인 차원에서 먼저 재현되었고, 이미 익숙해서 ‘우리’의 입장에서 비교적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각본들이 이 새로운 타자를 이해하는 데에 곧잘 달라붙고는 했다.
베트남(인)과 베트남전쟁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실은 베트남(인)이라는 타자를 통해 자기를 부풀려 들여다보고 상상하는 것. 이러한 자기중심성은 전쟁 중 참전 이데올로기를 선전하던 영화에서부터 파월 군인‧노동자 가족들의 아픔을 그려낸 멜로드라마에 이르기까지, 종전 이후 베트남 난민이나 라이따이한 문제를 다룬 영화에서부터 참전 군인의 트라우마를 재현하거나 민주화운동 세대의 비판적 담론을 바탕으로 하는 영화에 이르기까지, 전쟁에 대한 시각과 입장을 막론한 대부분의 한국 ‘베트남전쟁’ 영화들이 공유하는 바였다.
그러한 한국 ‘베트남전쟁’ 영화의 경향이 언제 어떻게 전환을 맞았는가를 살펴보는 일도 중요하다. 가령 베트남인들의 오랜 원혼이 깃든 신령한 공간을 지배하는 원귀가 파월 한국군(과 미군, 프랑스군)을 처단하고, 원귀의 정체와 의도를 한국군 측이 더듬어가게 하는 공포영화 〈알포인트〉(2004)가 그 전환의 가능성을 설핏 보여주었다면, 〈미친 시간〉(2003)이나 〈Send&Receive : The Video〉(2017), 〈기억의 전쟁〉(2018)과 같이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피해생존자 및 파월 한국군 당사자들의 증언을 담아낸 다큐멘터리들은 이를 좀 더 본격화한다. 앞 문단에서 언급한 영화들과 이 영화들 사이에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있다면, 그것은 전쟁범죄의 피해자이자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저항자로서 당사자들이 스스로를 드러낼 자리가 영화 속에, 그리고 프레임의 안팎에 마련되어 있느냐의 여부일 것이다.
누구의 말을 어떻게 들을 것인가?
〈기억의 전쟁〉은 그 자리를 영화 속에 어떻게 마련할지에 대한 고민이 다양하게 드러난 작품이다. 가령 2018년 4월 서울에서 열린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 장면들이 그러하다. 〈기억의 전쟁〉은 재판의 공식 절차에 포함되지 않는 잉여의 순간들을 덜어내지 않고 전면화한다. 시민평화법정의 두 원고가 통역사 응우옌응옥뚜옌과 속삭이듯 나누는 대화 장면은 특히 두드러지는 사례다. 퐁니‧퐁넛의 응우옌티탄이 최후진술을 하던 중 ‘당시 학살에 가담한 군인이 이 자리에 와 있다면 나와서 내게 사과하라’라고 요구했던 것에 대해 하미 마을의 응우옌티탄이 자신의 감상을 표현하며 이루어진 이 대화는, 당시 제작진의 카메라에 우연히 담기고 편집 감독의 시선에 다시 한번 포착되어6) 영화의 빛나는 순간 중 하나를 만들어낸다.

시민평화법정의 원고로서 증언하는 퐁니‧퐁넛 학살 피해생존자 응우옌티탄. (사진 출처 : 시민평화법정 준비위원회 블로그)
위 장면만큼 자주 언급되지는 않지만 내게 인상적이었던 장면을 함께 언급하고 싶다. 연출자인 이길보라 감독의 다른 작품들과 달리 〈기억의 전쟁〉에는 제작진의 모습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응우옌티탄이 퐁니‧퐁넛 학살 당시의 상황을 증언하는 장면에서 제작진은 특정한 음향과 음악 및 마을의 풍경을 담은 인서트 쇼트를 사용해 자신들의 위치를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소위 ‘있는 그대로의 투명한’ 재현 대신에 두드러지게 인위적인 연출을 선택한 이 장면은, 참전 군인 3세를 비롯하여 가해자-사후세대에 속한 제작진과 1968년의 학살을 직접 겪은 피해당사자 사이에 놓인 거리를, 그리고 그 거리를 뛰어넘어 보려는 ‘듣는 자’들의 (도달 불가능한) 시도를 드러내고 있다.
1999년 「한겨레21」의 민간인학살 진상 규명 캠페인 이후 지금까지, 한국의 시민사회는 “가해자 됨을 묻기 위하여”7) 20여 년간 다양하게 노력해 왔다. 이 운동이 과거사 진상 규명 운동으로서 독특한 부분은 바로 ‘우리’ 안의 가해자성을 돌아보도록 촉구한다는 점에 있다. 한국전쟁 중 미군의 노근리 학살 문제나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문제를 대중적으로 공론화할 때 종종 함께 이야기되는 것은 이와 어느 정도 관련되어 있다. 한국인에게 있어 가해자 됨의 인식은 역사적으로 낯선 일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때 노근리 학살이나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우리’가 겪고 전승해 온 피해의 경험을 비추어 ‘저들’의 피해 경험을 이해하기 위해 놓이는 익숙한 발판이 되는 셈이다.
이러한 유비는 ‘우리’의 아픔과 ‘저들’의 아픔을 겹쳐 보게 함으로써 사태에 대한 이해를 비교적 수월하게 한다. 그러나 이 익숙한 피해의 공감대를 넘어서는 도약이 없다면 예의 자기중심성이라는 함정에 다시 빠지기도 쉽다. 이와 관련해 연구자 신지영은 2018년의 시민평화법정과 같은 해 예멘 난민들에 대한 한국 사회의 격렬한 반응을 함께 놓고 고민하면서 ‘피해자성을 내포한 가해자성’이라는 인식틀을 제안했다.8) 이때 신지영은 시민법정이 “현재 난민을 양산하는 국제전쟁에 무기거래 등으로 연루된 한국의 가해자성을 비춘다”고 했던 평화활동가 여옥의 말을 함께 언급한다. 이는 한국군의 베트남전쟁 참전과 민간인학살이라는 과거사를 현재와의 연속성 속에서 새로이 보게 하는 한편으로 책임과 연루의 단위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한다. 국적이나 국가, 정부와 같은 단위에 갇힌 상태로는 피해와 가해의 자리 사이를 역사적으로 진동하는 이 고민들을 이해할 수도, 그로부터 도약하여 연대를 꾀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이는 듣는 자와 말하는 자의 자리에 대한 질문으로도 이어진다. 가령 ‘민간인학살이 존재했던 것은 분명하지만, 베트남 정부가 한국의 사과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이 문제를 우리가 해결할 수 없다’라는 흔한 논리는 전쟁범죄 문제를 국가와 국가 간, 정부와 정부 간의 외교적 문제로 축소한다. 당장 베트남의 학살 피해 지역들에 숱하게 남아 있는 증오비가, 2018년의 시민평화법정이, 2019년에 청와대로 제출된 민간인학살 피해자 103인의 청원서가, 2020년의 국가배상소송이 한결같이 사과를 요구하고 있는데, 어떻게 ‘베트남이 사과를 원하지 않아 한국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라는 논리가 정당화될 수 있는지 심히 의문스럽다.
〈기억의 전쟁〉의 프로듀서 조소나는 2021년 초 출간된 책『기억의 전쟁』을 통해 시민평화법정 현장의 순간들을 다시 기록한다. 그에 따르면 시민평화법정 둘째 날, 응우옌티탄의 최후 진술 이후 정부 측 변호인이 최후 변론을 위해 나섰을 때 장내에 있던 참전군인 한 명이 단상에 뛰어들어 정부 측 변호인을 향해 이렇게 호소했다고 한다. “제발 우리 이야기도 들어주세요.”9) 이 외침은 지금까지 우리에게 주어진 인식틀과 각본이 포괄하지 못하는 자리들이, 국가나 정부와 같은 단위로는 셈해지지 않는 경험들이 숱하게 존재한다는 진실을 잠깐이나마 드러낸다.
2018년 시민평화법정의 원고였던 퐁니 마을의 응우옌티탄은 2년 후인 2020년 4월,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한 국가배상소송을 실제로 제기했다. 이와 관련하여 2022년 8월 9일, 응우옌티탄 당사자 신문 및 남베트남 민병대 소속 목격자였던 응우옌득쩌이에 대한 증인신문이 서울중앙지법에서 진행된다. 2018년의 시민평화법정도, 2020년에 시작되어 오는 8월에 열릴 국가배상소송 재판도 모두 대한민국 정부를 피고로 하고 있다. 그러나 그에 그치지 않고, ‘우리’ 각자가 공동체의 책임과 공동체의 연루를 생각하며 이 법정에서 나올 말들을 들었으면 한다. 이 재판이 국가배상소송이라는 사법적인 수단을 넘어서서 진상 규명과 책임, 반성과 저항과 연대로 확장될 수 있도록, 저마다의 자리에서 고민을 나누었으면 한다. 이제, 평화를 향하는 진실의 이야기를 함께 듣고 만들어갈 때다.
각주
- 1975년 5월 13일 오전 10시에 LST를 탄 난민들이 상륙하고, 같은 날 오후 3시부터 언론, 집회, 출판의 자유를 극도로 제한하는 긴급조치 9호가 시행된 것은 그 대표적인 단면이다. 한국의 주요 일간지들은 LST에서 하선하는 난민들의 기사와 긴급조치 9호 시행을 알리는 기사를 1면에 나란히 대서특필했고, 이튿날에는 LST 난민들의 모습을 담은 화보 기사를 연이어 보내기도 했다.
- ‘나라 잃은 사람들’이라는 표현은 국립영화제작소에서 1979년에 제작한 반공선전용 기록영화의 제목이자, 국방부 정훈국에서 난민들의 수기를 모아 1985년에 단행본으로 출간한 정훈 참조 교재의 제목으로 쓰이기도 했다. 해당 기록영화는 다음 링크를 통해 스트리밍할 수 있다. (https://bit.ly/나라잃은사람들)
- 관련 통계는 노영순, 「부산입항 1975년 베트남난민과 한국사회」,『史叢』81,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2014 참조.
- 여기까지 베트남 난민을 다룬 극영화에 대해 서술한 부분은 나의 소논문 「‘월남 패망’의 한국적 전유와 타자화된 난민의 재현」(2020)의 일부분을 요약하여 이 글의 흐름에 맞게 매만진 것이다. 덧붙이자면 〈웨딩드레스〉의 경우, 1961년 제정된 ‘윤락행위등방지법’에 근거하여 1990년대까지 명맥이 이어진 ‘윤락여성보호소’를 난민에 대한 ‘처분’의 문제와 겹쳐 재현한 사례로서도 눈여겨볼 만하다. ‘윤방법’과 ‘보호소’의 역사를 다룬 자료 중 온라인으로 볼 수 있는 좋은 글로 「뒤늦게 알려진 ‘여자 삼청교육대’」(김아람, 2020)를 소개하고 싶다. (링크 https://www.ildaro.com/8768)
- 베트남전쟁 중 파월 한국인 남성과 베트남인 여성 사이에 태어난 2세를 일컫는 말. 제대나 철군, 종전 등을 이유로 파월 한국인 남성이 혼자 귀국하고, 베트남인 여성과 그 2세가 베트남에 남아 차별을 겪으며 살아가는 경우를 주로 가리킨다.
- 이 장면이 편집 중 채택된 과정은, 영화 제작진이 출간한 동명의 단행본『기억의 전쟁』(북하우스, 2021) 중 3부 ‘포스트프로덕션’ 부분에 상세히 서술되어 있다(209~213쪽).
- 이 표현은 시민평화법정을 분석한 이한빛의 논문 「가해자 됨을 묻기 위하여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진상 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을 중심으로」(2019)에서 따 왔다.
- 신지영, 「‘피해자성을 내포한 가해자성’과 아시아 인민연대 – 오키나와의 한국전쟁, 한국의 베트남전쟁, 그리고 전시성폭력」(2020).
- 이길보라‧곽소진‧서새롬‧조소나, 『기억의 전쟁』(북하우스, 2021), 20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