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쭝(비폭력 트레이너 네트워크 망치)
흔히 ‘활동가’라고 하면 거리에서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는 ‘투쟁’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그러나 인권침해 당사자를 지원하는 것 역시 활동가의 매우 중요한 역할이다. 이는 당사자들을 조직화하고 새로운 의제를 발굴한다는 점에서도 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다. 나 역시 지금 일하는 단체에서 여러 활동 중 하나로 상담 및 지원 업무도 맡고 있다.
가정폭력 피해 당사자의 자립 과정을 그린 드라마 〈조용한 희망〉은 여러 모로 참 괜찮은 작품인데, ‘피해 당사자 지원’을 주된 역할로 맡는 활동가들이 나온다는 점에서 나는 특히 반가웠다. 비중은 크지 않지만 이들이 등장할 때마다 이야기는 새로운 전개로 흘러간다. 실제 당사자가 회복하는 과정에서 활동가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듯이, 드라마에서도 이들은 꼭 필요한 캐릭터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드라마에서 활동가들의 역할은 그 한계가 명확하다는 점이다. 이들은 주로 관련 정보를 알려주거나 긴급한 지원을 제공한다. 실제로 지원절차를 밟고 새로운 집을 구하는 등의 주요한 활동은 주인공 알렉스가 해야 한다. 누구와 어떻게 살지, 앞으로 무엇을 할지도 알렉스가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 아무리 좋은 활동가도 삶을 대신 살아주지는 않는다.
도움 요청은 셀프
가장 처음 등장하는 조력자는 복지센터의 사회복지사(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그는 알렉스가 활용할 만한 지원제도와 절차를 꼼꼼히 챙겨준다. 무엇보다 알렉스가 앞으로 어떻게 길을 헤쳐나갈지 알려준다. 두들겨 맞아서 다친 것이 진짜 학대이고 자신의 경험은 ‘진짜 학대’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알렉스에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회복지사: “가짜 학대는 뭐죠? 위협? 협박? 통제? …………(대답을 하지 못하는 알렉스를 바라보다가 안내지를 건네주며) 가정폭력핫라인은 직접 연락해야 해요. 보통 제일 가까운 경찰서로 택시를 보내줘요.”
알렉스: “전화해서 뭐라고 해요?’
사회복지사: “‘도와주세요(Help)’”
나는 이 대화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직접(yourself)”이라고 생각한다. 사회복지사는 알렉스의 경험이 ‘진짜 학대’이며 사회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하지만, 알렉스를 대신해 도움을 요청하지는 않는다. 알렉스가 끝내 자신의 상황을 부정하거나 여러 가지 이유에서 외부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다면, 그는 어떻게 해도 알렉스를 도울 수 없다.

집을 구하려면 직장에 다녀야 하고 직장에 다니려면 아이를 맡겨야 하는데 어린이집을 이용하려면 직장이 필요한 상황. 옴짝달싹 못하는 알렉스에게 사회복지사(왼쪽)가 손을 내민다.
가정폭력피해자 쉼터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진다. 소장 데니즈는 참 따뜻하고 섬세하다. 그는 모든 입소자들을 다정하게 “베이비 걸”이라고 부르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런 쉼터에서도 회복은 쉽지 않다. 쉼터 입소자 대니얼은 무척 씩씩하고 용감한 사람인데도 갑자기 남편에게 돌아간다. 이후 우연히 길에서 마주친 그는 남편의 눈치를 보면서 알렉스를 피한다. 알렉스는 대니얼을 다시 쉼터로 데려오자고 여러 차례 주장하지만, 그 때마다 데니즈의 반응은 차분하기만 하다.
“종종 있는 일이에요. 돌아가는 경우가 더 많아요. 대개 여성이 7번은 다시 돌아가죠. 완전히 떠나기 전에요. 대니얼은 이번이 세번째였어요. 난 다섯번 걸렸고요.”
대니얼을 보면서 “이해가 안 돼요. 어떻게 학대하는 사람과 같이 살죠?”라고 말하던 알렉스 역시 단 한번에 남편에게서 벗어나지는 못한다. 집을 찾아 전전하다가 결국 남편의 집에서 살게 된 것이다. 잠시 마음을 잡은 듯했던 남편은 다시 폭력적인 태도를 보이고, 알렉스는 한밤중에 빈손으로 뛰쳐나와 쉼터를 찾아온다.
데니즈는 알렉스를 쉼터에 다시 들이면서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알렉스가 방안에서 틀어박힌 며칠 동안 방문을 두드리지도 않는다. 그저 매일 아침 문 앞에 아침식사를 놓아둘 뿐이다. 드디어 알렉스가 밖으로 나왔을 때, 데니즈는 그를 지원하기 위해서 이미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시작은 의외로 쇼핑이다. 쉼터에는 기증받은 옷을 가져갈 수 있는 ‘부티끄’가 있다. 모든 것이 무료라는데 제품마다 가격표가 붙어있고 계산대도 있다. 평범한 기분이 들게 하기 위해서다. 알렉스는 이 곳에서 쇼핑을 하면서 자신이 무슨 색을 좋아했는지 기억해낸다.
그 다음은 휴대폰. 알렉스는 쉼터에서 지원받은 휴대폰을 통해서 일을 구해서 돈을 벌고, 학비와 주거 지원프로그램도 알아본다. 친구를 만나고 그의 도움을 받아 양육권 소송에 나선다. 자조모임도 있다. 알렉스는 두번째 입소해서야 쉼터 자조모임에 나가고 자신의 심리적 고통을 치료한다.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알렉스는 자조모임 사람들에게 “가정폭력 생존자예요”라고 자기 소개를 한다. 자신의 경험이 ‘진짜 학대’가 아니라던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당사자의 몫, 활동가의 몫

알렉스가 쉼터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데니즈(오른쪽)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거라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일하는 분야나 활동방식은 드라마와는 다르지만, ‘사회구조적 모순 때문에 피해를 입은 당사자 곁에서 활동가는 무엇을 해야 하나’라는 질문은 나에게도 유효하다. 아마 대부분의 활동가에게도 유효할 것이다.
내가 상담을 통해 만나는 내담자들의 단골 질문은 바로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다. 상담자가 대신 답을 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던지는 질문이다.
그럴 만도 하다. 고통에 직면한 사람들은 마음이 어지럽다. 자신이 겪은 고통의 이름이 무엇인지, 그것이 ‘피해’가 맞긴 한 건지부터 혼란스럽다. 도움을 요청한다고 뭐가 달라질까 싶고 겁도 덜컥 난다. 그렇다고 가만 있자니 너무 억울하다. 어렵게 마음을 정했다가도 자꾸 흔들린다. 길을 잃어 막막해진 사람은, 그래서 있는 힘껏 답을 구하는 것이다. “도대체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라고. 나 같아도 그렇게 묻게 될 것 같다.
그러나 누구도 당사자의 삶을 대신 결정해줄 수는 없다. 드라마 속 조력자들이 그러했고,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종종 내담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일상으로 돌아가는 방법은 사람마다 달라요. 선생님에게 맞는 답은 직접 찾으셔야 합니다. 제 몫은 조력이고, 선택은 선생님이 혼자 감당하셔야 하는 몫이에요.”
가끔은 내담자가 내린 답이 활동가의 생각과 다를 때도 있다. 나는 그럴 때 우려의 뜻을 전하고 다시 한번 생각해보도록 권한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다. 당사자의 삶과 선택은 내가 건드릴 수 없는 영역이니까. 그럴 때 나는 데니즈의 대사가 떠오르곤 한다.
“슬프죠.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사랑과 빛을 보내며 언젠가 이리 돌아오길 바라는 것뿐이에요.”
그러나 정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뿐일까.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때로는 ‘더 열심히 당사자를 설득해야 하는 것 아닐까’ 싶을 때도 있고, 반대로 ‘혹시 당사자에게 내 생각을 강요하는 거 아닐까’ 싶을 때도 있다. 가끔은 나 역시 누군가에게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라고 묻고 싶다.
그러나 운동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서, 내 질문의 답은 동료 활동가들과 함께 찾아나갈 수 있다. 여럿이 함께 헤매고 함께 방황할 수 있다. 이렇게 꾸준히 헤매면서 길을 찾다 보면 어쩌면 나도 데니즈처럼 괜찮은 활동가가 될 지도 모른다고, 조용히 희망을 품어본다.

알렉스와 딸 매디가 희망을 되찾은 것은 누구보다 자신의 선택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그 변화는 알렉스의 조력자들이 함께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