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치(여성병역거부자, 평화활동가)

가기까지

강정에서 살아가며 이웃한 동료들을 만나는 일은 그 자체로 큰 배움이 되었다. 그러나 기회를 얻기 쉽지 않았다. 특히 날을 넘기는 행사는 거의 참여하지 못했다. 다른 가족 없이 아이를 양육하고 있어서였다. 아이가 방학이라 다른 가족을 방문하지 않았다면 이번에도 어려웠을 것이다. 나에겐 이런 며칠 간의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었다는 자체가 신기한 일이고, 드문 기회였으며, 아이가 많이 커서 가능해진 변화였다.

2019년에 강정마을의 두 친구와 <여성병역거부> 선언을 했지만 ‘선언 이후’를 만들지 못했다는 부담을 계속 가지고 있었다. 더 많은 사람이 이 언어를 만나고 고민하며 질문하기를 바랐으나, 그런 논의의 장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지난 봄에 <여성병역거부선언>을 하겠다는 동료 여성들의 연락을 받았고, 그 준비를 함께 하게 됐다. 그 과정에서 지난 3년간의 문제의식을 담아 다시 병역거부 선언을 했다. 선언 과정에서 여성이 군대로 징집되지 않는, 다시 말해 병역의 의무를 지지 않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여성이 병역을 거부한다는 것은 어떻게 무슨 운동이 될 수 있는지, 바로 이 병역의 당사자성에 대해 구체적 언어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다.

이번 평화캠프에 참여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장소가 평택이라는 데 있기도 하다. 캠프 험프리스(Camp Humphreys), 세계 최대 미군 해외 기지를 직접 보고 싶었다. 그보다는, 노을이 아름다웠다는 대추리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그 둘은 전혀 다른 별개의 다른 이름이 아니라 아프게 교차하는 질문은 아닐지. 평택 50만 인구의 십 분의 일이 미군과 미 군무원, 그리고 그 가족들이라고 들었다. 그 5만 명 중에서 절반 훨씬 넘는 수가 기지 바깥에 산다. 어린 시절 광주공항에 있는 공군 제1전투비행단 가까이 살았다. 미군 부대가 있었다. 40여 년 전 그때도 햄버거와 피자를 팔던 미군 거리가 있었다. 그 큰길 옆으로 작은 골목엔 어린애들이 들어가지 못하게 어른들이 서성였다. 우리는 미군 뒤를 쫓아다니며 사탕을 졸랐다. 그 행동이 어떤 일인지 꽤 커서 알게 되었고, 여러 기억이 뒤늦게 수치심이 되었다.

 

말한다는 것과 듣는다는 것

평택기지 예전 입구 건너에서 참가자들과 함께 내렸다. 일행은 캠프 첫 일정으로 기지촌의 역사와 여성들의 삶에 대해 들으러 가고 있었다. 그러나 미군기지 앞이라는 걸 깨닫게 된 건 길에서 만나는 미군이나 영어로 된 간판 때문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튀어나온 목소리 때문이었다.

“사진 찍지 마세요. 큰일 납니다. 찍으면 안돼요.”

다급히 나의 촬영을 말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기지 입구 횡단보도였다. 나는 그 목소리를 안심시키기 위해 더는 사진을 찍지 않았다. 그러나, 그때부터 어떤 해설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마음이 복잡했다. 사진을 찍을 수 없는 것은 어떤 과정으로 용인되는지, 폭력을 독점한 집단의 통제는 다양한 얼굴로 온다. 촬영금지는 그 대표적인 형태다. 나는 마을에서 종종 그 선을 넘었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래된 미군기지 토대에서 기지촌 여성의 삶과 연대해 온 이들의 저 당부는 이해되는 만큼 삼켜지지 않는 어떤 것이기도 했다.

캠프 험프리스

캠프 험프리스 정문 풍경. 이 곳은 특별할 곳 없는, 하지만 사진을 찍어서는 안 되는 곳이었다.

그런 무거운 마음으로 <기지촌여성평화박물관>으로 이동했다. 기지촌 여성들의 얼굴이 대형 사진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약봉지가 놓인 식탁 옆에서, 단촐한 거실에서, 대문 앞 작은 꽃화분 앞에서 정지된 그들의 눈빛은 많은 말을 담고 있었으나 내가 강정에서 본 투쟁가들의 얼굴 사진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최근 제주에서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투쟁의 역사를 기록한 고길천 작가의 <붉은 구럼비> 전시를 통해서도 많은 얼굴을 만날 수 있었는데, 거기서 마주한 얼굴들은 폭력에 저항하는 주체로서 (어떤 의미에선) 정면이었다. 한마디로 ‘말하는’ 인간이었다. 그러나 여기 이 여성들은 얼굴이 드러나 있지만, 지금 이 재현상태가 그들이 원하는 모습인지는 알 수 없었다. 기지촌 여성들의 삶을 재난상품화 하거나 피해 이미지로만 고착시키는 경험이 없지 않았다. 돌아보면 이들에 대한 재현 혹은 드러낸 방식은 많은 가능성을 가진 것이었지만 여전히 우리가 만든 이미지 틀에 포획한 장치는 없었는지 생각에 잠겼다. 기지촌여성 당사자로서 운동에 참여한 당사자들의 이름 가운데 글자가 빠진 것에서도 마음이 오래 머물렀다.

나는 홍콩혁명에서 드러난 얼굴의 힘에 대해 긴 시간 주목해왔었다. 2019년 10월 13일에 한겨레에 올라온 장정아 교수의 <홍콩시위에서 확인한 ‘얼굴의 힘’>은 홍콩시위가 격화되고 있던 당시 홍콩정부는 시위대를 향해 복면 등 일체의 얼굴을 가리는 행위를 금지했던 시기에 복면과 마스크를 쓴 시위대 사이에서 홀로 마스크를 벗고 얼굴을 드러내고 외쳤던 한 사람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 사건은 홍콩 역사상 처음으로 의회에 난입해 들어간 시위대에 경찰이 무력진압을 통한 강제해산의 시한이 임박해 나타났다. 긴장으로 가득 찬 그때, 한 명이 갑자기 마스크를 내리고 모두 함께 떠나지 말고 남자고 호소하기 시작했다. 곁에 있던 동료시위대가 그의 신분이 밝혀져 체포될까 걱정되어 얼굴을 가리게 했지만 그는 얼굴을 다시 드러내고 말했다. “내가 마스크를 벗은 건, 우리 홍콩인은 더 이상 패배해선 안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지면 10년을 지는 것이고, 홍콩 시민사회는 이제 끝없이 짓밟힐 것이다.” 그는 나중에 인터뷰에서 마스크를 벗은 이유에 대해 시위대가 폭도로만 기억되지 않기를, 자신들의 파괴행위만 기억되지 않기를 원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위험을 무릅쓰고 그는 스스로 얼굴을 드러냄으로써 폭도라는 이름에 저항한 것이다.

그사이 한 여성의 사진 속 눈빛과 오래 만나는 여성 동료를 바라보았다. 내가 재현 방식의 타자화에 서둘러 의문을 던지며 괴로워하고 있을 때, 혜린은 재현된 여성과 가까이 만나고 있었다. 내가 찾고 싶었던 재현된 당사자의 구체적인 모습(주체성)은 그것을 응시하는 동료시민의 힘이기도 했다. 재현의 방식 경로에 따라 일본군위안부 소녀상이 여성 혐오의 맥락에 놓이기도 한다. 나는 그것이 재현의 외형보다는 ‘말하는 자’로서의 경로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알고 있다. 그런 면에서 얼굴을 진심으로 마주하는 것은 ‘말을 듣는 사람’이 되는 일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폭력을 사용하는 주체들은 정말 시위대 시민들과 얼굴을 마주하고 싶었을까? 그렇지 않다. 폭력의 주체 혹은 권력은 ‘말하는 자(시위대, 시민)’들의 얼굴을 지우고 그들을 비인간화해야 하는 처지다. 역사적으로 혐오범죄는 그런 비인간화의 과정으로 시작됐다. 홍콩의 경찰들은 시민시위대를 ‘바퀴벌레’라고 불렀다. 바퀴벌레는 과거 유럽에서 유대인에게, 그리고 르완다에서 후투족에게 붙었던 이름이다. 말하는 자들은 얼굴이 지워지는 동시에 얼굴을 드러내도록 요구받았던 것이다. 그 요구는 실제로 통제의 방식이었다.

성병 검진에서 떨어지면 감옥에 가야했다. 그들은 국가 안보를 위해, 조국의 경제발전을 위해 애써달라던 한국정부와 미군 당국은 그들의 신변에 이상이 생기면 즉각 폐기했다.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그런 사람이 없던 것처럼, 난잡한 여자였던 것처럼, 맥락을 지우고 얼굴을 숨겼다.

<기지촌여성평화박물관>의 다른 이름은 <일곱집매>였다. 일곱 집이 자매처럼 살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했다. 삶은 이토록 다정해서 아픈 것이었다. 고치지 않고 그대로 둔 방에 작은 옷장이 하나 있었고 그 옷장엔 푸쉬킨의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가 걸려있었다.

 

일곱집매

클럽에서 일하던 여성들이 살던 집터에 만든 기지촌여성평화 박물관, 당시 일곱 집이 자매처럼 지냈다고 하여 이곳을 일곱집매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람들이 들어가는 방향쪽으로 들어가보면 상설전시로 기지촌 여성들이 살던 방을 복원해놓은 공간과, 여성들의 얼굴 사진을 전시한 사진전을 볼 수 있다.

 

운동의 언어로서 ‘여성’에 대하여

이번 평화캠프에 참여하게 된 주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여성병역거부선언> 이후를 고민하는 지점이 있었는데, 예상대로 들어맞았다. 이미 구성원 다수가 ‘병역’의 사회적 의미를 고찰하며 ‘거부할 권리’를 골몰하는 사람들이었고, 그간 군대 징집을 거부하며 사회적 비난과 구체적 구속을 감당하며 이어진 <양심적병역거부>의 역사를 통해 축적된 물음도 많았다. 이 모임에서 나의 위치를 확인해보았다. 한국사회에서 여성이라는 위치, 결혼제도의 보호와 폐해를 모두 아는 사람, 자녀가 있고, 강정에서 운동가로 산다는 것…

여성병역거부에 관한 질문들 가운데 가장 길게 토론했던 것이 “당사자성이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 질문은 징집 거부에 따른 어려움을 겪는가 하는 질문이기도 하고, 군대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군대 이야기를 한다는 입장이기도 하다. 병역을 거부하는 동료남성시민들 가운데서도 여성들에게 이 당사자성을 질문한다. 우리 가운데서 ‘독립적 권리로서의 양심적 병역거부’와 ‘국제인권규범으로서의 양심적 병역거부권’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무엇보다 병역거부권을 남성이 징집되는 것에 딸려오는 것으로 생각하니 병역거부를 주장하면 안 되는 사람이 생겨날 수 있고, 거기에 해당하는 여성은 ‘당사자성’을 의심 받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 병역이라는 이름의 제한된 용도를 넓힐 수 있다면, 병역거부 자체가 모든 인간에게 주어지는 기본권으로서 존중받을 수 있게 된다는 결말이 났다. 폭력을 거부하는 인간의 독립된 기본권이 된다면 누구나 당사자가 되는 것이기에.

 

여성병역거부자 동료들과 함께 여성병역거부 선언에 대해 설명하고 참가자들과 토론하는 자리도 가졌다.

 

셋째 날 여성활동가 토크에서 “여성으로서 군사주의(병역)에 반대하느냐?”라는 질문을 받았을때 “나는 여성이고, 나는 나를 강하게 여성이라고 생각하며, 여성으로서 병역을 거부합니다”라고 대답했다. 나의 여성이라는 정체성은 주어진 것을 강력하게 의식하여 나의 질문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더욱 선명해졌다. 주어진 조건으로서 ‘여성’과, 강제된 역할로서의 ‘여성’ 사이. 나의 물음의 토대는 그 두 개의 ‘여성’이었다.

운영과 관리를 위하여 위계와 통제를 해야 하는 것을 어렴 풋 ‘군사주의’의 개념으로 삼고 있다. 대한민국은 ‘일상 자체가 위계질서와 힘(폭력)의 원리가 지배하는, 전 세계에서 가장 군사화 된 지역’이라는 정희진의 말이 아니더라도 군사문화가 공기처럼 자연스러운 곳이다. 이렇게 강력한 군사주의 사회일수록 연구가 적다고 그는 지적한다. 이미 군사주의가 삶 양식이 된 사회이기 때문에 진보 학계나 사회운동에서조차 도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회적 성별(gender)과 생물학적 성별(sex) 문제는 촘촘히 교차되어 작동한다. 젠더화는 ‘남성적인 것이나 여성적인 것’으로 존재와 현상을 양분한다. 그런데 왜 ‘성별’이 아닌 ‘젠더’인가? 그것은 남성도 맥락에 따라 ‘여성적 존재’로 여겨지기 때문이고, 성별 이분법의 전제 자체를 의심하기 위해서다. 군사주의가 젠더화 된 사회에서 군사 영역은 남성의 영역으로 젠더화 되었다. 이렇게해서 군사주의의 현장에서 ‘여성’의 자리를 지웠다. ‘젠더’ 분할 통치의 기술은 ‘군대를 가는 것’, ‘갈 수 있는 것’에 이르는 자격의 논리까지 구축했다. 이 자격증이 무서운 것은 자격을 가진 자는 그 논리가 삶에 이득이 되기 때문에 그 논리를 강화하는데 계속 일조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군사주의는 특정집단만의 문제도 아니고, 더더욱 여성과 관련이 깊다.

이런 ‘물음’ 속에서 여성을 통해 발화되는 “병역을 거부한다”는 선언은 ‘존재하는 모든 형태의 제국주의를 반성하고 식민지에 반대하며 누구도 타자로 두지 않겠다’는 다짐이 된다. 이것은 공기처럼 존재하는 착취에 반대하는 도약적 물음이며 부지불식간이라도 구조에 협력하고 동원됐던 과거의 자신과 결별하여 폭력에 가담하지 않으려는 폭력 거부 선언이 된다. 특히 기존 의미체계가 축적해온 경계 밖에 존재하는 ‘여성이라는 타자’가 행하는 질문을 통해 ‘병역거부는 군대징집에 반대하는 남성들만의 투쟁이 아니다’라는 각성을 일으키는 선언이고 ‘무엇이 전쟁인가’를 질문하는 일이다. 바로 이 지점을 통해 ‘여성’이라는 기표는 이데올로기가 강제하는 지정된 의미를 이탈해야 하는 ‘운동의 언어’가 된다.

여성이 군대 가면 군사문화에 균열이 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단호했던 이유는, 왜 ‘군대’가 기본값이 되어야 하는가 하는 물음 때문이었다. 이 질문에 대해 논의하려면 저 질문에서 가리키는 ‘여성’이 무엇인지부터 밝혀야 한다. “Can the (    ) speak?”라고 질문하려면 “Who is (    )?”이라는 물음을 먼저 나눠야 하고, 그 전에 “Why did they become (    )?” 이란 물음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도덕적 손상’에 대한 고민

동물권 활동가들에게서 들었던 인상적인 한 문장이 있다. 그것은 “모두가 해방되지 않으면 아무도 해방되지 못한다.”이다. 평화운동에 대한 고민에서, 병역을 구성하는 통념을 거부하고 질문을 재구성 과정에서 가장 크게 동기를 준 것은 다름 아닌 ‘가해자로서의 자기 승인’이었다. 이것을 ‘자기혐오(self hate)’라고 부를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해방에 대한 많은 가능성을 느낀다. 이것은 ‘구조 속의 나’에 대한 승인이며, 가해자를 벗어나기 위해 피해자가 되려는 안이한 습성에서 탈출할 가능성을 주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의 한계를 직면하고 부끄러워할 때 진정한 당사자 주체로 해방된다. 사회적 참사에서, 기후위기 문제에서, 정치적 패배와 순환하고 확대되는 폭력 앞에서, 자신을 피해자로만 설정하는 이들에게서 느끼는 절망감이 있다. 그리고 그때 발신되는 언어는 당연히 수동적이다. 가해 권력에 피해를 승인받는 언어들, 그들에게 사건 해결의 권리를 주는 모습을 너무도 많이 보았다. 그런 방식은 문제가 생긴 원인에서 자신을 분리해냄으로써 종국엔 해결자로서 자기 책임 책임도 털어버리고 마는 일이었다. 이렇게 주체의 탈락은 번번히 자기 손으로 일어난다. 한 마디로 이런 것이다. 권리를 지키기 위한 싸움은 자기 이해에 따라 싸움을 멈출 수 있으나, 의무로 싸우는 자들은 설움을 견디며 끝까지 남는다.

캠프 기간 동료들에게서 의미 있게 느낀 태도 혹은 상태가 있는데, 그것에 붙인 이름은 다르지만 많은 이들이 소위 ‘도덕적 손상(moral injury)’을 경험했음을 표현했다는 점이다. 절망이라 말하기엔 더 깊은 손상, 패배할 수조차 없는 패배감, 더 갈 곳이 없는데도 가야한다는 두려움이 조금씩 발견되었다. 도덕적 손상이라는 개념은 베트남전쟁 참전 군인들의 PTSD 진료과정에서 기존의 트라우마 연구가 공포라는 생존기제에 기반을 두었을 뿐 수치심이나 죄의식 같은 도덕적 감정으로 이어지는 손상에 대해서 다루지 않았음을 자각하며 만들어진 용어로 이제는 외상후 스트레스장애(PTSD)와는 구별되는 용어로 개념화 되었다. 폭력은 그 안의 가해자, 피해자, 증언자 모두에게 심각한 내상을 입히고 만다. 이것은 단순한 공포가 아니다. 정의에 대한 (right/wrong, just) 감각의 훼손은 큰 무력감과 상처를 몰고 온다. 폭력의 가담자 뿐 아니라 그 폭력에 지속적으로 노출되고 어렵게 싸워야하는 사람들도 이러한 손상에 노출되어 있다. 여기에 제안된 방법론은 일종의 ‘듣기’였다. ‘정말 잘 듣기(Radical Listening)’라고도 한다. 정말 잘 듣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말을 못 하는 존재를 대리한다는 발상, 목소리를 빼앗긴 존재의 상정도 고민하게 된다. 목소리 없는 존재는 없기 때문이다. 듣지 않는 내가 있을 뿐. 우리가 그 말을 듣지 않고 그 세계를 보지 않았었던 것이다. 사흘간의 대화와 관찰 속에서 나는 평택에 도착한 첫 순간에 가지게 된 불쾌와 우울의 정체에 열리기 시작했다. 내가 대상화했던 첫 만남에 대해.

마지막 날을 함께 하지 못했다. 함께 사는 고양이 식구가 아기를 낳았기 때문에 서둘러 돌아가야 했다. 그래서 선언문 작업도 하지 못했다. 그 아쉬움을 이 후기에 담느라 말의 반경이 출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