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수경(『드라마의 말들』 저자)
두 달 동안 ‘본방사수’하며 본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우영우)(ENA)가 끝났다. 사실 ‘우영우’가 시작되었을 때만 해도 대중문화가 지금까지 응시한 전형적인 장애인(불행 혹은 극복 서사 속 장애인)을 이 드라마도 반복재생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섰다. ‘천재적인 두뇌와 자폐스펙트럼을 동시에 가진 신입 변호사 우영우의 대형 로펌 생존기’라는 제작진이 밝힌 설명은 그런 내 걱정이 확신으로 번지도록 부채질했다.
우리가 만난 ‘고래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우영우〉가 가진 가장 큰 매력은 그 ‘전형성’에 있지 않을까 싶다. 사실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이야기와 인물들은 특별하거나 혁신적이지 않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우영우는 다른 영화나 드라마에 수없이 반복되었던 ‘서번트 증후군’을 가진 인물이고, 거의 모든 영화나 드라마에 흔히 등장하는 조력자와 빌런 등이 우영우 주변에 적절하게 배치되었다. 또한 이성애 연애, 출생의 비밀 등 ‘K-드라마’에 특히 빈번하게 등장하는 설정도 어김없이 나왔다. 매 회마다 사건이 종결되는 단막극 구조에 매 회마다 감동과 교훈을 준다는 면에서는 ‘일드’와도 닮았다. 그러니까 〈우영우〉는 지극히 익숙한 대중 드라마로서 우리와 만난 것이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우영우〉는 대중의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우영우’를 향한 사회적 공기를 설명하긴 어렵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이 드라마는 전형적인 이야기의 틀에만 머물지 않고 뻔하지 않게 한 발 더 나아간 이야기를 했기에 대중의 관심을 넘어선 사회적 현상이 되지 않았나 싶다. 이런 드라마의 ‘씨앗’이 잘 심긴 게 1회에 나온 ‘회전문’ 이야기다. 첫 출근한 로펌 건물 회전문을 통과하지 못해 곤란해하는 우영우는 송무팀 직원 이준호의 도움을 받아 그 문을 통과한다. 이준호는 우영우가 회전문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도록 ‘왈츠’ 박자를 생각하며 통과하라고 제안한다. 이때 우영우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회전문의 쓸모를 상기하며 회전문이 ‘왜’ 존재하는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대안을 말한다. 이렇게 〈우영우〉는 전형적 형식을 빌려 전형적이지 않은 문제의식과 질문을 공유하며 시작되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이 드라마를 통해 우리는 그간 우리가 납작하게 인식한 ‘장애인’이 얼마나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존재인지 생각해볼 기회를 가졌고, ‘드라마 속 장애인’ 우영우와 장애인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현실 속 장애인’ 박경석 사이에 흐르는 인식의 간극을 가늠해볼 수 있었다. 또한 ‘방구뽕’이라는 인물을 통해 어린이를 억압하는 교육 현실을 돌아볼 수 있었으며 사랑과 폭력 사이에 놓인 지적 장애 여성의 복합적 입장을 고려해볼 수 있었다. 〈우영우〉는 없는 이야기를 창조해낸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있어왔지만, 은근하게 묵인했던 다양한 사회적 주제를 논쟁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판을 깔아준 것이다. 〈우영우〉 덕분에 해당 주제에 관한 여러 입장의 이야기들을 접할 수 있었다는 건 드라마가 준 뜻밖의 유익이었다. 마치 다양한 ‘고래들’을 만난 느낌이랄까.
성장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우영우들’
여기에 덧붙여, 내가 〈우영우〉에게서 발견한 것은 결국 사회 공동체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끄는 것은 저마다의 한계를 인정하며 성장을 도모하는 인간이라는 통찰이다. 그렇기에 이 드라마를 ‘성장 드라마’로 볼 필요가 있다. 이 드라마는 ‘장애를 가진 초보 변호사의 성장기’로 압축할 수 있지만 나는 우영우의 성장만큼이나 ‘빌런’ 권민우에게도 성장의 동기를 줘서 좋았다. 이기적인 능력주의자로 남을 수 있었던 ‘권모술수’도 바보같이 살고자 노력하는 ‘권민우’가 될 기회를 가지는 건 사회적으로도 옳은 방향이지 않은가! 물론 그 동기가 하필 ‘연애’이고 그러느라 ‘봄날의 햇살’ 최수연을 ‘금사빠 공주님’으로 만든 건 아쉽지만 사랑(이별 포함)이야말로 인간이 성장할 최고의 동기이자 동력인 것도 부인하긴 어렵다. 다른 드라마였다면 권민우의 가정환경이 더 부각되어 “사실 이런 능력주의의 화신들도 다 사정이 있어”를 강조하는데 방점을 찍을 수도 있었겠지만, 최수연이라는 ‘봄날의 햇살’이 우영우뿐 아니라, 권민우에게도 필요하다는 이 드라마의 강조점은 곱씹어볼 만하다. 이것이 진정한 ‘햇볕 정책’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권민우 뿐 아니라 〈우영우〉 속 인물들은 저마다 한계와 딜레마를 가진 인물이기도 하다. 우영우나 정명석 등 ‘한바다’ 변호사들은 누군가에게는 사회적 약자, 좋은 선배, 너그러운 봄날의 햇살일 수 있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강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나쁜 변호사’일 수 있다. 그렇기에 인권 변호사 류재숙이 등장하는 12회는 의미가 있다. 12회는 미르 생명에서 부당 해고를 당한 여성 직원들이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걸고, 한바다 변호사들은 사측을 변호하는 입장이 된다. 이 회차에서 우영우는 사측을 변호하기 위해 여성 직원의 산부인과 진료 경력까지 파헤치는 강자의 대변인으로서 자신의 특별한 능력을 사용하지만, 한편으로는 돌고래 전시를 중단하고 바다로 돌려주라는 시위에 나선다. 동시에 우영우는 “의뢰인 권리 보호, 손실 막는 게 최우선”인 변호사와 “한 인간으로서 의뢰인 옆에 앉아서 손 꽉 잡아주는” 변호사 사이에서 갈등을 하기도 한다. 나는 올바르고 선량하여 사랑하기에 충분한 우영우보다, 상대의 감정이나 주변 맥락을 헤아리지 못해 실수하고, 어리석고 비겁한 선택을 하는 복잡한 존재일 수밖에 없는 우영우가 더 좋았다.

조금씩 정의롭고, 조금씩 비겁한 가운데 흔들리며 성장해가는 드라마 속 캐릭터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스틸컷.
우영우뿐 아니라 인간은 누구나 복잡한 존재다. “무단횡단을 하던 길에 쓰레기를 줍고 가는 아저씨를 보았다. 사람이 이렇게 복잡하다”고 쓴 웹툰 작가 주호민의 글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저마다의 복잡함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선의 선택을 하기 위해 고민해야 하는 숙명을 지닌 존재들이기도 하다.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누군가는 ‘권모술수’가 될 수 있고, 어떤 이는 ‘봄날의 햇살’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 드라마는 각자의 한계를 명확하게 인식하며 ‘권모술수’에게서도 가능성을 발견하며 태수미와 태수미의 아들에게도 잘못을 돌이킬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우리에게 각자의 자리에서 흔들리면서도 결국 자기 분량 만큼의 양심을 지키는 선택을 할 것을 권유한다.
물론 이런 작가의 선택이 다소 나이브해 보일 수는 있다. 한국사회는 개인의 선한 양심으로만 해결될 수 없는 체제의 문제가 쌓여있으며 그런 선한 양심은 때론 강자의 체제를 이롭게 하는 데 악용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뚜렷한 성찰 없이 바보 같은 선택을 하기로 한 권민우의 선택이 도리어 ‘판타지’처럼 여겨질 수 있고 ‘한바다’의 정규직이 된 우영우를 보여준 결말이 다소 진부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어쩌면 (나를 포함한) 어떤 이들은 권민우가 된통 당하는 ‘사이다 정의’를 맛보고 싶었을 테고, 우영우가 류재숙 법률사무소로 이직하여 ‘양쯔강 돌고래’처럼 살기를 바랐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작가는 권민우에게 ‘햇볕 정책’을 사용하여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하게 하고, 우영우는 거대한 체제인 ‘흰고래 무리’ 속에서 ‘외뿔 고래’로 살기를 선택하도록 한다. 이런 선택을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할까?
흔들리며 평화의 길을 걷는 ‘이상민들’
어떤 가치나 지향을 선명하게 내비치는 것도 중요한 의미가 있겠으나, 바다에 존재하는 다양한 돌고래들처럼 ‘한바다’라는 거대한 체제 속에서 “이상하고 별나지만 가치 있고 아름다운” 자신을 지키며 저마다의 속도로 성장하는 모델들을 조금 더 많이 보여줄 필요가 있다는 면에서 결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 글을 부탁받고 〈우영우〉와 조금은 닮은 ‘옳은’ 선택을 하는 조금은 부족하고 평범한 사람들의 얼굴을 그려보았다. ‘병역거부자’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중에서도 얼마 전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전쟁 없는 세상’의 신실한 친구이자, 아끼는 동생 이상민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 글을 쓰며 상민이 쓴 ‘병역거부 소견서’를 다시 읽었다.
나를 포함한 어떤 이들은 ‘병역거부’라는 급진적 선택을 한 이들을 대단하게 여기곤 하지만, 상민은 그런 ‘대단한 사람’으로 분류되기에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드라마와 맛있는 걸 좋아하고, 자전거를 좋아했으며 신실하지만 조금은 까칠한 그리스도인이었고, 은근 (똥) 고집이 있어서 주변 사람들을 곤란하게 할 때도 있었다. 상민은 질문하기를 좋아했다. 가끔 나에게도 전화해 어떤 사안에 관해 질문을 하곤 했다. 그렇게 질문하기를 좋아한 청년, 상민이 자신에게 주어진 작은 질문을 허투루 흘려보내지 못한 채 그 질문에 대답하는 삶을 살고자 ‘병역거부’의 삶을 택한 건 조금 이상하지만 지극히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확신의’ 병역거부자는 아니었다. “훌륭한 사람이 훌륭한 선택을 하는 게 아니라 훌륭한 선택이 훌륭한 사람을 만든다”는 ‘병역거부 소견서’ 속 고백처럼 상민은 자신의 한계를 느끼며 부대껴하면서도 차마 피할 수 없었던 질문에 관한 답을 구하며 평화에 이르는 방법을 찾고자 했던 사람이었다. 그런 상민을 보며 나는 상민뿐 아니라, 평화의 길을 걷고자 노력하는 이들, 병역거부라는 고된 선택을 한 이들이 대단한 신념을 가지고 그 길을 걷는 게 아니라 매 순간 흔들리며 때론 비틀거리며 걷는다는 사실을 조금 알게 되었다. 그래서 상민의 짧은 생이 우영우를 비롯하여 각자의 한계 속에서 흔들리면서도 성장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던 드라마 속 인물들과 겹쳐서 보였다.
차별보다는 존중을 선택하고, 전쟁보다는 평화를 선택하고, 강자의 옆자리보다는 약자의 손을 잡아주는 일은 ‘드라마’ 속 세상만큼 극적이거나 멋진 일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에게 실망하며 지난한 시간을 견뎌야 하는, 재미없고 지루한 ‘다큐멘터리’와 같다. 그러나 그 길을 미련하고도 성실하게 걷는 이들이 있기에 조금은 위안이 되고 안심도 되고 고맙다. 드라마 속 인물들과 상민이 그러했던 것처럼, 오늘도 사소한 이익 앞에서, 어쩔 수 없는 상황 앞에서 갈등하면서도 결국 더 나은 선택을 위한 질문을 피하지 않고 용기를 낸 이들을 응원한다.
덧붙임)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자 신중한 병역거부자, 상민의 양심이 잊히지 않게 하기 위해 그의 장례식을 다녀와 전쟁없는세상의 후원자가 되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좋아했던 상민이 이 글을 읽고 좋아해 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