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민씨는 2013년 10월 29일 입영일날 병무청에 병역거부 의사를 밝혔고, 2014년 3월 12일 첫재판을 앞두고 병역거부 소견서를 공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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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견서
제 어린 시절 기억은 군대와 함께 시작됩니다. 제 아버지는 화전민이셨던 할아버지의 셋째 아들로 힘든 유년을 지나 노력 끝에 자수성가한 공군 조종사였습니다. 군 기지에서 다른 군인 자녀 친구들과 함께 자전거 타고, 물놀이 하고, 산을 타고, 군인 아저씨들이 주는 과자를 먹고, 장난감 총을 가지고 놀며 자랐습니다. 당시 제 친구들, 그러니까 공군 조종사의 아들들의 80%는 꿈이 전투기 조종사였습니다. 저와 제 친구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다보니 무기나 전투기, 전차 등에 대한 지식을 서로 뽐내며 머릿속에서 가상 전쟁을 벌여보는 일은 우리 또래의 즐거운 유희였습니다. 저 역시 어떤 전투기에는 어떤 무장을 할 수 있고 저 미사일의 성능은 어떠하며 저 폭탄의 살상범위가 어느 정도인지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장난감 총 놀이는 우리들의 일상이었으며 저를 포함한 제 친구들은 총의 위력을 더 좋게 하는 방법(일명 튜닝, 혹은 개조)에 능숙했습니다. 이것이 제 유년환경이었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말, 아버지가 전역과 동시에 민간항공사로 이직을 하게 되면서 저는 서울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서울은 저에게 낯선 곳이었습니다. 고기가 두 장이나 들어간 맥도날드의 햄버거는 문화충격이었고, 처음 본 SBS라는 채널은 신기하기만 했습니다. 뉴스에서는 ‘왕따’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제가 살던 곳에서는 존재하지도 않던 개념이었는데 여기서는 흔하디흔한 현상이었습니다. 서울 친구들은 정말 공부를 열심히 했던 것 같습니다. 등수가 중요했고, 현기증 나게 많은 학원들은 무섭기만 했습니다. 그런 낯선 서울에서 저는 예전처럼 즐거움을 좇아 놀기 시작했습니다. 공부가 너무 하기 싫어서 고등학교도 실업계를 가고 싶었지만 부모님의 강력한 반대로 인문계 고등학교로 가야했습니다. 그때 “실업계는 인간쓰레기가 가는 곳이다”라는 아버지의 말씀이 큰 충격으로 제 안에 자리 잡았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억지로 수능을 치르고 유아교육과에 입학했습니다. 부모님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지만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내가 가르치는 애들은 좀 덜 불행했으면 좋겠다”라는 이타적인 마음과 “성인이 되었으니 내 일을 스스로 결정하고 싶다”라는 이기적인 마음의 결과였습니다.
오해가 있을 수도 있어 미리 말씀드리자면, 병역거부자의 삶을 선택하려는 지금의 제 모습과는 다르게도 제 대학생활은 무척 건전했습니다. 저는 기독교인이며, 어려서부터 부모님과 함께 교회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자라왔습니다. 교회와 성경은 저에게 있어 세상을 바라보는 안경이자 새로운 것들을 측량하는 잣대였습니다. 대학도 신학대학을 선택했으며 그 안에서 유아교육을 배웠고 동아리 활동도 성경을 공부하는 선교단체를 선택했습니다. 흔히들 말하는 ‘운동권’은 저에게 있어 멀고도 먼 개념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2007년 여름, 대학교 2학년 즈음에 <복음과상황>이라는 기독교 월간지에서 종교적 신념 때문에 ‘양심적 병역거부’를 한 사람의 인터뷰를 보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이상하면서도 낮설었습니다. 기성교회에서 자라온 저에게 있어 ‘양심적 병역거부’라는 건 이단인 ‘여호와의 증인’들이나 하는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터뷰 속 사람은 평범한 교회를 다니고 있는 사람이었고 무척 생소한 ‘평화주의’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길고도 험난한 고민이 시작된 것은 그때부터였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해칠 수 있을까’라고 무심코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 하나가 오늘의 나를 만들어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척 어려운 질문이었습니다. 남한과 북한이 대치하고 있는 나라에서 태어나고, 군인의 아들이며, 동시에 신앙인으로서 살아온 저에게 특히나 어려운 질문이었습니다. 끊임없이 사색하고 관련 자료들을 찾아보고 막막할 땐 신에게 기도하며 이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중 ‘기독교평화주의’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기독교는 로마시대 때부터 병역거부자가 있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이 있을 때도, 미국이 베트남이나 다른 나라와 전쟁을 벌일 때도 병역거부자들이 있었습니다. 제가 본 기독교는 혐오와 배척, 아집과 독선의 종교가 아니라 용서와 사랑, 화합과 관용의 종교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신앙인으로서 이러한 길을 걸었던 많은 선배들이 무척 자랑스럽고 제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많이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선택의 순간이 다가왔습니다. 7년의 고민 속에 스스로에게 던지는 많은 질문들이 있었습니다. ‘나는 과연 이런 힘든 선택을 할 만한 사람인가’, ‘나는 평화주의자인가’, ‘내 행동의 정당성을 입증 할 수 있는가’ 등 쉽지 않은, 하지만 피할 수 없는 질문들이 쏟아졌습니다. 그 중 첫 번째 질문은 가장 저를 망설이게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제 인생을 돌아봤을 때, 저는 찌질하고 전형적인 소인배임을 인정합니다. 어떤 일을 책임감 있게 하는 경우가 드물며, 주변 사람들에게 쉽게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훌륭한 사람이 훌륭한 선택을 하는 게 아니라 훌륭한 선택이 훌륭한 사람을 만든다는 것을 믿기로 결정했습니다. 제 인생 속에서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인생이란 그래프 속에 날카롭게 튀어나온 과거의 변곡점들이 아니라 지금 당장 내가 서 있는 좌표임을 믿습니다. 또 저는 군사조직을 부정할 만한 근거를 찾지 못했습니다. 병역을 거부하긴 하지만 군대가 갖는 전쟁억제 역할 대해 부정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신앙인으로서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민족들은 칼을 들고 서로 싸우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 훈련도 하지 아니하리라”(이사야 2:4)라고 말한 이사야 선지자의 이상을 굳게 새기고, 로마 병정에게 잡히시던 순간에도 “칼을 도로 칼집에 꽂아라. 칼을 쓰는 사람은 칼로 망하는 법이다. 내가 아버지께 청하기만 하면 당장에 열두 군단도 넘는 천사를 보내주실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느냐?”(마태복음26:52~53)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겸손을 따르며 살기로 결정했습니다.
끝으로 저는 대한민국 군대와 군대에 입대하는 제 친구들을 부정하는 꽉 막힌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양심에 합한 선택을 할 수 있고 그 선택은 존중받아야 마땅합니다. 다만, 저 역시 신이 주신 이성과 양심에 따라 불가피한 선택을 하지만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이러한 선택이 존중받길 바랍니다. 저는 신앙인으로서 군대 내부의 여러 미시적이고 폭력적인 문화에 대해 반대하고, 파병이나 전쟁 같은 국가 간에 일어날 수 있는 거시적인 폭력에 반대합니다. 또, 내 의지와 별개로 누군가를 다치게 할 수도 있고 원치 않는 피해자가 될 수도 있는 상황에 놓이는 걸 반대합니다. 총싸움과 전투기 이름외우기를 좋아하던 소년이 지금은 이 모양 이 꼴이 되었습니다. 슬프고 안타깝지만, 어떻게 보면 재미있고 의미 있는 일입니다. 긴 이야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해쳐나가야 할 날들이 많습니다. 제 고민과 말들이 무의미해지지 않도록 지켜봐주시길 부탁드립니다.
2014.3.12
이상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