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은전(작가,《그냥, 사람》저자)
비질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공장식 축산의 현장, 정확히는 도살장 앞에 가서 그곳으로 끌려가는 동물들을 마주하는 것이다. 도살장의 공식 명칭은 OO축산이고 대부분의 평범한 공장들처럼 투박하고 네모반듯하게 생겼다. 내부로는 접근할 수 없으므로 행사에 참가한 사람들은 그저 정문 앞에서 대기 중인 트럭 안에 있는 동물들을 짧은 시간 바라볼 뿐이다. 한 대의 트럭이 대기하는 시간은 20-30분이지만 하나의 트럭이 도살장 안으로 들어가면 다음 트럭이 대기 선 안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사람들은 계속 다른 동물을 만날 수 있다. 나는 그곳에 딱 두 번 갔을 뿐이지만 상상 속에서 수시로 그날로 붙들려 간다. 그 느낌을 아직은 말로 설명할 수 없다. 그러기 위해 아주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날로 돌아갈 때마다 나는 어떤 질문에 사로잡혔다. 저렇게 큰 동물을 대체 어떻게 죽일까? 돼지는 100kg, 소는 600kg이 넘는다. 작은 고양이와 함께 살게 된 후 나는 동물 역시 인간처럼 자신의 신체를 억압하는 존재에게 죽을힘을 다해 저항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므로 고양이가 원치 않는 일, 이를테면 약을 먹이는 일 따위를 하려 해도 기만이든 협상이든 순전한 무력이든 노력과 기술이 필요한 것이다. 저 돼지들도 분명 그러할 텐데, 대체 저 공장 안에선 어떻게 저토록 빠르게 도살이 이루어질까? 20분은 수십 명의 동물을 바라만 보기에도 충분치 않은 시간이었다. 그런데 100미터 저편 공장 안에서 누군가는 그 속도로 동물들을 무려 살해하는 것이다. 저 공장 안은 대체 어떻게 설계되었을까?
전쟁없는세상으로부터 동물과 전쟁이라는 주제로 글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았을 때 나는 대번에 대답했다. “저는 동물도 모르고 전쟁도 모르는데요.” 하지만 써보겠다고 했다. 동물들이 이 세계에서 어떻게 살고 죽는지 알아갈 때마다 나는 이렇게 중얼거렸기 때문이다. “이건 전쟁이잖아…?”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특별히 전쟁에 대해 관심을 갖거나 마음 깊이 아파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홀로코스트를 다룬 영화 <피아니스트>를 보면서는 이렇게 읊조렸다. ‘저건 동물들의 이야기잖아?’ 이유 없이 조롱당하고 무력하게 총을 맞고 피 흘리며 죽는 인간들에게서 동물이 보일 때, 나는 이전보다 훨씬 생생하게 전쟁의 가슴 아픔과 무시무시함을 느끼고 있었다. 역시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이 연상들을 이해하고 싶었다. 그래서 <동물홀로코스트>를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의 부제는 ‘동물과 약자를 다루는 ‘나치’식 방식에 대하여’이다. 작가, 역사가이면서 홀로코스트 연구자인 찰스 패터슨이 쓰고 한겨레신문 국제부 정의길 기자가 번역했다.

<동물홀로코스트> 표지
차별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야기는 ‘가축화’의 역사에서 시작된다. 책을 열자마자 나는 무언가 엄청난 세계의 문을 열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고양이와 함께 살면서 나는 고양이에 관한 책을 많이 읽었는데 언제나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가축화였다. 고양이는 개보다 가축화의 역사가 짧아 야생성이 더 강하게 남아 있으므로 그에 맞게 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책을 읽으며 나는 ‘가축화’가 인간과 동물이 친해지고 서로를 길들인 역사라고 이해했다. 이 책은 가축화를 전혀 다르게 설명한다. 동물의 자리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가축화’란 이런 것이다. 여성 동물에게 젖을 얻으려면 새끼들이 먹어야 할 젖을 빼앗아야 하므로 다양한 방법이 고안된다. 투아그레족은 송아지가 젖을 빨 때마다 고통을 느끼게 하기 위해 볼에 구멍을 뚫어 재갈을 물리듯 막대기를 끼워 넣었다. 르왈라족은 어린 낙타의 콧구멍 아래 날카로운 못을 삽입해 젖을 먹으려 어미에게 다가갈 때마다 어미를 찌르게 만든다. 거세는 동물 사육의 핵심이다. 수태 능력이 우수한 번식용 동물만 남기려는 것이다. 라프족은 수레를 끄는 데 이용하는 순록 떼 대부분을 거세시킨다. 순록을 붙잡아놓고는 음낭을 천으로 싸서 이빨로 깨물어 씹어서 부서뜨린다. 뉴기니에서는 돼지가 마음대로 먹이를 찾아 이동하지 못하도록 돼지의 입을 얇게 잘라내 그 고통으로 땅을 파지 못하게 한다. 돼지의 눈을 파내고 막대기로 눈을 찔러 체액을 빼낸 뒤 망가진 눈을 다시 눈구멍에 넣기도 했다.
농업혁명의 일부로서 인간 진보의 핵심이라고 여겨졌던 가축화의 디테일을 아는 건 매우 중요하다. 차별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동물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것이 사회의 토대가 되고 자연적 질서로 인식되면서 어떤 폭력과 무자비함이 사회적으로 용인되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면 동물뿐 아니라 인간까지도 그와 비슷한 방식으로 다루게 된다. 바로 인간 노예제이다. 노예제는 동물을 예속화하는 가축화가 인간으로 확장된 것이라고 이 책은 말한다. 인간이 미개한 동물을 지배하는 게 마땅하듯 동물처럼 미개한 인간을 지배하는 것도 마땅한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정복하고 싶은 인간들이 생기면 그들을 동물로 칭했다. 인간을 동물로 부르는 것은 언제나 불길한 징후, 대량학살의 징후다.
아메리카의 식민지 개척자들은 원주민들을 붉은 야만인, 이성이 아닌 감정의 지배를 받는 동물로 보았고 “우리의 문명을 지키기 위해 이런 존재들은 지상에서 쓸어버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며 그들의 사지와 코, 손, 혀, 생식기를 잘랐다. 18세기 미국에선 원주민 노예가 새로운 주인에게 팔릴 때마다 동물에게 낙인을 찍듯 새로운 글자를 얼굴에 새겨서 얼굴 전체가 글자로 뒤덮인 노예도 있었다. 일본은 중국을 침략했을 때 중국인을 돼지라고 불렀다. 군대에서 신병이 중국에 도착하면 ‘감성 둔화 훈련’의 일환으로 중국 민간인을 죽이도록 시켰다. 나치는 유대인을 고리대금업을 하는 해충이라 칭했고 자신들이 치를 ‘최종해결’이 세균학자 파스퇴르가 싸웠던 것과 동일한 전투라고 말했다.
동물의 가축화는 ‘인간이 동물보다 우월하다’는 종차별로 이어지고 그것은 어떤 인간이 다른 인간들을 ‘동물 같다’고 낙인찍어 지배하는 인종차별로 이어진다. 이 책의 1부를 읽는 동안 1만 년이 흘렀다. 족쇄를 차고 새끼를 빼앗기고 낙인찍히고 거세당하고 도살되는 동물의 모습과, 동물이라 칭해진 인간들이 동물처럼 낙인찍히고 거세되고 도륙당하는 모습이 마치 릴레이 달리기를 하듯 계속 이어진다. 어느샌가 그 순서와 구분이 모호해진다. 모욕과 도륙을 당하는 존재들을 보며 그 끔찍함에 몸서리를 치면서도 내가 충격을 느끼는 것이 인간의 죽음인지 동물의 죽음인지 헷갈리는 혼돈, 인간과 동물이 계속 겹쳐 보이는 환시를 느끼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저자가 원하는 일일 것이다.
기념비적 규모의 죽음이 시작되었다
산업화 이후 이 착취는 그야말로 폭주하기 시작한다. 동물착취와 인간착취는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살피는 2부는 이렇게 시작한다.
아우슈비츠로 가는 길은 도살장에서 시작되었다.
내 머릿속에서 직관적으로 겹쳐졌던 두 개의 장소는 어떻게 만날까. 나는 단 하나의 문장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며 이 장을 읽었다.
1865년 크리스마스, 미국 시카고에 유니언 스톡 야즈가 개장했다. 2,300여 개의 가축 축사와 호텔, 식당, 살롱 등이 있는 거대한 복합 지대로 약 78만 평의 땅을 차지했다. 동물착취가 대규모 산업으로 탈바꿈했다. 공장식 축산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곳을 둘러싸고 160km 이상의 철도가 부설되었다. 서부의 소, 양, 돼지들이 기차 가득 실려 왔다. 정육업자들은 늘어나는 가축 물량과 증가하는 육식 수요를 충족하고자 컨베이어 벨트를 도입했다. 이 새로운 일관생산 조립라인이 동물을 죽이고 해체하고 다듬고 대중에게 발송하는 속도는 놀라웠다. 가히 기념비적 규모의 죽음이 시작되었다. 노동자들은 고도로 분업화된 노동을 맹렬한 속도로 수행했다. 이 기계화된 도살 시스템은 혁신의 상징이었다. 1905년 업튼 싱클레어가 유니언 스톡 야즈를 취재해 쓴 소설 <정글>에 의하면 도축의 산업화란 이런 것이다.
서커스장 같은 거대한 방에서 노동자들은 거세된 수소들을 한 시간에 400-500마리를 도축했다.
->소 떼가 도착하면 좁은 통로로 몰아넣는다.
->소들은 분리된 우리로 들어가 갇힌다. 그곳에서 움직이거나 뒤돌아서지도 못한 채 울부짖었다. 우리 위에선 ‘녹커’(망치로 때리는 사람)가 커다란 망치를 손에 들고 소에게 일격을 가할 기회를 노리고 있다. 방 안은 소의 머리를 빠르게 때리는 소리와 소들이 우리를 발로 차며 날뛰는 소리들로 가득 찼다.
->소가 쓰러지자마자 노커는 다른 소 위로 옮겨갔다.
->다음 공정의 작업자가 빗장을 올리면 우리의 옆이 열린다. 발을 구르고 몸부림치는 소가 ‘도살대’로 밀려 떨어진다.
->작업자는 소의 다리에 족쇄를 채우고 지렛대를 당겨 소를 공중으로 들어 올린다.
->다음 작업자는 소의 목을 신속하게 딴다. 어찌나 빠른지 그 모습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다. 피가 쏟아져 바닥에는 최소한 반 인치 정도 두께의 핏물이 흥건히 고여 있다.
->피투성이 사체는 노동자들이 기다리는 작업라인으로 내려간다.
->‘헤즈맨(목 베는 사람)’이 톱으로 소의 머리를 잘라낸다.
->‘스키너(가죽 벗기는 사람)’들이 가죽이 상하지 않게 조심스럽게 자르고 벗겨낸다.
->가죽이 벗겨지고 머리가 잘린 사체가 작업대를 따라 내려간다.
->작업자들은 그것들을 절단하고 내장을 발라 뜯어내고 다리를 잘라낸다.
->절단된 사체에 호스로 물을 뿌린 뒤 냉각실로 옮기고 남은 부위는 동물 사료가 된다.
15-20마리의 소를 단 2-3분 만에 쓰러뜨려 굴려 보냈다. 다시 문이 열리고 또 다른 소들이 밀려 들어왔다.
어떤 거인이 이 도살이 일어나는 거대한 정육면체의 공장을 들어 올린다면, 이 장면은 거대한 도륙, 학살일 것이다. 하지만 그 위에 공장을 씌우면 축산업이 된다. 이 시스템에 영감을 받은 사람이 있었다. 바로 자동차 왕 헨리 포드. 그는 젊은 시절 시카고의 한 도살장을 방문했을 때 이 과정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정육업자들의 효율적 도살 방법에 인상을 받은 헨리포드는 유럽의 ‘도살자’들에게 특별한 기여를 했다. 그는 나치가 유대인을 죽이는 데 사용한 일관식 조립라인을 개발했고, 홀로코스트를 불러일으킨 잔악한 반대유대주의 운동도 했다. 독일에 영향을 미친 미국의 이 두 가지 현상은 국민들의 질을 개량시키려는 폭넓은 문화적 현상의 일부이다. 그것은 바로 우생학. 우생학은 가축의 육종, 즉 최우량종만 번식시키고 나머지는 거세하고 죽이기 위해 발전한 기술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었다. 우생학은 미국에서는 단종, 독일에서는 단종, 안락사, 집단학살로 이어졌다.

가스실로 끌려가는 수용소의 유대인들. 동물을 ‘효율적으로 도살’하는 시스템은 인간을 ‘효율적으로 학살’하는 시스템으로 이어진다.
동물육종은 어떻게 홀로코스트로 이어졌는가
1903년 미국 육종인협회가 창설되었고 그곳에선 식물과 동물의 선택적 육종에서 성취한 결과들이 보고되었다. 이는 참가자들로 하여금 이런 질문을 품게 했다. “저런 기술들이 왜 인간에게 적용되어서는 안 되는가.” 1910년 설립된 우생학 기록소의 소장 찰스 데이븐포트는 가금류 연구자였다. 그는 “우생학은 더 좋은 육종으로 인종을 개량하는 과학”이라고 말했다. 20세기 우생학운동의 주요 목적은 단종이었다. 우생학 지지자들은 이 사회가 정신적으로 결함이 있거나 범죄 성향이 있는 사람들의 출산을 예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930년 미국 주들의 절반 이상이 ‘저능아, 간질환자, 정신박약자’에 대해 강제불임 수술을 실시하는 단종법을 통과시켰다. ‘벅 대 벨’ 판결에서 대법관은 이렇게 말했다. “만약 주 당국이 전시에 젊은 남자를 군대에 복무하도록 강제할 수 있다면 우리 주민들이 무능력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주의 역량을 약화시키는 사람에게 작은 희생을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
미국의 우생학에 깊은 인상을 받은 독일의 나치는 1933년 장애인을 단종하도록 규정했고 1939년 히틀러는 T-4계획을 단행했다. 독일의 우생학 캠페인은 치명적 단계로 들어섰다. 정신적·육체적으로 지체되고 병약하여 아리안 민족의 우월성을 더럽히는 독일인들을 조직적으로 살해하도록 지시한 것이다. 그들은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빠르게 죽이는 방법을 토론한 결과 가스실을 고안했다. 1940년 6개의 가스실을 개장했다. 가스를 사람들에게 끌어오기보다 환자들을 가스실로 이송시키기로 결정한 것이다. 1939-1941년 동안 7-9만 명이 죽었다. T4는 유대인 집단학살의 서장이었다. T4의 기술은 유대인을 학살하는 처형 수용소로 이전되었다. 가스실과 화장터뿐만 아니라 희생자들을 가스실로 유인하고 일관식 조립라인으로 그들을 죽이고 시체를 처리하기 위해 개발된 방법 모두가 포함된다.
홀로코스트의 주요 이론가, 설계자, 집행자들은 농업과 동물 육종 권위자이거나 우생학 지지자들이었다. 홀로코스트 설계자 힘러는 농업을 공부했고 양계장을 운영하며 닭을 육종했던 사람이었고, 이론가 다레는 농업전문가였다. 아우슈비츠 소장 회스는 농업의 열광적 지지자로 수용소를 농업연구소로 만들고 싶어 했던 사람이었다. 그들 누구도 ‘괴물’이 아니었고 ‘평범한’ 농업과 축산업 권위자들이었다. 축산업은 우생학의 요람이었다. 유대인을 절멸시키는 임무를 수행한 이들에게 동물착취와 도살의 경험은 훌륭한 훈련이었다.
운명은 결정되었다 도망칠 방법은 없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문장은 이것이다. 두 개의 문장인데, 그것을 이으면 이렇게 된다.
운명은 결정되었다. 도망칠 방법은 없다.
처형센터에서 희생자들을 죽음으로 이끄는 경로의 마지막 부분은 활송장치(미끄러뜨리듯 물건을 이동시키는 장치), 관, 죽음의 골목 등 다양하게 불린다. 황소가 일단 그 활송장치에 들어가면 운명은 결정된다. 아무리 힘센 동물도 살아서 나갈 가망은 없다. 활송장치를 지나 공장 안으로 들어가면 곧바로 두개골에 총알이 박히는 것이다. 트레블링카 수용소에서 가스실로 가는 마지막 통로인 ‘관’은 너비 3-4m에 길이 140m 정도의 길로 되어 있었다. 사람들이 일단 막사에서 몰살 수용소로 연결되는 관에 들어가고 나면 아무리 저항정신이 투철한 인간이라도 달아날 방법은 없다.
인간을 희생시키는 모델의 기초는 동물을 희생시키는 것이다. 먼저 인간이 동물을 착취하고 도살한다. 그런 다음 인간은 다른 인간들을 동물처럼 취급하고, 동물에게 했던 짓을 사람들에게 똑같이 한다. 미국과 독일은 금세기 대학살에 독특한 기여를 했다. 미국은 도살장을, 나치 독일은 가스실을 제공한 것이다. 희생자들은 다르지만 학살 공정은 공통적인 양상을 갖고 있다. 학살 과정은 고도로 능률화되어 있다. 처형센터의 속도와 효율, 그 공정은 희생자들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파악하고 대응할 수 없다. 탈주나 저항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죽음이 저 앞에 있다는 것을 직감하면서도 앞으로 걸어가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인간과 동물들의 행렬을 생각하면 서늘하고 무시무시하다. 수많은 동물들이 네 발로 끌려간 그 길로 두 발의 인간들도 끌려서 걸어갔다. 가장 먼저 희생된 인간은 (실질적으로나 비유적으로나) 두 발로 걷지 못하는 열등한 인간, 동물화된 인간, 그러니까 장애인이었다. 나치 친위대는 그 ‘관’을 ‘천국으로 가는 길’이라고 불렀고 유대교 회당에서 가져온 검은 커튼을 가스실이 있는 건물 입구에 쳤다. 미국의 동물과학자 템플 그랜딘도 자신이 설계한 동물들의 마지막 통로를 ‘천국으로 가는 계단’으로 불렀다. 그 길의 진실을 아는 존재들은 모두 살해되었다.
예술가 주디 시카고의 글은 아주 인상적이다. 홀로코스트를 접하고 인류의 폭력성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웠던 시카고가 그 폭력의 기원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은 아우슈비츠를 방문해 소각장의 축소모형을 보았을 때였다. 그것은 산업화된 동물 도살과 가공처리 시설, 그러니까 축산업 시스템이었던 것이다. 시카고는 이렇게 썼다.
나는 돼지를 가공처리하는 것과 돼지라고 규정된 사람들에게 똑같은 일을 하는 것 사이의 윤리적 차이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도덕적인 고려가 동물에게까지 확장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것은 바로 나치가 유대인들에게 했던 말이다. (중략) 아우슈비츠가 기이하게도 익숙하게 보인다.
나 역시 그랬다. 도살장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자 아우슈비츠에 관한 이야기나 이미지가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아무 이유 없이 조롱당하고 엄마를 빼앗기고 자식이 끌려가는 걸 속수무책 바라보고 학대당하고 착취당하고 처형당하고 생매장 당하는 존재들 말이다. 그저 먼 나라의 과거완료형 비극이 동물 문제를 경유하자 그 슬픔과 참혹함이 이상할 만큼 생생하게 증폭되어 보였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떠난 자리에 동물들은 남았기 때문이다. 나치가 유대인에게 했던 일들은 중단되었지만 똑같은 일이 더 빠른 속도로 동물에게 계속 자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늘도 현재진행형인, 우리 모두가 의존하는 현대기술, 즉 축산업이다.
상상 속에서 도살장 앞으로 붙들려 갈 때마다 나는 몸과 정신이 마취되어서 아파도 아픔을 느끼지 않고 슬퍼도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 세계대전의 비인간성을 상징하는 대학살이 오늘날 우리 일상을 지탱하는 기본 질서라는 사실을 자각하면, 인류 역사 최악의 범죄인 홀로코스트가 우리의 식탁 아래 거꾸로 매달려 작동되고 있다는 기이한 감각에 휩싸이기 때문이다. 사실 내가 정말로 궁금했던 건 도살장 내부가 아니다. 그런 건 유튜브에서 금세 찾을 수 있고 나는 수도 없이 그것들을 보았다. 내가 정말 알고 싶었던 건 그런 학살시스템을 설계한 평범한 현대의 기업가, 과학자, 건축업자들의 머릿속이다. 아니, 그것도 아닌 것 같다. 내가 정말 궁금했던 건 40년 동안 살아오면서 이 엄청난 학살을 전혀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내 머릿속 설계였다. ‘인간은 동물보다 우월하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 ‘동물을 이용하고 죽이는 것은 자연의 섭리’라는 ‘당연한’ 믿음에서 출발한 그 생각이 자본주의를 만날 때, 전쟁을 만날 때, 어디까지 뻗어 가는지 무시무시하게 보여주는 이 책을 통해 깨달았다.
역사는 진보한다고 믿었다. 그 역사에 동물이 포함되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다. 나는 이제 더 이상 그렇게 생각하지 않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