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병역거부자)

 

가는 길에 버스 안에서 강연 안내문을 다시 꺼내봤다. 5월 15일은 세계병역거부의 날이자 전쟁없는세상 창립일이다. 올해는 특별히 전쟁없는세상 창립 20주년을 맞아 힘주어 행사가 기획됐다. 무려 <태국 최초의 병역거부자 네티윗 초청 강연>. 흥미로운 강연이라 미리 참가신청을 해두었다.

궁금해졌다. “태국이라고? 왜 태국 활동가가 초청되었지? 태국 병역거부 운동이 유명한가?” 그리고 또 궁금해졌다.  “태국에서 최초로 병역거부를 한 사람이라고?”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알려진 ‘양심적 병역거부자’는 20년 전에 나왔는데, 그런 이력을 가지고 경력이 오래된 평화활동가가 와서 태국 병역거부 운동의 흐름을 짚어주겠구나 싶었다.

강연장에 도착해서 연사 ‘네티윗’씨가 누구일까 두리번 거렸다. 태국인으로 보이는 분을 쉽게 찾았다. 앗, 그런데 20대 초중반 정도로 예상보다 젊어보였다. 네티윗씨의 정체를 어서 알고 싶었다. 비건 간식을 주섬주섬 챙겨서 착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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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 중인 네티윗씨 (연사석 두 번째)

 

알고보니 태국에는 그간 병역거부자가 없었고, 네티윗씨가 태국 최초의 병역거부자로 당국이 현재 예의주시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병역거부로 수사를 받고 있으며 재판을 앞두고 있는 상황. 용기를 내어 한국에 와준 것이 고마웠다. 생생한 증언과 심경을 들을 수 있는 소중한 자리였다. 그와 이곳에 마주 앉아 병역거부를 이야기한다는 것에 한국 병역거부자로서 깊은 연대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한국은 20년만에 대체복무제가 도입되어 병역거부 운동이 시즌2를 맞고 있다면, 태국은 시즌1을 여는 셈인데, 역사적인 시점에 연결될 수 있어서 뜻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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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티윗씨는 태국의 민주화 운동 역사로 강연을 열었다. 태국은 13차례의 쿠데타와 계엄령을  거치며 오늘날까지도 군부가 정치를 독점해왔다고 설명했다. 태국에 군사주의 문화가 얼마나 깊게 뿌리내려 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이에 억눌려왔던 태국 시민들이 차기 총선을 앞두고 민주화의 열망을 분출하고 있는 중대한 변화의 시기를 맞고 있다고 했다. (마침 강연 직전 치러진 총선에서 징병제 폐지 등을 공약한 야당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였다) 이런 흐름 속에서 지금 그의 병역거부 선언은 태국의 비폭력 평화운동에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할 것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네티윗씨는 살생하지 않겠다는 마음, 군대는 폭력을 막는 수단이 될 수 없다는 신념 등으로 병역거부를 결심했다고 한다. 네티윗씨는 자신의 병역거부를 계기로 운동이 확산될 우려 때문에 군 당국이 재판을 미뤄왔다고 설명했다. 내년에는 재판이 열릴 것이며 최대 징역 3년 형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지만 거대한 권력에 맞서 그가 얼마나 큰 용기를 내고 있을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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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티윗씨와 함께 활동하고 있는 세타난씨는 태국 징병제의 현실을 전했다. 태국의 남성은 21세가 되면 동네마다 모여서 제비뽑기 행사를 한다고 한다. 한 명씩 앞으로 나와서 통에 든 표를 뽑는다. 빨간색 표를 뽑으면 2년간 군복무를 하고 검정색 표를 뽑으면 군면제에 당첨되는 살벌한 행사. 태국은 불교 국가라 승려가 많은데 승려도 추첨에 예외가 없다. 태국 사회에서 존경 받는 승려도 군대에 들어가면 심각한 폭력에 노출되고 목숨을 잃기도 한다고 세타난씨는 말했다. 죽음의 추첨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모두가 두려워 한다고 한다. 이 추첨을 피하고 싶은 남성은 한 가지 대안이 존재하는데, 16세 때 학생 예비군 훈련에 3년간 참여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 역시 청소년 시기부터 각종 인권침해와 군사주의 문화에 노출된다. 세타난씨는 그러나 ‘가진 자’들은 의사 진단서 등 다양한 수법으로 병역을 면탈하기 때문에 결국 계급적 불평등이 생긴다면서 징병제의 문제를 지적했다.

한 참가자가 질문했다. “한국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을 겪으면서 징병을 통한 군대의 명분을 쌓아왔습니다. 태국은 어떤 명분을 내세우나요?” 네티윗씨의 답변이 흥미로웠다. “태국은 식민 지배를 받은 적도 없고, 타국과 전쟁을 겪은 적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군대의 명분이 더욱 약합니다. 그래서 모두가 가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통과의례 또는 수양활동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

“군대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라는 물음이 선명해지는 순간이었다. 한국과 태국은 다른 배경을 가졌지만 한국 군대의 허망한 명분을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군대는 무엇이 떠받치고 있는가? 군대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고 있는가? 근원적 질문을 다시 곱씹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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