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린(동물권 활동가)

 

 

전쟁과 동물, 이라는 두 단어를 나열했을 때 동물의 자리에는 ‘인간적 인간’에서 탈락한 모든 존재들의 이름이 머무를 수 있다. 일반적으로 동물은 비非인간 동물을 말하는 것으로, 그들은 기본적으로 인간성에서 탈락(非)한 존재다. 그렇기에 동물은 여성이며 동시에 장애인, 질병인, 빈민, 난민, 비국민, 퀴어 등 인간성의 경계 안팎에서 이름 지워진 모든 존재들의 이름이기도 하다. 동물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은 동시에 수많은 다른 이름들을 호명하는 것이며, 한 존재 안에 함께하는 얼굴들을 함께 소환하고 초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물에 대한 말하기는, 당신에 대한 말하기이기도 할 것이다.

동물과 전쟁에 대해 말할 때 크게 두 가지 프레임이 있는 것 같다. 하나는 인간 신체가 주도하는 전쟁의 양상에서 죽임 당하거나, 영구히 장애를 입거나 혹은 일시적으로 손상되는 동물의 신체, 그들의 관계와 삶을 전면으로 가져오는 것이다. 사상자가 0명이라고 했을 때, ‘자者’에 포함되지 않은 수많은 존재들의 죽음은 순식간에 비가시화되어,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아무도 죽지 않은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인간이 전쟁 무기로 사용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동물이 전쟁 무기로 사용되는 양상의 다양성과 교묘함을 말하여 그 잔혹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들의 죽음과 상처를 말할 때 진실의 비대칭성은 균형을 찾는다. 그러나 동시에 이 두 프레임은 동물을 어떤 이미지에 가두기도 한다. ‘인간 아닌 동물’과 ‘피해자’가 그것이다.

도살장을 방문하는 활동을 할 무렵, 나는 젖이 여전히 불어 있는 한 돼지의 숨찬 헐떡임 속에서 수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동물인 동시에 여성이었고, 신체•정신적 장애인이었고 어떤 국가에서도 국민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비국민이자, 재생산성을 수단화 당한 노동자였다. 수십 명1)의 아이를 출산한 엄마였고, 그를 가둔 철창으로부터 그가 도달한 도살장까지의 길고도 짧은 생의 경로를 똑같이 살아냈을 이의 딸이었다.
그는 피해자였지만 생존자였고 동시에 저항자였다. 살아 있는 내내 갇혀 있었을, 오물과 신음소리로 가득한 철창 안에서도, 그가 좋아하는 자리가 있었고 친밀한 관계가 있었을 것이다. 죽음과도 같아 보이지만, 그 안에서도 생의 기운이 있었을 것이다. 삶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피해자’, ‘동물’ 로만 여겨지기 쉽다. 그것이 사실의 대부분이지만 사실의 전부는 아니다. 그렇기에 누군가의 삶을 말하는 일이 단지 그의 피해자성만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그것은 동시에 그의 다른 서사와 정체성들을 비가시화하는 것이다. 동물이라는 말은 많은 혐오와 오해로 얼룩져 있어서, 동물적 성질과 동물로 여겨지는 이들이 경험하는 사회적 구조를 말하는 것이 ‘그 다음 한계’가 되어버리기도 한다.
이런 모순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쓰기로 한 것은, 한계를 말하는 일을 통해서만 더 정확히 존재를 사랑하는 일이 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한계일 지라도, 그 다음은 조금 더 함께일 것이다. 그것을 만나고서야 동물이라는 이름에 사회가 묻혀 놓은 커다란 얼룩이 아닌, 다층적인 빛깔을 지닌 존재들로 그들을 만날 것이다.

 

돼지들이 도살장으로 들어가고 난 뒤 빈 트럭. 유대인 대학살 때, 그들이 기차에서 내리고 난 뒤의 풍경이 이런 것이었을까. 트럭에서 내리지 않으려 저항한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돼지들이 도살장으로 들어가고 난 뒤 빈 트럭. 유대인 대학살 때, 그들이 기차에서 내리고 난 뒤의 풍경이 이런 것이었을까. 트럭에서 내리지 않으려 저항한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모든 전쟁은 인간성의 전쟁이다. 전쟁은 인간중심주의를 근거로 한다. 그 인간의 영역이 어디까지인가에 따라 그어지는 경계선의 모양이 다를 뿐이다. 그 선을 기준으로 우리와 그들, 나와 적이 나누어지고 선의 안팎으로 혐오와 폭력이 작동한다. 나치독일이 정권을 주도했던 당시, 일부 독일인에게 유대인은 ‘인간적 인간’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들을 집단적으로 착취하고 학살하는 일이 가능했다. 마찬가지로 일부 인간 동물은 비인간 동물을 잠재적 공격자, 혹은 언제든 ‘짐승’처럼 정신을 잃고 돌변할 수 있는 예측 불가한 ‘정신병자’로 여긴다. 그것은 인간적 인간에서 탈락한 ‘하등 인간’에게도 적용되는 것이어서,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유색인, 빈민 등 사회적 소수자들은 자주 동물로 비유되어 왔다.

동물이라는 말은 자신들과 비교하여 일부 존재를 하위 계층화하고 범주화하기 위한 용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인간도 아닌’, ‘짐승보다 못한’, ‘동물 같은 놈들’. 그러므로 동물이나 짐승이 아닌 사람과 인간의 영역에 편입되기 위해 우리는 부단히 노력한다. 어떤 전쟁은 상대 부족이 자신들을 ‘바퀴벌레 같다’고 비하한 것에서 발발했다. 바퀴벌레는 대부분의 인간이 혐오하여 자신과 동일시하기를 거부하는 존재, 곧 ‘인간답지 않은’ 동물이다. 어쩌면 이 세계가 경험한 모든 전쟁은 ‘인간성’이라는 하나의 전쟁일 것이다. 인간다운 것이라 여겨지는 그 무엇을 지키기 위한 불안함에서 비롯한 선택일 것이므로.

인간은 자신이 동물이라는 점을 자주 망각하고 부정한다. 동료 활동가의 말을 빌린다면 이것을 ‘비동물 인간’이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인간이 자신의 동물성을 버렸으므로, 그의 동물성은 그를 도울 수 없다. 동물을 혐오하는 일은 자신의 동물성으로 경험하고 관계 맺을 수 있는 수많은 순간들을 그저 증오와 혼란으로 지나보내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다. 세상에서 가장 많이 이루어지는 고문은 자가 고문일 것이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정확히 동일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이 아이러니는 많은 진실을 담고 있다.

대상을 향한 전쟁은 자기 자신을 향한 전쟁이기에, 어떤 존재를 말살하고자 하는 것은 자신 안의 그 존재를 말살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전쟁은 외적으로 목표를 달성하고 승리할 수 있지만, 그의 내면에 깊이 자리 잡은 자기혐오를 마주하지 못한다면 그는 자신을 향한 전쟁을 결코 멈추지 못할 것이다. 활동가들의 수행과 실천은 그런 까닭이다. 모든 죽임은 자살을 전제하기에, 자살하려는 이를 목격했을 때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것이다. 인간 동물과 비인간 동물을 포함한, 모든 생명2)의 자살과 죽임을 그저 두고만 보기에는, 한 명 한 명 존재의 귀함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죽이지 않고서 다른 이를 죽일 수 없다. 나는 그것을 살아있는 돼지의 목을 그어야만 생계를 유지하는 도살 노동자의 얼굴에서 본 적이 있다. 그의 내면 깊은 곳에서 슬픔과 수치심을 느꼈다. 그의 영혼은 천천히 죽어가고 있었다.

 

도살장 앞에서 만난 이의 얼굴

도살장 앞에서 만난 이의 얼굴

 

동물과 전쟁의 연결성은 아프도록 얽혀 있다. 대규모 공장식 축산업의 시작은 세계 대전 이후 화학 무기의 과잉 공급으로 인한 잔여 화학물로 인한 것이다.3) 사람들은 그것으로 농약을 만들었고, 농약으로 인해 경작물 주변에서 자연스럽게 공존하던 동물들이 사라졌다. 그로 인해 농작물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거두어지자, 대규모 축산을 통해 가축을 먹이기로 한 것이다. 배터리 케이지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에서 시작한 것으로 유대인 수용소를 모방한 것이다.

어떤 전쟁도 적을 먹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패배한 쪽 부녀자의 전리품을 ‘자기네 여자’에게 내밀듯, 오늘날 여성 소의 젖을 그들 아기로부터 빼앗아 자랑스럽게 우리네 아이 입에 물린다. 누군가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영원한 평화의 상태로 그렸지만, 젖과 꿀이 흐르도록 풍요로운 이 땅은 그것을 생산하기 위해 강간당하고 감금당한 이들의 노동과 착취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 전쟁은 그들의 신체를 전쟁터로 삼아 매분 매초 일어나고 있다. 휴전한 적 없는 전쟁이다. 그 모든 것을 목격한, 그들의 눈물을 온몸으로 받아낸 땅의 슬픔이 기후위기로 드러나고 있다.

인간성과 동물성은 반대된 것이 아니다. 나는 그것을 사랑, 생명, 혹은 본질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부르고 싶다. 한 인간의 행위가 가지는 무거움,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참히 가볍기만 한 말 살점, 우리의 몸 안에 흐르는 수많은 이들의 피로 이 글을 쓴다. 언젠가 우리가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각주

1)  일반적으로 비인간 동물의 수를 세는 단위는 ‘마리’이지만, 동물권 영역에서는 종평등한 언어 실천의 일환으로 ‘명命’을 사용합니다. 같은 목숨이라는 의미에서 보통 사용하는 ‘이름 명名’이 아닌 ‘목숨 명’을 사용합니다.

2)  ‘생명’이 대상화된 신성함이 아니라 생명 그 자체로 읽히기를 바랍니다.

3) <전쟁과 농업>, 후지하라 다쓰시, 2020, 따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