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해(전쟁없는세상 후원회원)

 

 

넷플릭스 드라마 <D.P.> 시리즈는 군대에 다녀온 남성들에게 ‘PTSD’를 남기는 작품이었다. 아마도 많은 이들이 준호(정해인)와 호열(구교환)에게 감정이입을 하거나, 한 발짝 물러서서 자기 군생활을 회상하며 ‘역시 군대는 정말 이상한 곳이야’라고 평가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황장수(신승우)나 조석봉(조현철)만큼은 아니어도 그 주변에 있던 수많은 사람 중 하나였을 것이다. 막바지에 다시 등장한 박성우 하사(고경표)는 우리의 모습과 많이 닮았다(그는 1부 1화에서 임무를 방기하다가 탈영병 신우석이 죽는 것을 막지 못했다). 준호와 성우가 법원 주차장에서 격투를 벌이는 부분은 인상적이었다. 준호가 “너도 사실 찔려서 그러는 거잖아”라고 말하자 성우는 일말의 죄책감을 보이면서 더 흥분했다.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고 어떤 죄책감을 느꼈는지 돌아보지 않고, ‘한순간의 실수’로 모든 게 어그러진 자기를 향한 연민만 되뇌는 모습. 정도는 달라도 군대/징병제의 피해자였을 뿐이라고 말하는 우리의 모습과 어딘가 비슷했다.

 

전쟁을 ‘평화’로 봉인한 사회

고도 경제성장, 풍족, 행복, 느긋함, ‘좋은 시절’. 노다 마사아키는 전후 일본의 풍요 속에서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했다. 모든 것이 좋아보이는데 그 아래엔 초조함과 강박, 긴장, 공격성이 흐르고 있었다. 여전히 집단주의, 성과주의, 집단따돌림, 위계질서 등이 남아 있었다. 일본은 풍요로워졌지만, 감정은 매말랐고 즐거움과 행복에 강박적으로 매달렸다. 노다는 이렇게 말한다. “충분히 슬퍼할 수 있는 사람만이 충분히 기뻐할 수 있다.”(16쪽) 일본은 충분히 슬퍼하지 않았다. 그래서 충분히 기뻐할 능력도 잃어버렸다. 전쟁과 폭력의 시대를 평화의 이름으로 봉인해 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를 변화시키려면 오랫동안 봉인해 왔던 상자를 다시 열 필요가 있었다.

노다는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일본군에서 복무한 군인들의 이야기를 썼다. 이들은 ‘성실한’ 군인이었다. 명령에 충실하게 따른 사람, 누구보다 더 많은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는 종교의 가르침을 따른 사람, 자신의 지위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사람, 패전 후에도 조국을 위해 암약하려고 한 사람, 빈곤에서 탈출하려고 군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일한 사람, 때때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에게 연민을 보이며 돈을 찔러주는 사람… 많은 이들이 여기까지만 기억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다른 곳을 침략하고, 평범한 주민을 첩자로 의심하고, 고문하고, 인체 실험장으로 보내고, 풋내기들이 경험할 수 있도록 사람 목을 베게 하는 등의 잔혹함이 있었다. 그들은 그게 좋지 않은 일임을 어렴풋이 느끼면서도 끊임없이 합리화했다. 만약 누군가가 나를 규탄한다면 어떻게 방어할지를 생각하며 각본도 만들어 두었다. 그러니까 이 책은 수많은 ‘아이히만’에 관한 이야기다.

 

가해자의 말을 어떻게 들을 것인가

일본 포로들은 마음이 흔들렸다. 누구 한 사람, 자신이 형법상의 죄를 저질렀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자신들이 저지른 잔학행위를 알고 있는 중국인이 적지 않으므로 생존자나 유족의 신고로 반드시 보복이 있을 것이라고 두려워했다. 저마다 굳은 표정 아래 불안, 분노, 절망, 변명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139쪽)

아이히만은 오랜 심문 끝에 재판받고 처형당했지만,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조금 달랐다. 몇몇은 패전 이후 포로가 되었다가 중국의 푸순전범관리소로 보내졌다. 포로들은 일본군이 중국인에게 못되게 굴었으니 자기들도 살아남긴 어려울 것으로 생각했다(이것은 중요한 인식이다. 실제로 오키나와 치비치리 가마에서는, 미군에 포로로 잡히면 일본군이 그랬던 것처럼 똑같이 끔찍한 취급을 받을 것이라고 믿었다. 이것은 집단자결로 이어졌다). 몹시 불안에 떨거나 허세를 부리며 반항했다. 하지만 일본군 포로에 대한 중국 당국의 정책은 ‘관대함’이었다. 당국은 포로들에게 되갚지 않았다. 간수들은 찬밥을 먹어도 포로들은 따뜻한 밥을 먹었다. 운동과 산책을 즐길 수도 있었다. 병에 걸리면 정성 들여 치료해 주었다. 당국은 온화한 분위기 속에서 포로들이 참회하고 개심하는 ‘탄바이’를 하도록 했다. 이것은 중국의 사상개조 프로젝트 중 하나였을 뿐이고, 특별히 중국이 더 인도주의적이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러한 ‘탄바이’에 대한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포로들은 집단노동과 학습, 서로의 죄상을 고백하는 활동을 하면서 ‘탄바이서’를 썼다. 이것을 지도원이 확인하고 작성자가 여전히 제국주의 사상에 물들어 있는지 판단했다. 만족스럽지 않으면 돌려보냈다. 명확한 가이드라인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탄바이서가 받아들여져야 살아서 돌아갈 수 있다는 것뿐이었다. 탄바이서를 쓰고 반려받기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포로들은 자신이 저지른 행위에 대해 깊이 생각할 것을 요구받았다. 관리소에 잘 보이려고 하는 뻔한 생각은 글에서 드러났다. 더 철저한 반성과 사죄가 필요했다. 마침내 탄바이서가 수락되면, 재판에서 면소 처분을 받고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심리적인 경과, 허세와 반항, 당혹, 표면적인 탄바이에 의한 거래, 현실 검토, 자성, 죄를 인정하고 얻은 재생’이라는 일련의 과정”(315쪽)이었다.

누군가는 관리소에 머무르면서 진심으로 참회했지만, 고지마 다카오처럼 반쯤은 진심이고 반쯤은 전략적으로 뉘우친 사람도 있었다. 어쨌든 살아서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컸기 때문이다. 그렇게 꿈에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온 이들은 사람들에게 멸시받았다. “사회주의 국가에 억류되었다 돌아온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세뇌당한 사람’ ‘빨갱이’라는 낙인이었다. 취직이 안 되고, 공안 경찰의 정기적인 방문을 받아야 했다. 그를 받아주겠다고 적극적으로 나서는 곳은 증원을 서두르고 있던 자위대뿐이었다.”(177-178쪽) 어쩌면 이들은, 한국전쟁 당시 남한으로 온 반공포로들처럼 ‘자기 증명’에 몰두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자기 행위를 변명하지 않고 직면한 경험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들은 계속 전쟁과 가해의 경험을 증언했다. 대부분의 국민들이 일본군의 잔혹함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사람들은 가해자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가해자의 말을 어떻게 들을 것인가? 이건 별로 익숙한 질문은 아니다. 아니 피해자의 이야기도 제대로 듣지 못하는데 왜 가해자의 말을 들어야 하는가? 왜 그들에게 ‘서사’를 주어야 하나? 우리는 많은 경우 가해자의 변명만 들어왔다. 그러나 가해자의 말을 듣는 것은 그들의 변명을 있는 그대로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가해자 주변을 겹겹이 둘러싼 방어선을 벗겨내고 좀 더 심연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노다는, 사실적으로만 얘기하고 자기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고지마 다카오를 추궁한다.

“지금 말씀하시는 걸 듣고 있으면 살해당한 사람이 추상화되어 버려서 얼굴을 느낄 수가 없어요. 살해당하는 사람의 얼굴은 기억이 안 나나요?”
“얼굴은 생각나지 않는군요. 그냥 찌른 부분만…….”
“그렇다면, 역시 물체로밖에 인식하지 않는 거네요.”
고지마는 입을 다물었다.(184쪽)

내 질문은 얼마나 가혹한 것이었나. 나는 과거의 행위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과거의 행위를 어떻게 느꼈는지 물었다. 체험을 억압하기 위한 망각의 시간을 넘어서, 남겨진 감수성을 추궁해 들어갔다. (188쪽)

하지만 이렇게 캐묻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노다는 연구자로서 약간 뒤로 물러서서 질문하고 평가했지만, 평범한 사람들에게 고지마를 캐묻는 일은 동시에 자기 내면에도 캐묻는 일일 것이다. 거울을 마주하는 기분일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도 피해자라는 말, 그저 명령에 따랐고 전쟁은 원래 다 비참한 것이라는 가해자의 변명을 그대로 수용했다. ‘저 사람이 곧 나였다/나일 수 있었다’라고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집단 부정 속에 이룬 풍요는 좋은 걸까? 이런 사회는 어딘가 병들어 있지 않은가?

 

보잘것없는 겁쟁이

일본군은 정신주의가 매우 강했다. 천황을 향한 맹목적인 충섬과 강한 정신력만 있다면 어떤 혼란과 의심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서구에서 일찍이 연구를 시작한 ‘전쟁신경증’이나 ‘전쟁 영양실조증’, ‘전쟁 PTSD’ 같은 것이 들어올 공간이 여기에는 없었다. 그것은 극복되어야 할 나약함이다. 사람들은 천황, 국가, 충성, 팔굉일우, 대동아공영권 같은 거대한 것들로 자신을 채웠다. 그런데 이것이 인간의 강함을 보증하진 않는다. 집단을 보증하는 무언가가 없으면 곧 나약해진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냉혹하게 평가해서 푸순전범관리소에서의 탄바이, 노다의 추궁, 군인들의 반성은 일본이 패전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면도 있었다. 더 이상 의지할 곳이 없기 때문에 패잔병들의 이야기는 영웅담이 아니라 변명이 될 수밖에 없었다. 폭력을 정당화하는 시스템에서 벗어나면 이들은 그냥 보잘것없는 겁쟁이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만약 내가 상관의 명령을 받아 누군가를 학살해야 하는 상황에 놓일 때, 나는 그걸 거부할 수 있을까? 심지어 목숨을 내놓더라도 거부할 수 있을까? 물론 ‘지금은 알 수 없다’. 노다는 이렇게 개인의 의지를 시험하는 일도 역시 정신주의의 일종이지 않으냐고 묻는다.

강인함이 필요한가 그렇지 않은가를 물으면, 답은 강인한 쪽으로 쏠리기 마련이다. 진솔하고 강건하여 자기 의지를 관철하는 인간이 훌륭한 인간이라는 얘기다. 이것은 과거 일본 군인의 정신주의와 같다. 그리고 강인한 의지에 평화주의를 접목해 놓으면, 바람직한 삶이 돼버린다.
과연 강함이 그렇게 필요한 것일까?
나는 강한 인간이기 전에 느끼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신은 경직돼 버린다. (440쪽)

노다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악한 존재인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에겐 쉽게 제거할 수 없는 ‘인간성’이 존재하며, 이것이 사회가 쌓아 올린 도덕성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우리가 가진 인간성은 사회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잔혹함에 반대하는 일을 특별한 소수의 양심에만 맡겨놓을 수는 없다. 인간성을 지키는 행위 또한 사회적이어야 한다.

 

자기 마음속의 전쟁

글을 쓰다 보니 옛날 일이 떠올랐다. 군대에 있을 때, 언제인가 무슨 일로 중대 전체가 완전군장 상태로 병영을 몇 바퀴 도는 기합을 받았다. 몇몇이 걷는 중에 쥐가 나거나 힘들어서 주저앉았다. 힘들면 빠질 수 있나? 빠질 수 있다. 다만 무거운 군장을 누군가 대신 들어주어야 한다. 중대장은 모두 같이 기합을 완주하자고 소리쳤다. 이 정도로 힘들다는 건 평소에 너희들이 얼마나 나약한 정신 상태를 가졌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일어나라! 일어나라!

오르막길에선 숨이 가빠지고 내리막길에선 발바닥이 아스팔트 바닥을 긁는 타이어처럼 뜨거워지는 와중에 중대장의 말을 계속 생각했다. 우리는 나약하다. 기합은 우리의 나약함을 성찰하고, 체력과 정신을 무장하고, ‘운동했다’는 보람을 느끼게 하기 위한 ‘훈련’이다(실제로 규정에도 기합의 목적이 이렇게 적혀 있다). 이마저도 낙오하면 그는 강해질 의지조차 없는 나약한 인간이다. 전우를 힘들게 했으니 눈치를 받을 것이다. 이 정도도 못 참는다고 수군댈 것이다. 나는 주저앉고 싶었지만 낙오하지 않았다. 내가 강해서가 아니라 나약함을 드러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군대에 있을 때 가장 큰 미덕은, 그 무엇도 쉽게 드러내지 않는 것이었다. 힘들어도 힘들다고 말하면 안 된다. 우울해도 우울하다고 말하면 안 된다. ‘모두 힘들고 우울하다’. 그러니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엘리자베스 워첼이 자신의 우울증에 관해 쓴 수기인 『프로작 네이션』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나는 내 껍질을 벗어던지고 말하고 싶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대단치 않은 일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내 머릿속에서 마치 베트남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느꼈다’라고”. 읽은 지는 오래된 책이지만 지금도 이 구절만큼은 기억에 남는다. 군대에서도 이 구절만은 계속 맴돌았다. 그때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살면서 꼭 한 번은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는 건 뭘까?’ – ‘자기 마음속 전쟁을 외면하는 법을 배우는 거지’.

『전쟁과 죄책』은 일본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일본의 군대 이야기는 한국의 군대에서 반복되었고, 사회에서도 똑같이 반복되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자신과 타인을 느끼기보다는 군대가 입에 넣어준 언어로 말한다. 군대 서사는 ‘어쨌든 나는 약하지 않았음을’ 증명하려는 애씀으로 가득하다. 그 경험들을 깊게 들여다볼 수 있는 언어를 우리는 아직 가지고 있지 않다. 다만 자기 마음속이 전쟁 중임을, 언제나 가해의 편에 설 수 있고 가해자에게서 나를 볼 수 있음을, 그 정도로 나약함을, 그럼에도 진솔하고자 한다면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음을 아는 데에서 출발할 수 있지 않을까. “어떤 상황에서 무엇이 일어났는지, 늘 구체적으로 알려고 할 것. 충분히 알고 나서 당사자에게 감정이입하여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이야말로 소중한 것이 아닐까?”(440쪽, 강조는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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