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리(기후위기 앞에 선 창작자들)
여름이 길었습니다. 계절별로 입는 옷들을 따로 꺼내두던 옷장에는 아직도 반소매와 긴소매, 얇고 두꺼운 외투가 어지럽게 섞여 있습니다. 그 옷장 안의 모습도 갑갑하지만, 옷장 밖 계절은 더 혼란스럽습니다. 11월 초까지도 가을보다 여름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은 날씨가 이어지다가, 어느 날 갑자기 초겨울 같은 날이 찾아왔습니다. 그 뒤로도 하루하루가 다르게 기온이 크게 오르내리고 있으니, 당분간도 옷장을 정리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나날이 사계절의 경계가 흐려지는 변화를 차츰 익숙하게, 무력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감정의 변화가 두렵습니다.
기후위기의 곁도, 뒤도 아닌 ‘앞’에 선 창작자들로 아덱스 저항행동에 참여하게 된 다짐은 그 마음에서도 비롯했습니다. 누구든 기후위기를 마주하지 않을 수가 없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퍼블릭데이’가 시작된 10월 21일은, 이미 입추에서 한로까지 지나 가을 절기의 끝인 상강에 다다르던 날이었습니다. 그 뜻도 서리가 내리는 늦가을 무렵이라는데, 저는 아덱스와 가까운 지하철역을 나서자마자 외투부터 벗었습니다. 꽤 쌀쌀할 거라던 일기예보가 다시 기후 변화 예측에 실패하기도 했지만, 거리의 열기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른 주말 오전인데도 수많은 인파가 있었고, 대부분이 올해 역대 가장 많은 관람객을 기록했다는 아덱스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에어쇼를 펼치는 블랙이글스. 2017년 아덱스 사진
사람들을 따라 걷는 동안, 벌써 전투기 소리가 들렸습니다. 곡예비행 중인 ‘블랙이글스’였습니다. 에어쇼의 다른 팀들을 제치고 이번 개막식 공연에 섰을 만큼, 블랙이글스는 공군 최고의 비행 능력을 자랑하는 정예부대이자 특수비행 팀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하여 국군의 날을 비롯한 전국구 국가 행사에도 자주 초청받지만, 우리는 그보다 곡예를 치르기 위한 훈련 비행 중에 생명 피해 사고가 일어났던 지난 시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당장 올해 초에도 횡성 지역의 민가 근처에서 추락 사고가 발생했는데도, 훈련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동안 인근 주민은 난청을 일으키도록 귀를 찌르는 군용기 소음에 시달리고, 위협적으로 주거지를 가로지르는 비행체의 불안에 떨며 생활했습니다.
그런데도 윤석열 대통령은 개막식에서 “우리 방위산업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며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으며, “원조와 수입에 의존했던 나라가 이제는 최첨단 전투기를 독자적으로 만들어 수출하는 수준으로 도약했다”는 축사를 밝혔습니다. 이는 오늘날 무엇이 들리고 들리지 않는지, 누가 무엇을 듣게 하고 듣지 못하도록, 들을 수 없도록 만드는지를 알리는 한 장면입니다. 2년 가까이 지속되고 있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한국산 무기의 수요가 크게 늘었을 때도, 정부는 한국 방산 수출의 ‘영업사원 1호’를 자처했습니다. 저들에게는 모두가 함께 안전하게 누릴 수 있는 평화보다, 다른 평화들을 부수어 거머쥐는 안보가 중요한 걸까요? 그럴수록 공공의 날을 가리키는 퍼블릭 데이의 ‘우리’가 누구인지 자꾸 의심하게 됩니다.
이처럼 거대한 권력 구조가 된 소음은 저항행동에서도 적잖은 난관이었습니다. 우리의 행동은 실내 전시장 매표소 입장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줄을 둘러싸고 야외에서 이뤄졌습니다. 주변에는 먹거리 부스도 많아 이미 분위기가 어수선했기에, 다음 비행 프로그램이 시작되기 전까지 액션을 마쳐야 했습니다.
그렇게 창작자들 팀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붉은 천을 둘러쓰고, “전쟁 장사 그만 / 피 묻은 전쟁 장사에 생명 지구 다 죽는다 / 탄소공장 무기 생태학살 무기 / 자연을 훼손하고 민간인 살상하는 무기 거래 부끄럽지 않은가 / 오늘 우리가 구경하는 방패, 내일 우리를 겨눌 무기”라는 문장을 몸에 붙였습니다. ‘방위산업’이라는 명목을 내세우지만 사실상 전쟁을 일으키며 필연적인 살상에 빚지는 ‘무기산업’에 형상이 있다면, 피로 온몸을 뒤집어쓰고 있으리라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했습니다. 지금은 전쟁이 아닌 사랑을 구할 때라고, 폭력으로 평화를 취할 수는 없다는 구호를 외치며, 아덱스를 즐기던 사람들의 틈을 비집고 한 줄로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처음 잠깐은 우리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습니다. 아니, 목소리를 크게 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물론 싸늘한 반응을 예상했지만, 모두와의 공생을 바라는 우리를 이 나들이의 방해꾼으로만 여기는 이들은 대놓고 조소하고 비난했습니다. 차가운 무관심 속 아예 들리지 않는 응답만큼, 사납게 어긋나는 응답 아닌 응답을 태연하게 받아내기도 어려웠습니다. 옆에서는 우리가 시위 신고 구역을 벗어나지 않는지 감시하는 시선이 줄곧 붙었습니다. 끝없이 찾아오는 관람객의 규모에 비해 이날 함께 한 다섯 명의 창작자는 초라하게만 보일 수 있었습니다.
다만, 그 덕분에 목소리를 키울 자신도 생겼습니다. 아무도 우리를 반기지 않는 이곳에, 여전히 우리가 있고, 있겠다고 알리려는 의지를 다잡았습니다. 응답이 들리지 않을지언정, 응답하지 않는 세계에 응답하는 우리의 소음이 세상에 들려야 했습니다. 왜냐면 당장, 바로 전날에도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격 규탄을 위한 긴급행동 집회가 있었으니까요. 아주 오랫동안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의 삶을 분리하고 감금하고 훼손하고 학살한 역사가 이어지는데도 매일 눈앞에서 가족, 친구, 연인, 동료, 이웃을 잃어가는 가자지구의 일상을 지워내는 뉴스 보도가 더 앞서는 세계에서, 전쟁산업을 지지하는 일은 그들의 죽음을 지지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고 말해야 하니까요. 물리적으로는 그 죽음이 멀리 있는 듯 보일지라도, 이곳의 안보를 지키겠다는 무기로 저곳들의 평화를 무너뜨릴 수 있다면, 우리의 거리는 몹시 가까울 테니까요. 자연스럽고 자유롭게 살 권리가 있는 이들의 탈시설과 자립에 혐오 발언을 일삼는 이 사회와도 아주 멀 수가 없는 세상이니까요.

전쟁무기로 죽은 이들을 애도하고 추모하는 모의 장례식
그렇게 막막하고 먹먹한 마음을 담아 꿋꿋이 걷고, 귀 기울여 소리를 모으고, 가장 높은 하늘과 낮은 바닥을 향해 온몸으로 기도하는 붉은 걸음들에 집중했습니다. 행진을 마치고 나서는 기후위기기독인연대에서 “온 지구에 무기를 통해 생명을 잃은 존재들을 애도”하기 위해 마련해주신 장례식에 동참했습니다. “전쟁으로 목숨을 잃은 모든 이”와 “전쟁 도구가 되고 전쟁 무기에 희생된 동물과 식물과 생태계, 비인간 존재”를 그리고 기리는 시간을 지켰습니다. 하얗게 비워둔 영정 액자가 그 모든 생의 얼굴이 되고, 어설프게 지은 관이나마 당신들이 뒤늦게라도 안식을 취할 수 있는 터가 되기를 바라며, 가만한 마음을 담은 꽃송이를 건네고 기도를 보냈습니다.
‘펭귄’ 님의 평화 버스킹 중에는, 에어쇼도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순식간에 귀가 멍해지는 비행의 굉음에 노랫소리가 묻혔지만, 다 같이 굴하지 않고 서로 간의 사이를 좁혀 앉아 이 노래를 붙들려 했습니다. 또 그럼에도, 들리지 않는 노래를 힘차게 따라부를 수가 없어 주저하게 되는 침묵도 엿보였는데요. 바로 그때, 창작자팀의 한 동료가 일부러 더 흥겨운 추임새와 경쾌한 몸짓을 보탰고, 이윽고 모두가 서서히 웃음을 되찾아 몸을 들썩일 수 있었습니다. 음정 박자를 더듬더듬 헤매어가는 소리와 소리가 모여 오직 그 순간의 공기를 노래했습니다. 가장 시끄럽고도 고요한 우리의 노래를 불러왔습니다.
코앞에서 목격한 그 놀라운 변화를, 저는 영영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또 배웠습니다. 허탈한 무기력과 분노, 슬픔과 절망감도 ‘희망’보다 힘이 셀 순 없겠구나. 함께 싸워내는 힘이 이토록 아름다운 모습이구나. 전혀 아름답지 못한 곳에서도 아름답게 아플 수가 있다고. 기꺼이 같이 아파할 힘이 아직 남았다고. 환대도 인정도 받지 못하는 이 참담한 세계의 가장 자그맣고 유약한 자리에서도 더 굳게 씩씩하게 용감하게 맞닿을 가능성이 남았다고. 창작자들이 서로 끌어안고 우는 동안 뜻밖의 따듯한 보호막이 되어줬던 붉은 천처럼, 길고 길었던 여름의 일교차만큼 암담한 세계의 온도 차에 맞서, 우리에 기대어 나아가겠노라고.

전투기의 굉음 속에서 평화를 노래한 버스킹
전쟁이 이기고 지는 결과만을 겨냥한다면, 우리의 싸움은 아무도 겨냥하지 않고도 다른 곳을 바라보면 되리라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렇게 에어쇼 아래서 창작자팀이 다시 소리 없는 걸음을 시작하자, 누군가는 우리가 하늘을 감상할 시야를 막는다고 비아냥거렸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다행이라고도 느꼈습니다. 태극 문양을 그려내며 환호와 박수를 받는 전투기 끝에서 새까만 연막이 흘러나오고 있었으니까요. 무시무시한 스모크와 탄소를 배출하는 그 비행체가 대기를 해치고 숨 쉴 기후를 위협한다면, 사람들이 오래 기다려온 풍경이 단지 그뿐이라면, 우리가 그것을 적극적으로 가리는 다른 풍경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우리의 붉은 행진을 의아해하거나 신기해하며 경계심과 호기심이 섞인 눈빛으로 보던 아이들도 다시 떠올렸습니다. 유아차에 잠들어 있던 어느 아이가 깨어날 이다음의 미래에도 맞닥뜨리도록 할 우리의 내일을 상상했습니다. 생각했습니다. 그래. 너희가 우리를 용사나 영웅 따위로 여기지 않아도 괜찮다고. 나도 신과 같은 소수의 구원자가 아니라, 다수의 평범한 숨들이 함께 구하고 지키는 세상을 바란다고. 그러니 너희에게는 흥미로운 만화영화 같을지 모를 무기박람회에서, 무기 없이 맞서는 악당으로나마 우리가 기억된다면, 오늘이 헛되지 않으리라고. 도리어 자꾸만 거슬리는 불협화음처럼 너희 안에서 살고 싶다고. 그처럼 내일의 미래 세대가 아니라 지금 오늘, 우리와 함께 이 현재를 살고 있는 너희의, 모두의 미래를 위해 오래오래 오해를 고쳐내고 다시 쓰리라고. 약속했습니다.

아덱스 퍼블릭데이 때, 기후위기 앞에 선 창작자들의 ‘붉은 정령’ 퍼포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