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란 (강정마을 비건퀴어에코페미니스트)
약 이 년 전, 민들레 홀씨가 어딘가 불시착하듯 제주 강정마을을 만났다. 이곳에서 새로운 풍경과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하고, 춤추고 노래하다가 어느새 ‘살고 있다’! 해군기지 반대 운동을 하는 강정은 기지 폐쇄 운동뿐만 아니라 지역과 영역을 넘나들며 연대의 강강술래를 하는 곳이다. 그간 나는 페미니즘, 동물권, 성소수자 인권 등 여러 사회 운동에 관심을 가져왔다. 강정 해군기지반대 운동은 평화 운동과 반군사주의는 물론 이 운동이 다른 운동과 어떤 교차성을 가지고 있는지 현장에서 배우고 실천할 기회를 주었다. 해군기지로 사라져가는 땅바닥 붉은발 말똥게부터 바다 건너 일어나는 세계 분쟁까지 앎과 삶의 지평이 넓어졌다.
강정에 머물며 이것저것 하다 보니 전쟁없는세상에서 여성 활동가로서 에세이를 써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나는 스스로를 ‘활동가’라고 지칭하는 것이 아직 어색하다. 좁게 생각해보면 내가 특정 사회단체에 소속되어 일하는 것도 아니고, 사회 운동을 공식적으로 기획하거나 조직하는 일을 직업 삼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리베카 솔닛이 말했듯 “우리는 모두 이런저런 의미에서” 활동가다. “우리의 행동은 (그리고 행동 않음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어둠 속의 희망』 발췌)이다. 어떤 행동을 할 때마다, 하지 않을 때마다 이 말을 떠올리곤 한다. 관성이 이끈, 편협한 사고와 나태한 언행이 모여 내가 원하지 않는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하게 된다면 그건 정말 끔찍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 한 명 한 명이 참 중요하고 무거운 존재라고 여기게 된다. 스스로가 자각하든 아니든, 우리 모두는 활동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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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즈음에서 활동가로서의 나를 긍정하도록 하고, ‘여성 활동가’라는 말을 살펴보고 싶다. ‘여성 활동가’하면 자동으로 왜 ‘페미니스트’가 떠오르는 걸까? (나만 그런가) ‘페미니스트’라는 말도 곰곰이 성찰해본다. 이전보다 대중적으로 수용되는 페미니즘 운동과 사회적 인식 덕분에 나는 페미니즘을 당연시하는 사회 운동 현장에서 지낼 수 있었다. 아직 그 인식과 실천이 완벽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나는 ‘여자가 무슨 사회 운동이냐, 집에서 밥이나 하라’는 말은 안 들었다. 그러나 페미니즘이 대중화되면서 나는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페미니스트’라는 말에 모두 같은 생각을 공유하지는 않는다고 느꼈다. 여기서 페미니스트가 여성 우월주의자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은 당연히 아니다. 그동안 페미니즘을 공부하면서 수많은 종류의 페미니즘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자유주의, 본질주의, 생태주의, 마르크스주의적 페미니즘… 저마다 다른 관점과 가치관을 가지고 페미니즘을 접하기 때문에 이제는 ‘페미니스트’라는 단어 하나만으로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은 어려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다른 소수자를 혐오하거나 그들의 인권 운동이 여성 인권을 저해한다고 말하는 페미니스트도 있으니!)
나는 강정에 오기 전에도 후에도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같다고 할 수 없다. 평화 운동을 만나기 전 나는 국가가 말하는 안보 논리에 아무 의구심도 가지지 않았고, 관심조차 없었다. 그렇기에 누군가(특히 한국 남성)에게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소개한다면 당연히 받을 질문 ‘그럼 여자는 왜 군대 안 가요?’에 답하기가 더 어려웠다. 군대에 남성만 가는 것은 국가가 정한 일이고 여자가 시킨 게 아니다, 국가의 결정은 여성을 남성에게 보호 받을 위치로만 보는 성차별적/가부장적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무언가 찝찝했다. 그럼 여성인 내가 보호 받을 위치로만 상정되지 않으려면, 다시 말해 남성과 동등한 위치에 서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했다. 그렇게 나온 답은 ‘여자도 군대에 가야 한다’였다. 이른바 양성평등론. 여성도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 전쟁 시 자신과 공동체를 보호하려면 군대에 가서 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그렇게 된다면 지긋지긋한 저 질문은 물리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나는 또 다른 질문들과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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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군대에 간다고 성차별이 사라질까? 남성과 여성이 평등할 수 있을까? 더 나아가 남성과 여성이 평등하다고 해도 사람과 사람이 서로 죽이는 전쟁이 계속된다면 그건 과연 내가 바라는 세상일까? 나의 평등을 쟁취하기 위해 다른 생명을 죽이는 일을 연습해야 한다면 그건 옳은 방법일까? 무엇을 위한 평등일까? 강정에서 군사주의와 안보가 가진 허구를 깨우치고, 전쟁과 폭력이 아닌 평화적 문제 해결 방식을 익히면서 나의 페미니즘이 얼마나 군사주의에 물들었는지 깨달았다. 여군 비율 증가가 성평등한 군대로 이어지지 않는 것처럼, 여성의 군 복무가 성평등한 미래로 직결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에겐 새로운 페미니즘이 필요하다.
애초에 여성은 남성과 동등해지려고 애쓸 필요가 없었다. 페미니즘은 양성평등이 아니기 때문이다. 양성이라는 개념은 여성과 남성이 이분법적으로 나뉘어있다고 전제한다. 평화학자이자 여성학자인 정희진이 책 『양성평등에 반대한다』에서 지적했듯, 이분법은 “대칭적, 대항적, 대립적 사고가 아니라 주체 일방의 논리다.” 즉, “주체가 자신의 경험을 중심으로 삼아 나머지 세계인 타자를 규정하는 사회인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 양성평등은 진정한 정의justice로서의 평등을 성취할 수 없다. 기존에 불완전하고 일방적인 남성 중심적 사회에서 ‘몇몇’ 여성만 평등을 겨우내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고로 남성 중심적 사회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 기준을 유지하고 그를 끼워 맞추는데 그칠 뿐이다. 우리가 기억해야할 사실은 페미니즘은 “남성과 같아지는 것(‘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질문해보자. 우리가 바라는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나는 무엇보다 생명이 소중한 세상에서 살고 싶다. (국가)권력 획득과 유지, 자본, 다름 때문에 함부로 사람을 해치고 죽이며, 우리 삶의 터전인 지구를 망가뜨리는 세상은 내가 원하는 세상이 아니다. 다시, 여성으로서 내가 남성과 같이 군대를 간다고 내가 원하는 세상과 가까워질까? 그 선택은 오히려 전쟁 훈련을 일상화하고, 한 해(2024년 기준) 국방비로 약 59조 4천억 원을 쓰는 국가를 지지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군사주의는 ‘힘이 평화’라며 폭력과 비민주적 방식, 약자의 희생과 고통을 필연적으로 여긴다. 이는 ‘힘 있는’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며, 여성은 그런 남성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말하는 성차별주의, 가부장제와도 맞닿아있다. 군사주의와 성차별주의 사이의 뚜렷한 연결고리를 찾은 나는 이제 ‘페미니스트’로서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이 군대에 가는 것을 반대한다. 궁극적으로 전쟁이 갈등의 유일한 해결 방법이라고 말하는 기존 사회를 변화시키고 싶다. 평화와 함께하는 페미니즘은 우리를 다른 사회로 이끌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매일 낮 12시 기지 앞에서 우리는 인간 띠 잇기를 한다. 행진을 하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그림을 그리고 구호를 외친다. 다정한 모양으로 모여 앉은 우리가 뾰족한 철조망과 단단한 벽을 한순간에 부수어버릴 수는 없다. 대신 우리는 당장 변하지 않는 세상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있는 힘껏 다해 평화를 선택한다. 우리의 활동 하나 하나가 모여 세상을 더 평화로운 곳으로 만들 것이다. 나는 강정마을에서 내가 살고 싶은 미래를 한 뼘 앞당겨와 지금을 살아내고 있다. ‘평화’와 ‘페미니스트’의 의미를 새로이 덧쓰며. 스스로 변태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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