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진(열린군대를위한시민연대 활동가)

 

 

이 논문은 1987년부터 1993년까지 군대 내에서 터져 나왔던 양심선언 군인·전경들 그리고 그들과 연대했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어떤 이들의 용기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당시 군대 내에서 살았던 젊은 청년들과 그들과 함께 했던 이들의 힘겨웠던 고뇌와 선택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논문 속에 나오는 30여 년 전의 나와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논문의 저자이자 열린군대를위한시민연대에서 함께 하는 신재욱 활동가가 학업을 병행하며 2년여의 대학원을 마칠 즈음 양심선언 군인전경을 주제로 잡았다는 말을 듣고 난 “누가 관심 있겠습니까?”라며 눙치고 들었다. 말로는 다른 주제를 찾아보시라 했지만 내심 고마웠고 기대가 되었다. 그 어떤 일에도 성실한 그가, 사람에 대한 가늠조차 어려울 정도의 감수성을 지닌 그가 어떤 결과물을 내놓더라도 그것은 기대 이상일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1987년부터 1993년까지 있었던 마흔 네 명의 군인전경 양심선언자들에 대한 연구는 전무했다. 우리 사회에 양심적 병역거부라는 단어 자체가 존재하지 않던 시기, 군대의 문제를 지적하고 부당한 명령을 거부한 이들은 군대에서는 탈영병이었고 사회에서는 범법자였다.

그러나 논문은 양심선언 군인전경이 나타나게 된 연원을 1980년대 초 광주민주화 운동 이후에서 찾고 있다. 강제징집, 녹화사업, 군대 내 조직사건 등 병역의무가 민주화 운동의 탄압 수단으로 활용되며 군대 내에서 수많은 피해자와 의문의 죽음들이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특히 전투경찰은 군 입대자의 신분을 경찰로 전환시켜 사실상 군대가 학생과 시민의 민주화 요구를 짓밟는 군사독재의 물리적 수단으로 악용된 기형적인 군대였다.

그런 군대 내의 상황 속에서 고뇌하는 많은 군인·전경들이 있었고 그들 중 일부는 양심선언이라는 선택을 하게 된다. 논문은 그 과정을 ‘모순 인식-부적응-거부’라는 양상을 띠었다고 분석한다. 양심선언자들에게 군 입대는 인지부조화로 작동했고, 부조화의 발생이 모순 인식이며, 부조화 완화를 위한 적응 시도가 잘 작동하지 않으면 부적응 상태가 되고, 부적응이 임계치에 다다랐을 때 특정한 계기와 만나면서 양심선언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나의 경우를 이 분석에 적용해보면 ‘모순 인식’은 군대가 내가 생각한 것과 달랐다는 것이었다. 입대 전 나는 군대에 대한 거부감이 많은 편이 아니었고 오히려 ‘국민이라면 군대 가야지’라고 생각했던 청년이었다. 그러나 군대에서 내가 해야 했던 일은 전투경찰이 되어 학생과 시민의 민주화 요구를 진압하는 것이었다. 외세로부터 국민을 지키기 위해 군 복무를 하는 것이라는 내 기대 및 인식과 실제 내가 수행해야 했던 임무는 완전히 모순되었다. 그 모순은 나를 조직에 적합지 않은 존재로 만들어 갔다. 수많은 집회 및 시위 진압 현장에서 나는 유능하지 못한 존재였다. 내 의식과 의지에 반하는 명령을 수행해야 하는 상황에서 나는 전투경찰이라는 조직에 ‘부적응’하는 존재가 되어 갔다. 부적응이 심화되어 가던 중 ‘특정한 계기’가 발생했다. 1991년 4월 26일 동료 전투경찰들이 당시 명지대 1학년생이던 강경대를 쇠파이프로 구타해 죽인 사건이 그것이었다. 다른 부대 전투경찰들이긴 했으나 이 사건은 나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우리가 사람을 죽일 수도 있구나’라는 자각에 이르게 했다. 그리고 그 자각은 ‘더 이상 부당한 명령을 수행해선 안 된다’라는 결심에 이르게 했다. 양심선언은 그 결심이 외화된 모습이었다.

 

1991년 5월 명지대학교에서 열린 강경대 열사 장례식에 참석해 추도사을 읽는 박석진. 박석진은 전투경찰 복무 중 양심선언을 하고 탈영병 신분으로 농성을 했다. 

 

‘먼저 거부한 자’들과 ‘나중 거부한 자’들은 그런 과정을 통해 서로의 존재를 확인했고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동지)’가 되었다. 또 우리를 지지하고 헌신적으로 지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 모두가 함께 논문에서 ‘군 민주화 운동’으로 표현한 사회적 실천을 전개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었지만 그 몇 년 간의 기억은 농밀했고 나는 그 시간을 통해 삶의 방향성을 유지하는 힘을 가질수 있었다 논문에서 군 민주화 운동가로서의 ‘정체화 과정’으로 설명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우리의 실천은 지속되지 못했다. 논문에서 분석한 것처럼 수배와 감옥 등으로 마지막 양심선언 군인·전경이 원래의 삶의 자리로 돌아가자 당사자성을 상실한 운동은 지속되기 어려웠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당사자로서 다시 그 시간대의 그 자리로 돌아가 지속했으면 하는 바람이 남는 부분이었다.

지난 5월 25일 논문을 주제로 열린군대를위한시민연대에서 토크 행사를 개최했다. 그 자리에서 당사자가 아님에도 헌신적으로 함께 했던 오은아님이 눈시울을 붉히며 한 말이 마음에 남았다. “30여 년 간 이야기 해 본 적 없고, 누가 기억할 것이라 생각해 본 적 없고, 역사의 한 자락으로 남을 것이라 생각해보지도 못하며 살아왔다”

개인적으로는 살며 어쩔 수 없이 “어떻게 그런 용기를 냈냐?” “양심선언을 한 것에 대해 후회는 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별 대답 없이 웃고 넘어갈 때가 많았지만 논문을 통해 조금은 나눌 이야기들이 생긴 느낌이다.

신재욱 활동가가 논문을 통해
30년이 넘어 이야기 할 자리를 마련해준 것에 감사한다.
‘나와 우리’에게 나눌 이야기들을 만들어 준 것에 대해 감사한다.

 

*「군 민주화 운동가들의 정체화 과정 연구: 1987~1993 군인·전경 양심선언을 중심으로」논문 토크를 전쟁없는세상이 준비했습니다. 병역거부운동의 역사 속에서 양심선언을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우공(전쟁없는세상 운영위원)이 사회를 보고, 논문의 저자 신재욱 활동가와 오리(전쟁없는세상 사무국) 활동가가 패널로 참석합니다. 7월 11일(목) 저녁 7시 당인리교회 예배당에서 진행합니다. 참가신청은 아래 링크에서

🎈‘군도바리, 양심선언, 병역거부’ 신청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