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잎(인권교육센터 ‘들’ 상임활동가)

 

‘아, 진작에 영어 공부 좀 해둘걸!’

솔직히 말하자면 독일 베를린에서 다크투어를 하면서 제일 자주 든 감정은 영어를 멀리했던 지난 시간에 대한 후회였고, 다음은 ‘아니 근데 유럽 놈들 아시아권 언어 가이드는 왜 하나도 없는 거야?’ 하는 불만이었다. 그렇게 4일을 보내고 나니 전시 안내의 60%는 번역기로 끼워 맞추고, 30%는 번역도 이해를 못 했고, 10% 정도만 이해한 내가 후기를 써도 되나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언어가 안 통하고 전쟁과 군사주의를 잘 몰라도 따라갈 수 있었던 기록들을 중심으로 나눠보려 한다.

여행의 시작은 지극히 사적인 이유로, 단체에서 함께 활동했던 날맹을 보러 떠난 길이었다. 병역거부를 했던 날맹은 전쟁없는세상 활동도 해왔는데, 지금은 핀란드 탐페레에서 평화학을 공부하고 있다. 오로라, 호수, 그리고 날맹이 있는 핀란드 여행을 꼭 가리라 다짐했는데, 늘 그렇듯 일에 치여 엄두를 내지 못했다. 특히 작년에는 ‘4.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 활동에 참여하면서 세월호 10주기 공식 기록 작업을 하느라 숨 돌릴 틈 없이 바쁜 시간이 이어졌다. 책이 출간되면 핀란드 여행을 가자고 나를 어르고 달래며 원고를 썼다. (*책은 올해 3월 <봄을 마주하고 10년을 걸었다: 세월호 생존자, 형제자매, 그 곁의 이야기>(온다프레스)로 출간됐다.) 마침 핀란드 여행을 함께 결의(?) 했던 이들 중에 절반이 함께 작가기록단 활동을 했던 구성원들이었는데. 그중 한 명이 베를린 다크투어를 제안했다. 인터뷰 과정에서 세월호 유가족 형제자매들이 다녀왔다고 자주 언급하던 ‘베를린 다크투어’. 전쟁도, 학살도, 기록도 잘 모르지만 궁금했다. 독일은 자신들이 가담했던 전쟁과 학살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전쟁의 자국을 따라 걷다 병역거부 후 평화학 연구를 하는 날맹을 만나고 온다니! 여행에 나름의 기승전결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WIR GEDENKEN – 우리는 기억한다.” 누구를?

나에게 가장 새로웠던 곳은 신티와 로마 메모리얼로, 베를린의 가장 큰 공원의 안에 마련된 추모공간이다. 이곳은 이른바 ‘집시’라고 불리는 신티와 로마인들을 나치 정권이 어떻게 차별하고 학살했는지를 다루고 있다. 나치 정권이 몰락한 뒤에도 이들에 대한 차별은 계속 이어졌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들에 대한 학살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는 느낌이었다. 나 또한 이곳에 오기 전까지 나치 희생자 중 ‘신티와 로마’라고 불리는 이들이 있었다는 것도 몰랐다. 최근에는 다양한 나치 희생자들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진행되었는지 (비록 유대인을 다루는 비중이 높기는 하나) 다른 메모리얼에서도 퀴어, 장애인, 신티와 로마 등 다른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작센하우젠 수용소

작센하우젠 수용소의 수감시설

 

베를린에서 1시간 정도 거리에 위치한 작센하우젠 수용소도 그런 공간 중 하나였다. 일행들과 수용소 지도를 보면서 입을 모아 ‘지독하다.’라고 탄식했다. 삼각형 모양의 터, 그 위에 삼각형으로 배치된 건물들, 그 꼭짓점에 있는 감시탑, 학살의 피라미드 속에서 색색의 삼각형 식별표를 달고 있었을 사람들. 나치 정권이 어떻게 사람을 평가하고, 분류하고, 제거해나갔는지, 이 공간의 모습이 학살의 증거 그 자체였다. 내부 수감시설에는 방마다 어떤 사람들이 머물렀는지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함께 그들을 기리는 꽃, 편지, 예술작품들이 놓여 있었다. 얼마나 다양한 이들이 수용소에 도착해 죽음을 맞이했을까. 먹먹한 마음으로 무수한 방 사이를 걸었다.

 

노이에바헤

노이에 바헤. 텅빈 공간에 케테 콜비츠의 작품 ‘죽은 아들을 안은 어머니’가 놓여있고 천장에 난 둥근 창을 통해 콜비츠의 작품에 자연광이 비추고 있다.

 

그날의 먹먹함은 ‘노이에 바헤’를 방문했을 때 더 깊어졌다. 노이에 바헤는 훔볼트 대학교와 독일 역사박물관 사이에 있는 추모관이다. 텅 빈 듯한 내부에는 케테 콜비츠의 ‘죽은 아들을 안은 어머니’라는 작품만이 놓여 있고, 둥근 천장으로 들어오는 자연광이 이들을 비추고 있다. 사진으로 보기에는 공허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비어있기에 오히려 빠져들게 되는 공간이었다. 입구 주변에 앉아 한참 동안 조각상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다. 나도 그를 따라 앉아보았다. 내 옆에 곧 다른 사람이 와서 앉았다. 그렇게 이 공간의 여백은 계속 드나들고, 머물고, 추모하는 사람들로 채워져 있었다. 조각상은 아들과 어머니라는 것 외의 정보는 알 수 없게 되어있었는데, 나는 그 점이 이 작품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전쟁은 누구에게나, 어떤 의미로든 자국을 남긴다. 나와서 보니 노이에 바헤 앞에 여러 언어로 번역된 추모문이 붙어 있었다. 유럽에서 거의 유일하게 만난 한국어 추모문도 있어 반가운 마음으로 사진을 찍었다.

 

“우리는 전쟁으로 고통받은 민족들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박해받고 목숨을 잃은 시민들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세계대전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전쟁과 전쟁의 결과로 고향에서, 포로 생활 중에,
그리고 추방을 당해 목숨을 잃은 무고한 사람들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살해된 수백만 명의 유대인들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살해된 신티와 로마를 기억합니다.
우리는 혈통, 동성애, 질병, 미약함 때문에 살해당한 모든 사람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생명권을 부정당하고 살해된 모든 사람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종교나 정치적 신념 때문에 희생된 사람들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폭정에 저항해 목숨을 바친 모든 여성과 남성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양심을 저버리기보다 차라리 죽음을 택한 모든 사람을 추모합니다.
우리는 1945년 이후의 전체주의 독재에 저항한 이유로
박해받고, 살해당한 모든 여성과 남성을 기억합니다.

-노이에바헤 앞

 

이 추모문을 보고 나니 나치의 학살을 말할 때 ‘홀로코스트(Holocaust)’라는 단어를 자연스럽게 써왔던 지난날이 부끄러웠다. (홀로코스트는 ‘유대인 학살’이라는 의미다) 내가 다크투어에서 만나고 배운 나치의 학살은 유대인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별되고 누락된 기억은 차별이 낳은 또 다른 존엄의 훼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존엄에 기반하여 누구도 차별하지 않는 동등한 사회적 기억을 만든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마주하고, 어떻게 기록해야 할까. 여러 질문이 내 안을 맴돌았다.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일

“ It happened,
therefore it can happen again: this is the core of what we have to say.”
― Primo Levi

첫날 방문했던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의 내부 전시는 이탈리아의 화학자이자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생존자인 프리모 레비가 남긴 말로 시작한다. “이 일은 또 일어날 수 있다.-it can happen again”은 그의 말처럼 세상은 여전히 전쟁 소식이 끊이지 않는다. 이 글귀를 보면서 책 출간 이후 있었던 북콘서트에서 세월호 유가족 형제자매 남서현 님이 하신 이야기가 생각났다. “세월호 형제자매들끼리는 계속 생각해왔어요. 이런 일이 또 생길 거라고. 우리 같은 사람들이 또 있을 거라고. 그런데 10.29 이태원 참사가 벌어지는 걸 보며 그 순간이 너무 빨리 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말씀을 하시던 서현 님의 표정을 그리며 문구를 받아 적었다. 프리모 레비도 지금의 세계를 보았다면 비슷한 마음을 느꼈을까?

그의 말을 지나면 1930년대부터 시작된 유대인 차별정책이 나치의 공포정치를 만나 어떻게 진화하고 재생산되었는지가 나온다. 뉘른베르크법 등을 거치면서 유대인을 비롯한 특정 존재들에 대한 차별은 공식적인 제도로 자리 잡게 되고, 나치의 학살행위도 더 공공연해졌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런 내용은 다른 기록관-공포의 지형학, 신티와 로마 메모리얼, 유대인 박물관 등-에서도 볼 수 있었다. 특히 공포의 지형학은 나치가 어떻게 독일인들의 ‘공포’ 감정을 자극했고, 그것이 어떻게 전 국민적인 전쟁 찬성을 끌어냈는지를 주로 다루고 있다. 전쟁의 결과만이 아니라 전쟁까지의 경로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점이 인상 깊었다. 아마 프리모 레비의 말처럼 전쟁과 학살을 특정 개인이나 국가의 문제가 아니라 언제든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일로 여기도록 전쟁 이전의 진행 과정을 세세히 기록한 것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공포의지형학-괴벨스연설

공포의 지형학 기록관에서 만난 괴벨스연설을 들으며 밝은 표정으로 전쟁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사진.

 

그 외에도 사건이나 수치만큼이나 사람을 기록한 자료가 많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특히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은 전시 마지막에 6명의 나치 희생자를 다루고 있었다. 이들의 얼굴, 이름, 남긴 편지나 일기 등을 따라가다 보면 전쟁의 한복판에 놓인 삶에 대해 짐작해보게 된다. 그중에는 “We will see each other no more. I wish you both all the best. Think of me with love, as I do of you.”라는 편지가 있었다. 쓰는 이와 받는 이도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을 텐데. 그 속에서도 서로의 안부를 묻고 마지막 인사를 건넸을 이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나는 그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한편 ‘공포의 지형학’은 피해자 외에도 전쟁에 가담했던 많은 사람들의 사진을 전시하고 있었다. 전쟁을 부르짖는 얼굴, 두려움에 휩싸인 얼굴, 전쟁에 끌려나가는 얼굴, 반전 평화를 외치며 처형당하는 얼굴, 평화롭고 행복한 얼굴들. 나치 정권의 대표적인 정치인이었던 괴벨스의 연설에서 “Do you want total war?”라는 질문에 “Yes!”라고 답하는 사람들의 사진을 보았을 때는 아득함까지 느껴졌다. 어떻게 표정이 이리 밝을 수가 있을까. 평범한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전쟁을 외치고 있는 장면을 보다가 최근의 전쟁 상황이 떠올라 소름이 돋기도 했다.

 

나가며

기록의 방식과 내용 모두 나에게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한국의 기록관이나 역사교육에서는 주로 숫자나 통계 등의 결과를 많이 배웠던 것 같다. 인물이 등장하더라도 대개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전부였다. 그래서 전쟁도, 참사도 조금 멀게 느껴졌던 것도 같다. 하지만 독일의 기록관과 나치 수용소에서는 그런 거리두기가 불가능했다. ‘나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과연 저항할 수 있었을까?’ 무거운 질문이 끈질기게 따라왔다. 심지가 곧고 강한 사람들이 평화운동을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취약함을 아는 사람들이 평화 운동에 끌리는 것이 아닐까? (아닐 수도 있다. 사실 나는 평화운동 문외한이다) 누구나 휘말릴 수 있기에, 전쟁에 가담할 수 있기에 우리는 더더욱 평화를 말해야 한다.

호기롭게 여행기를 쓰겠다고 했지만, 사실 아직도 이 시간이 남긴 고민과 생각을 다 정리하지 못했다. 방문한 곳들에서 나의 예상보다 더 무겁고, 아프고, 혼란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나는 이렇게까지 진지한 마음으로 온 건 아니었는데?’ 그런데도 도망가고 싶은 게 아니라 더 다가가고 싶다는 게 이상했다. 한 발 떨어져서 어두운 역사의 단면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뛰어들어 이 역사와 나를 연결해나가는 것이 다크투어구나. 관찰자가 아닌, 목격자로, 연루자로 만나야 하는 거구나. 다른 이들도 베를린에 가게 된다면 꼭 다크투어를 해보길 추천한다.

 

홀로코스트메모리얼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