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전쟁없는세상 회원)

 

세계의 수많은 나라에서 6000만 명이 전쟁터에 동원되었다. 군인과 민간인 약 1500만 명이 죽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야기다. 많은 사람이 제1차 세계대전을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이라 불렀다. 이 전쟁을 끝으로 더 이상 이런 끔찍한 전쟁은 안 된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이 글에서 소개할 보드게임 〈더 그리즐드(The Grizzled)〉(아래 그리즐드, 한국 정식 발매명 〈병사들의 귀향〉)는 바로 그 제1차 세계대전이 벌어진 전장을 배경으로 제작된 게임이다.

 

전쟁 게임인데, 총도 못 쏘고 포탄도 못 날린다고?

많은 전쟁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전쟁 지도자, 지휘권자, 혹은 우월한 능력이 있는 영웅의 입장에서 플레이하게 된다. 공격 혹은 수비를 하며 군인과 무기를 적절히 배치하여 요충지 점령, 적의 퇴각 혹은 항복 등의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주요한 플레이 목표이다. 전략적 판단에 따라 불리한 전황을 뒤집을 수 있고, 약간의 희생으로도 큰 전과를 얻을 수 있다. 혹은 적진 속에서 적을 모두 사살하고 당당하게 살아올 수도 있다.

그러나 그리즐드에는 전쟁 게임의 이런 기본적인 요소가 없다. 주인공들은 한 마을에서 나고 자라 프랑스군에 동원된 병사 6명이다. 이들이 맞닥뜨린 전장에서는 포탄, 화학 가스 공격, 돌격 호루라기 소리가 빗발치고, 눈과 비, 어둠이 찾아온다. 이러한 여섯 가지 ‘위협’ 상황을 이겨내다가 끝내 전쟁 영웅으로 죽을 수도 있지만, 그러면 게임은 진다. 죽음을 무릅쓰고 영웅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설령 비겁자가 되더라도 살아서 고향에 돌아가도록 서로 돕는 것이 이 게임의 승리 조건이다.

플레이어들은 그런 주인공 중 한 명을 택해서 서로 협동하여 플레이하게 된다. 이 게임에서는 적을 막아내거나,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를 점령하는 선택지가 없다. 주인공에게 총을 쏘라고, 포탄을 발사하라고 할 수도 없다.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전쟁에서 일어나는 위협과 ‘역경’(전쟁으로 인한 트라우마, 부상 등)을 동료들과 함께 묵묵히 견디다가, 적당한 시점에서 퇴각하는 것뿐이다. 이를 평화가 올 때까지 반복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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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들은 한 마을에서 나고 자라 전쟁에 징집된 프랑스군 병사들이다

 

그리즐드가 재현하는 평범한 우리들의 전쟁

게임에는 2개의 카드 더미가 있는데, 한 더미(‘시련 더미’)는 맨 아래에 비둘기가 그려진 평화 카드, 다른 더미(‘사기 더미’)는 맨 아래에 전쟁 영웅 기념비 카드가 있다. 라운드를 시작할 때마다 시련 더미에서 카드를 가져오며, 플레이어들이 돌아가면서 카드를 최대한 내려놓는다. 라운드가 끝나면 손에 남은 카드 숫자를 반영해 사기 더미에서 시련 더미로 카드를 옮긴다. 즉, 카드를 많이 내리면 점점 시련 더미가 얇아지고 카드를 많이 내리지 못하면 사기 더미가 얇아진다. 시련 더미가 먼저 바닥나서 비둘기 그림이 보이면 전쟁이 멈춰서 주인공 모두가 살아남은 것(승리)이고, 사기가 먼저 떨어져서 기념비를 보게 되면 전원이 전사한 것(패배)이다.

손에 집어 든 카드에는 ‘위협’이 그려져 있거나 ‘역경’이 표시되어 있다. 카드를 한 장씩 펼칠 때마다 위협과 역경도 펼쳐진다. 위협은 플레이어들이 함께 공유하는 상황으로, 게임 공간 한 가운데(‘무인지대’)에 펼쳐놓는다. 같은 위협 상황이 3개 놓이는 순간 작전은 실패하게 된다. 작전이 실패하면 그 라운드에 있던 카드가 다시 시련 더미에 쌓이기 때문에 주인공들이 점점 더 살아남기 어려운 상황이 된다.

역경은 플레이어 혼자 겪는 상황으로, 내가 고른 주인공 캐릭터 카드 옆에 펼쳐놓는다. 역경을 내려놓는 순간 온갖 페널티가 붙는다. ‘광분 상태’가 되어 다른 플레이어들보다 더 많은 카드를 받거나, ‘두려움’에 빠져 위협 상황이 2개만 되어도 도망쳐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허약 체질’처럼 다른 사람들이 퇴각하지 못하게 막는(허약한 사람이 전장에 남아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도와줘야 하니까) 역경도 있다. 이런 역경이 4개 이상 쌓이면 그 주인공은 죽게 되고, 게임을 지게 된다.

게다가 각 라운드 끝에는 반드시 주인공들의 사기가 떨어지면서, 플레이어들 손에 있는 카드 장수(최소 3장)만큼 사기 더미에서 시련 더미로 옮겨진다. 그만큼 플레이어들이 해결해야 하는 위협, 역경이 더 늘어나게 된다.

이 게임을 같이 플레이했던 어떤 동료는 이런 주인공들을 두고 ‘이런 오합지졸을 데리고 어떻게 전쟁하라는 거냐’라고 투덜거리기도 했다. 전쟁을 지휘하는 입장에서는 그럴지 모르겠다. 전쟁 영웅들에겐 주인공 같은 병사들이 ‘하찮고 도움도 안 되는 사람들’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점에서 그리즐드는 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겪는 전쟁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전쟁과 맞닥뜨리는 우리 대다수는 주인공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입장일 것 같다. 3㎏짜리 총을 들고 다니는 것도 어렵고, 엎드리거나 쪼그려서 다니면 쉽게 지치며, 뛰어가라 하면 곧 숨을 헉헉대는 그런 평범한 사람들 말이다. 이들은 총소리, 폭탄 소리에 겁을 먹고, 아무리 적이라도 사람을 죽이는 것, 옆에서 사람이 죽어 나가는 것에 큰 트라우마를 겪는다.

적의 참호로 진격하다가 수십만 명이 죽거나 다치고, 어느 날 하늘에서 포탄이 비처럼 떨어지는 상황에서 무슨 정의와 명분을 떠올릴 수 있을까. 스스로 전쟁을 시작하지도, 멈추지도 못하는 병사들이나 민간인들은 전쟁이 언젠가 끝나기를 바라며 하루하루 어떻게든 살아갈 뿐이다. 그러나 수천만 명이 죽은 큰 전쟁 속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서 고향에 돌아가기란 너무 어렵다.

 

그리즐드 게임 구성물

그리즐드 게임 구성물

 

서로 도우면 살 수 있다, 어쩌면……

그나마 이 게임에서 숨통이 트이는 부분은 서로를 도울 수 있다는 점이다. 플레이어는 퇴각하면서 커피 한 잔이 그려진 ‘지원’ 토큰을 내려서 다른 사람을 도와줄 수 있다. 지원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은 역경 카드를 버릴 수 있다. 또한 게임을 하는 동안에 여러 가지 응원의 한마디가 적힌 ‘격려’ 토큰을 받을 수 있는데, 이 토큰을 쓰면 플레이어들이 손에 들고 있는 일부 위협 카드들을 버릴 수 있다.

심지어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적군까지도 협력하여 싸움을 그쳤던 ‘크리스마스 정전’을 구현한 카드도 존재한다.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카드는 자신 혹은 동료의 역경을 제거할 수 있는 효과가 있는, 이 게임에서 유일하게 반가운 카드다.

무엇보다 이 게임은 모두가 살아남아야 하는 협력 게임이므로, 플레이어들이 어떻게 하면 동료를 더 잘 도와줄 수 있는지 고민하게 한다. 나는 위협이나 역경을 더 감당하더라도 어려움에 부닥친 동료가 무사히 퇴각하도록 도와줄 수 있다. 이 외에도 서로를 배려하는 다양한 판단을 통해 죽지 않는 길을 계속 찾아나갈 수 있다.

이런 작전을 여러 번 거쳐서 그 모든 위협과 역경을 잘 버텨내면 주인공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낼 수 있다. 그러나 그 과정은 쉽지 않아서, 그리즐드를 두세 번 플레이하면 겨우 한 번 가능한 정도였다. 아마 현실에서는 더 힘들고 벅찬 일일 것이다. 그나저나 전쟁은 이겼을까, 졌을까? 알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이 게임에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부디, 우리의 우정이 전쟁보다 강하기를

그리즐드의 게임 박스에는 “우정이 전쟁보다 강할 수 있는가(Can Friendship be stronger than War)?”라는 질문이 있다. 이후의 역사를 보면 아쉽게도 그렇다고 자신 있게 대답하진 못할 것 같다. 20여 년 뒤에는 더 큰 전쟁이 벌어져서 제1차 세계대전보다 더 많은 5000만~8000만 명의 사람이 죽었다. 제2차 세계대전마저도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이 되지는 못했다. 지금도 우크라이나, 팔레스타인 등 세계 곳곳에서 전쟁과 학살이 지속되고 있다.

그래도 많은 사람이 전쟁보다 강한 우정의 힘을 믿고 있다. 한국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 전쟁 지역 피해자, 민간인들과 연대해 전쟁을 멈추기 위한 여러 활동이 벌어지고 있다. 게임에서는 동료들이 건네는 커피 한 잔, 격려의 한마디 덕분에 또 하루를 무사히 넘기곤 했다. 지금 전쟁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이 무사히 집으로, 일상으로, 사랑하는 사람 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우리가 건넬 수 있는 ‘커피 한 잔’, ‘격려 한마디’는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