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란 (강정마을 비건퀴어에코페미니스트)
매일 낮 12시 강정마을 인간띠잇기, 행진 속 펄럭이는 깃발과 울려 퍼지는 음악 사이로 뒤뚱거리는 엉덩이와 총총거리는 발걸음이 있다. 강정마을 주민, 강아지 숨이와 눈이다. 자매 숨이눈이는 강정평화센터에 사는 작은 진도믹스 강아지다. 둘 다 사람을 무척 좋아하고 애교가 넘친다. 숨이는 ‘내 사랑을 받아라!’ 스타일로 배를 까는 등 적극적인 애정 표현을 하고, 눈이는 ‘내 사랑을 알아주세요’ 스타일로 사랑스럽게 빤히 쳐다보다가 갑자기 뛰어 올라 뽀뽀 고백(공격)을 하는 게 특징이다. 내가 해준 게 뭐가 있다고, 숨이눈이는 나를 볼 때마다 방긋방긋 웃으며 환대와 사랑의 춤을 춘다. 항상 고맙고 감동으로 벅차오른다. 아기 때, 태어난 곳에 계속 있으면 식용견으로 팔릴 지도 모른다며 안전하게 키워달라는 누군가의 부탁을 받아 마을 활동가 한 분이 강정마을에 데려오셨다. 기본적인 돌봄은 하시지만, 실내견으로 키울 생각은 없으시고 자주 산책을 하지 못하신다. 그래서 나와 몇몇 친구들이 답답하고 외롭고 찝찝할(진도믹스는 매우 깔끔하여 자신의 거주지에 배변을 하는 것을 극도로 꺼린다) 숨이눈이를 위해 산책단을 꾸렸다.
나의 중요한 일과 중 하나는 강아지 산책이다. 숨이눈이뿐만 아니라 마을의 방치견 몇몇도 돌보고 있다. 주로 산책하러 가는 12시 즈음, 멀리서 나만 봐도 펄쩍 펄쩍 뛰고 프로펠러처럼 꼬리를 돌리는 강아지들을 보면 반가우면서도 마음이 따끔 아려온다. 하루 종일 얼마나 산책을 기다렸을까, 사람의 손길이 그리웠을까, 똥오줌이 급하지는 않을까, 비 오는 날이면 홀딱 맞고 있지 않을까. 강아지와 깊이 오래 교감할수록 다른 생명을 향한 나의 공감 수준도 더 구체적이고 진해져간다. 특히 제주도, 시골이라는 환경에서 마당이나 밭에 1m도 안 되는 짧은 줄에 묶인 강아지, 땡볕이나 강추위, 태풍을 견디는 강아지, 똥오줌에 둘러싸인 채 음식물 쓰레기를 밥으로 먹거나 물통도 없는 강아지를 보는 건 흔한 일이다. 유기되어 길거리를 떠도는 강아지도 많다. 병적인 수준의 감금 상태에서 오는 외로움, 배고픔, 두려움, 고통이 초롱초롱한 눈망울에 상처처럼 새겨져 있는 걸 본다. 이들을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지만 ‘소유자’(주인)라는 인간중심적 개념과 법 때문에 할 수 있는 일도 제한적이다. 그럴 때마다 절망스럽다.
어떤 존재를 돌보는 일은 쉽지 않다. 폭염이어도, 장마여도 강아지를 매일 산책시키고 사료와 물을 챙기는 일. 어디 아프지 않은지 살피는 일. 실외에 묶여 혼자 있을 강아지의 힘겨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나도 비루한 인간인지라 체력적으로 정신적으로 피로한 것은 사실이다. 현재 강아지를 입양할 수 없는 상황인 나는 이 생명들을 계속 어떻게 돌봐줄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도 있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너무나도 부족하여 미안한 것이 크다. 그리고 전반적으로 우리 사회가 강아지를 비롯한 비인간 동물에 대한 관심과 인식이 낮은 것도 속상하다. 그래서 난 여성 평화 운동가의 일상을 쓰는 이 지면에 강아지 돌봄에 관해 쓰고 싶었다.
나에겐 강아지 산책도 평화 운동이다. 비폭력 대화, 토론이 평화 운동이 될 수 있듯이 나는 강아지 산책도 평화를 이루는 데 기여한다고 믿는다. 생명을 존중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강정마을 해군기지 앞에서 난 지구 건너편에서 일어나는 전쟁과 학살에 반대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인다. 내가 사는 마을, 나라에서 벌어지는 부조리한 일에도 저항하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그러나 가끔 구호들을 외칠 때, 생명 평화를 바라는 나의 목소리가 허공에서 흐트러지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 알고 보니, 바로 내 앞에는 고통 받고 있는 가여운 생명이 있었다. 목줄이 갑갑해서 같은 자리를 빙빙 도는, 줄이 꼬여 사료와 물을 먹지 못하는, 혹은 사료와 물도 없는, 비에 홀딱 젖은, 사람과의 교류가 너무도 고픈 강아지들이 제주 도처에 있었다. 생명 평화를 말하면서 이들을 도저히 지나칠 수는 없었다. 강아지와의 만남은 철학자 레비나스의 표현처럼 “타자와 조우한 순간”이었다. 레비나스가 말했듯 타자의 얼굴은 설사 우리가 원치 않았더라도 어느 순간 관계를 생성하고, 타자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자기 자신보다 더 걱정하게 만든다.
그러나 (당연하지만) 모두가 나처럼 강아지들에게 관심을 갖지는 않다. 시골이라 아직도 강아지를 묶어 놓고 산책도 안 시키는 것이 당연하고, 방치하거나 학대해도 문제조차 되지 않는다. ‘주인’이 있는 개는 쉽게 건드리지도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내가 강아지 돌봄을 하며 자주 들었던 말은 ‘어쩔 수 없다’는 말이었다. 강아지의 아픔에 괴로워하면 ‘함께하자’라는 말보다 ‘그만 하라’는 말이 더 자주 돌아왔다. ‘개는 개다’, ‘원래 다 이렇게 키운다’면서… 그런 말을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해군기지도, 전쟁도 모두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반전과 평화를 말하는 사람들에게서도 종종 그런 말을 들을 때가 있었다. 모두에게 물어보고 싶다. 누구의 입장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인가? 당장 내 자신이 목에 줄이 감겨 움직이지도 못하고, 굶주리고, 혹독한 기후를 견디고, 몸과 마음이 아파도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일까?
나는 ‘어쩔 수 없는 일’에 의문을 던지고 싶다. 전쟁을 일으키는 군사주의는 어떤 생명은 죽여 마땅하다는 것을 정당화한다. ‘대의’를 위해, 적을 이기기 위해, 강해지기 위해 작은 존재들을 쉬이 쓰러뜨린다. 군대나 전쟁 기지, 학살은 그런 이유로 작동된다. 그리고 우리 곁에서도 인간의 탐욕 때문에 고통 받는 비인간 동물의 모습에서 어렵지 않게 군사주의를 찾을 수 있다. 강아지를 비롯해 돼지, 닭, 소, 물살이… 무수한 비인간 동물을 함부로 대하고 착취하고 죽여도 큰 문제가 아닌 이 일상이 군사주의 그 자체가 아닌지 성찰할 것을 제안한다. 개는 개라서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개는 개이기 때문에 개로서 폭력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고쳐 말하고 싶다.
군사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첫 번째 마음은 “원래 다 그렇다”는 말에 반기를 드는 것이다. 전쟁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전쟁 기지를 만들기 위해 아름다운 마을과 자연을 파괴하는 일은 ‘피할 수 없는 일’이 아니다. 강정마을에서 나는 생명 평화의 가치를 배웠고, 군사주의를 비판하고 저항하는 일을 익혔다. 그래서 강아지는 물론 수많은 비인간 동물을 바라보는 태도에 팽배한 군사주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울러 강아지와의 시간은 내가 그들에게 돌봄을 주는 일방적이고 시혜적인 방식이 결코 아니다. 그들은 내게 매일같이 사랑과 환대의 몸짓을 듬뿍 선물하고, 우리는 애정 어린 돌봄을 주고받는다. 이들 덕분에 나는 내 안의 군사주의를 하나하나 녹일 수 있었고, 진정으로 생명 그 자체가 얼마나 존귀한지 깨달았다. 평화의 참 뜻도.
모두가 완벽하고 완전무결한 것은 불가능하다. 나 또한 여전히 온몸에 체화된 군사주의와 성차별주의 등 철폐할 것이 가득하다. 그래서 생명 평화를 위해 일상에서부터 할 수 있는 것을 실천하고자 한다. 진정한 생명 평화는 지금 내 앞에 있는 생명을 대하는 자세에서부터 시작된다. 강아지 돌봄은 우리 마음속에 내재화된 군사주의를 사라지게 만드는 가장 효과적이고, 무엇보다 즐겁고 감동적인 직접 행동이다. 누군가는 사소하다고 여길 수 있는 강아지 돌봄이 평화를 퍼뜨리는 씨앗이 될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강정마을 인간띠잇기 때 강아지들이 산책하며 마음껏 냄새 맡고 뛰어 놀고 인간과 애정을 나누는 ‘동물띠잇기’를 상상해본다. 나는 비인간 동물과 인간 동물 모두 생명으로서 귀하다는 걸 보여주는 ‘동물띠잇기’를 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