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란 (강정마을 비건퀴어에코페미니스트)

 

고백하건대, 이번 겨울 나는 윤석열 퇴진 집회에 몇 번 나가지 못했다. 내가 사는 제주도에는 제주시에서 계엄령이 해제된 이후부터 매일 윤석열 퇴진 집회가 열렸다. 강정마을에 사는 나의 친구들은 윤석열 탄핵을 외치고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추운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제주시까지 왕복 두 시간이 넘는 거리를 운전하여 꼬박꼬박 집회에 참여했다. 그들은 생업과 휴식을 희생하면서 부지런히 집회에 출석했고, 초반엔 나도 집회에 참여해 행진을 함께하고 구호를 외쳤지만 몇 차례에 그쳤다. 정치 참여에 적극적인 친구들이 집회에서 찍은 사진을 올릴 때마다 사실 나는 조금 위축되었다. 오늘 저녁에도 집회에 나가지 못한 자신이 소극적이고, 정치에 무관심하고, 나태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더 솔직해지자면, 남들이 나를 그렇게 볼까 봐 내심 두렵기도 했다. 특히 서울의 가혹한 추위와 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국회 의사당과 대통령 관저 앞을 지키던 용감하고도 빛나는 ‘키세스’ 시민들을 담은 사진을 보고, 감동적이고 한없이 감사한 마음도 드는 동시에 그렇게 열성적인 시민이 되지 못하는 내가 부끄러웠다.

나는 공황 장애가 있다. 지나친 스트레스를 받거나 몸이 피로할 때 공황 발작이 일어난다. 공황 증상은 인파가 많거나 폐쇄된 공간에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는데, 나는 그런 환경보다 컨디션과 체력에 더욱 영향을 받는다. 발병 초반에는 이전과 같이 활동하다가, 에너지를 과도하게 쓴 몸이 탈진하는 일이 잦았다. 밤이 찾아오면 온몸을 덜덜 떨고, 호흡에 어려움을 겪으며 생사를 넘나드는 듯한 통증을 겪었다. 공황 장애와 함께 살아온 지 어느덧 5년, 이제야 나는 스스로의 상태를 점검하며 체력을 몽땅 소진하거나, 취약한 상황을 만들지 않도록 조심하고 있다. 공황을 피하기 위한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난 과도한 체력을 요하는 야외 활동, 술자리, 빡센 여행을 되도록 피하고 있다. 집회 또한 나가기에 앞서 머뭇거리게 되는 활동 중 하나다.

이 과정을 거치며, 예전처럼 활동적이지 못한 스스로를 발견한다. 주위에는 임시보호하고 있는 강아지 돌봄을 핑계로 집회에 나가기 어렵다고 말하곤 했지만, 사실 난 두렵다. 집회에서 열심히 걷고, 소리치고, 울고 화내고 웃는 에너지가 다 빠져나간 후 나에게 어떤 기나긴 밤이 찾아올지. 집회를 마친 후 서귀포시로 돌아가는 길에서 벌써 공황 발작이 엄습해오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심장이 쿵쿵 뛰지만 사지의 힘은 빠지고 불안으로 뇌가 어지럽다. 상태가 점점 악화되면 타인의 부축을 받아야 하며, 오랜 트라우마가 나를 삼켜 우울과 절망에 빠지기도 한다. 특히 아픈 나 자신을 잔뜩 혐오하는 마음도 일렁이기 시작한다. 지겹다. 광장이 아닌 침대에 있다는 것이, 멋진 연설과 당찬 구호를 외치는 대신 안정제 알약을 삼켜야 한다는 것이.

이런 어려움을 겪는 사람은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군중, 커다란 확성기 음량, 구호, 노래와 시위 현장의 혼잡함이 고통스럽고 무서운 사람들, 집회와 공권력(정부, 경찰, 군대 등)에 대한 트라우마를 가진 사람들. 휠체어 접근성이 떨어지고, 장애인 이동권이 보장되지 않아 집회에 올 수 없는 사람들. 이처럼 장애나 질병을 가진 사람들, 이들을 돌봐야 하는 사람들, 혹은 다양한 이유(해고·수감·폭력·공권력의 위협)로 집회에 참여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사람을 상상해 본다. 이들을 ‘우리’라고 묶을 수 있다면 ‘우리’에게 가능한 집회/시위 방식은 무엇이 있을까?

 

KakaoTalk_20250131_004105811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정치성’을 공공장소에서 행해지는 어떤 행동이라고 정의했다. 주류 담론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 이 주장에 한국계 미국인 예술가 요한나 헤드바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아픈 여자 이론(Sick Women Theory)”을 썼다. 그는 “누가 공공영역에 있을 수 있도록 허가받는가? 누가 보일 수 있도록 허가받는가?”와 같은 질문을 던지며 “시선의 바깥으로 치워진” 그러나 “주먹을 치켜들고 있는 모든 신체들”에 주목한다. 그럼으로써 공공영역으로 나가야만 정치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주장이 함축하는 배제를 조명하고, 공과 사를 나누는 이분법에 도전한다. 앞서 말한 ‘우리’를 그는 ‘아픈 여자’라는 단어의 조합으로 칭한다. (여기서 ‘여자’는 꼭 지정성별여성만을 의미하지 않고 사회에서 배제된 이들을 상징한다.)

헤드바는 정치성을 발휘한다는 것의 의미를 새롭게 쓴다. 집회와 행진에서 팻말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싶지만 현실에서는 손이 후들거리고 숨이 헐떡거리며, 겁이 나고 불안한 나 같은 ‘아픈 여자’의 정치성을 기존과는 다른 관점에서 본다. 그의 글은 정치적으로 무능력해 보이는 나에게 초점을 맞추는 대신, 나를 무능력하다고 느끼게 만든 ‘무엇’을 질문하게 만든다. 그에게 ‘무엇’은 자본주의의 착취적 구조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픈’ 사람은 쓸모없다고 여겨진다. 아픈 사람은 노동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그런 이들을 보살피는 것을 책임지지 않고 심지어는 죽어도 된다고 생각한다. 생산성과 건강을 최우선으로 삼는 이런 사회에서 나는 삶의 당연한 조건인 아픔과 돌봄을 받아들이기보다는 혐오하기 일쑤였다.

따라서 그는 “다른 이를 보살피고 스스로를 보살피는 일”을 반자본주의적 저항으로 제시한다. “그동안 역사적으로 여성화되고 그에 따라 비가시화되었던 역할인 간호, 양육, 보살핌을 자신의 일로서 맡는 것”, “서로의 취약성과 섬세함, 불안정성을 진지하게 받아들임으로써, 지지하고 존중하고 힘을 싣는 일”, “서로를 보호하고, 커뮤니티를 꾸리고 가꿔나가는 일”에서 급진적인 정치성을 발견한다. 사적인 일로만 간주된 일이 사회 변혁의 단초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꼭 거리에 나가지 않아도, 침대에 누워 있는 채로도 정치적 실천은 가능하다. 이를 위해서는 집에 머무는 자신과 나와 타인을 위한 돌봄 노동의 가치를 폄하하지 않아야 한다. 오히려 사랑과 보살핌을 가장 우선으로 여겨야 한다. 우리를 소모시키는 노동과 소비를 잠깐 내려놓는 것도 큰 전환이다. 사소해 보이는 생각과 행동의 변화가 이어지면 무자비하게 질주하는 자본주의의 동력도 사그라들 수 있다. 집과 침대에 머물며 서로 위안을 나누고, 죽을 끓이고, 허브차를 마시고, 말하고 귀를 기울이고 눈빛을 반짝이는 방식으로 우리는 세상을 바꿀 수 있다.

 

KakaoTalk_20250131_004118430

 

헤드바의 글을 읽고 ‘아픈 여자’로서 정치적 존재로 거듭나는 것에 대해 곰곰 생각해 본다. 비록 내가 오래 걷는 행진이나 활동적인 시위에 연대하지 못하더라도 난 여전히, 분명히 정치적 존재임을 알아차린다. 정치적 존재로서 나는 ‘돌봄’을 실천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강아지를 돌보느라 집에 머문 것은 집회에 참여하지 못하는 핑계가 아니라 비인간 동물을 보살피는 하나의 정치적 실천으로 재고할 수 있다. 돈과 시장의 논리보다 아픈 이에게 땀과 애정을 쏟는 일에 무게를 실음으로써 자본주의적 사고를 약화시킬 수 있다. 나와 같이 집회에 나가지 못한 이들의 다양하고도 구체적인 이유를 들여다보며 국가와 지역 사회, 공동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요구할 수 있다. 돌봄 또한 집회만큼 세상을 바꾸기 위한 중요한 정치적 실천이다. 이 깨달음을 토대로 모두가 모두를 돌보는 사회, 보살핌의 정치학을 상상하고 실현하고 싶다.

무수한 활동으로 나의 침대 위를 투쟁 현장으로 만들어나갈 것이다. 공공장소에 접근할 수 없음이 곧 공공성과 정치성에 능력을 발휘할 수 없음을 뜻하지 않는다고 알릴 것이다. 단 한 명이라도 배제되는 일 없이 모두가 정치적 존재로서 스스로를 인식할 수 있음을 증명할 것이다. 사회적 소수자가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그들을 소외시키는 사회에 대항할 수 있게 지지할 것이다. 그리하여 ‘아픈 여자’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정치적 능력을 발휘하고자 한다.

그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윤석열 탄핵 집회에 나가지 못한 나를 깎아내리지 않기. 타인에게 의존하는 스스로를 비하하고 혐오하는 대신 수용하고 긍정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모두가 모두에게 의존하고 산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기.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 보살피기. 사랑하기. 이것이 새로운 돌봄 정치학을 내 삶에 들여오기 전에 우선 내게 주어진 과제다. 요한나 헤드바가 말했다. “내 몸은 고통의 감옥이므로 나는 신비롭게 떠나버리고 싶지만 나는 내 몸을 사랑하기도 하고 정치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고도 싶어.” 그 말을 조용히 읊조려본다. 어느 순간 절실히 깨닫는다. 그동안의 상실과 고통이 나를 더 넓고 깊고 아름답고 지혜로운 존재로 만들어주었다는 사실을. 침대 위에서도 투쟁을 향한 주먹을 치켜들어 본다.

 

출처: 요한나 헤드바의 <아픈 여자 이론>은 다음 링크의 번역된 글에서 인용했습니다.
https://off-magazine.net/TRANSLATE/hedva.html, 최종 접속일: 2025.01.30.